연기(緣起)와 공(空)으로 정토세계 만들기
아미타부처님이 정토 세계를 하나 더 만든다면?
서양신학은 신이 만물에 계속 존재하는 힘 불어넣는다고 믿어
연기하도록 세계 만든다면 만물에 자성 없어 자연스레 공해져
공하게 창조한다면 최초 움직임 없어 모든 게 ‘죽은’ 세계될 것
서양신학은 세계의 생성과 만물의 존재에 대해 여러 형이상학적 가능성을 제시해왔다. 신이 무(無)로부터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는 서양신학자들은 신이 만물을 창조한 다음에 만물을 그냥 두면 만물은 어떻게 될까를 질문했다. 사물이 창조된 순간을 넘어 지속적으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창조된 사물이 다음 순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해야 할 필연성은 없다. 사물은 순간적으로 사라질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 일상의 경험과 맞지 않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신이 사물 안에 계속 존재할 수 있는 힘(concurrence)을 불어넣기 때문에 만물이 계속 존재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럴 듯한 설명이지만, 문제는 그들이 이런 힘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지속적 존재를 보고 그런 힘이 존재해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추론해서 나온 결론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철저한 경험론의 전통에 섰던 데이비드 흄 같은 철학자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서양인들은 신이 세계(1)를 창조하고는 스스로 계속 존재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지 않아서 바로 그 다음 순간 이 세계(1)가 사라져버린다고 본다. 그렇지만 세계(1)가 그렇게 사라진 순간 신은 다시금 세계(2)를 창조한다. 이 세계(2)도 다음 순간 사라지지만 신에 의해 또다시 세계(3)가 생겨난다. 이 과정이 매순간 반복된다. 세계는 이렇게 순간에만 존재하는 세계들이 생멸(生滅)하는 하나의 과정(過程)이다. 신은 마치 동일한 사물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방식으로 순간마다 세계를 창조한다.
위의 견해(見解)는 불교의 세계관과 닮았지만, 불교에서는 사물이 연기(緣起)에 의해 끊임없이 생멸(生滅)할 뿐, 신에 의해 매순간 새로이 창조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약 아미타불께서 정토세계를 하나 더 만드신다면 어떤 방식으로 창조하실까? 만물을 만드신 다음 그 하나하나에 스스로 존재하는 힘을 불어 넣으실까? 그러실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스스로 존재(自在)하는 힘이란 결국 스스로의 본성(自性)과 다르지 않아서 공(空)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미타불께서 매순간마다 새 세계를 창조하시는 방법을 선택하실까? 그러실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방식이 비록 만물의 무상(無常)함과 허구성(虛構性)을 보여주는 불교의 가르침과 잘 어울리지만, 이 방식이 정토세계를 가장 효율적으로 지속시키는 방법일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미타불께서는 매순간 세계를 재창조하시기보다는 다른 더 지혜로운 방법을 택하실 것이다.
아미타불께서는 중생이 좋은 환경조건에서 공부와 수행을 통해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게 하시려는 원(願)을 세우셨다. 그래서 나는 아미타불께서 만물을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하도록, 즉 만물이 연기(緣起)하도록 세계를 창조하실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 사바세계보다는 수행조건이 좋겠지만 정토세계에서도 공부와 참선을 통해 깨치려면 조건에 의해 수행의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변화가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물은 조건에 의해 생멸하므로 아무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도 또 자성을 가질 수도 없어 공하다. 연기(緣起)하는 것은 공(空)하다. 아미타불께서 만물이 연기(緣起)하도록 세계를 만드시면 그 세계의 모든 것은 자성이 없어 공하다. 별도로 만물을 공하도록 만들어 주실 필요가 없다. 그런데 먼저 만물이 공하도록 정토세계를 만드셔도 따로 만물이 연기(緣起)하도록 만들어 주시지 않아도 될까? 그렇지는 않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아미타불께서 만물이 공하도록 세계를 창조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세계의 만물은 저절로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 즉 연기(緣起)할까? 만물이 공하기만 할 뿐 아무런 최초의 움직임도 없다면 이 세계의 사물에는 어떤 운동이나 변화도 있을 수 없다.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멈춰진, 말하자면 모든 것이 ‘죽은’ 세계일 것이다. 공부와 참선 그리고 깨달음과 열반도 모두 멈춰져 불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위해 원하시는 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가 살아 움직이게 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정한 모든 운동과 변화의 시원(始原)이라는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 The Unmoved Mover)같은 것이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만물이 공하도록 창조하신 다음에도 다시 손가락을 튕기거나 하셔서 만물을 조건에 의해 연기(緣起)하도록 만드셔야 한다. 만물이 연기(緣起)하면 저절로 공하지만, 아미타불께서 만물을 먼저 공하도록 창조하시면 추가로 그것들이 연기하도록 만드시는 수고를 더하셔야 한다.
혹자는 만물이 공하게 창조될 수는 없다고 반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만물이 연기(緣起)하여 공한 세계에서 모든 운동과 변화가 멈추어진, 즉 연기(緣起)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이 상황은 연기(緣起) 없이 만물이 공한 상황일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이 가능하다고 보지만, 혹자는 또 연기가 없어진 세계는 만물에 자성이 생겨난 세계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물에 자성이 생겨난다면, 그 자성이 생겨나는 시점에 그 사물에 자성이 있거나 없다.
(1) 그 사물에 자성이 있다면 자성이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새로 생겨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그 사물에 자성이 없다면 자성이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무(無)로부터 생겨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에 자성이 생겨날 수 없다.
혹자는 연기하는 모든 사물이 공하기 때문에 연기하지 않으면 공하지도 않다고 반박하려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전건부정의 오류에 해당된다.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럽지만, 눈이 오지 않는다고 반드시 길이 미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가 와도 미끄럽고, 기름이 흘러도 미끄럽다.
아미타불께서는 제2, 제3의 정토세계도 만물이 연기하는 방식으로 창조하실 것이다. 그러면 만물은 자연스레 공하다. 지혜로우신 아미타불께서 만물을 공하게 창조하시고는 다시 만물을 연기하도록 만드시는 번거로운 길을 택하실 것 같지 않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94호 / 2021년 7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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