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가지 보시(布施) - 법상스님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 다.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입니다.
① 재시(財施)
재시는 물질적인 나눔, 베풂을 의미합니다. 돈, 음식 등, 물질적인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에 따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재물은 본래부터 나의 것이 아니므로, 모두의 것이기에 필요로 하는 이에게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재시 이것은 준다는 표현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그저 가져다 놓는다고 하면 분별심(分別心)이 좀 놓이겠나요? 필요한 것을 필요한 부분에 가져다 놓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재시(財施)하는 데 아상(我相)이 붙지 않을 것입니다.
돈도 없고, 딱히 가지고 있는 물질이 없으니 재보시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보시는 바로 지금 내 형편에서 조금이나마 다른 이들에게 마음을 담아 베푸는 것이지, 결코 많이 베풀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벌어야 베풀기도 할 것 아니냐는 말을 많이 하지만, 결코 보시는 나중에 돈 벌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벌어 보시하겠다는 마음은 이미 보시할 마음이 없는 겁니다.보시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로 하는 재시 또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입에 풀칠할 만원이 있다면 그 돈 쪼개어 오천원 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오천원은 나중에 백만원을 벌어서 오만원 보시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복(福)을 짓는 일이며, 밝은 보시가 됩니다. 내 전 재산에서 반이나 되지만 정말 힘겨운 이에게 베푸는 그 마음이 바로 보시바라밀의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돈의 액수의 크기에 의해 복(福)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밝고 똑 부러지는 수행이 없는 법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바로 당장 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가부좌를 틀고 몇 시간이고 앉아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렵게 어렵게 몇 년에 걸쳐 닦아야 하는 수행도 아닙니다. 그저 지금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처님들 가르침 가운데 복(福)과 지혜(智慧)를 증장하는 일은 수레의 양 바퀴와도 같습니다. 보시바라밀은 이 가운데 복력을 증장시킬 수 있는 수행입니 다. 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행도 어렵습니다. 수행자는 늘상 복을 짓고 사는 일에 크게 마음 쓸 일입니다.
이 보시바라밀 수행이야말로 빈부귀천이 따로 없으며, 수행력의 높고 낮음이 따로 없습니다. 누구나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한마음 내면 할 수 있는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수행을 하는 도반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십일조 수행은 내 월급의 10분의 1일 베푸는 것이 아니라,월급의 10분의 1을 무량한 이자를 보장받는 법계의 은행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내 돈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법계를 훔치고자 하는 밝고 큰 참 도둑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십일조 한다고 입밖에 내면 벌써 보시바라밀은 없습니다.
딱 정해 놓고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스스로 정해 놓고 베푸는 그 마음에 복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을 빌기만 하는 기복(祈福)불교를 탈피하고 복을 스스로 지어가는 작복(作福)불교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② 법시(法施)
법시는 정신적(精神的)인 베풂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 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미혹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을 법시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전법, 포교를 법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주위 사람들에 부처님 법을 전하는데 무척이나 인색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부처님 법을 만나서 생활이 안정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기쁨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데에 있어서는 소극적이기 마련입니다. 과연 내가 저 사람에게 불법을 올바로 전해줄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내가 말하는 불법에 대해서 과연 저 사람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앞서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전법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을 절에 데려오고, 불법 속에서 나와 같이 생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우리가 생활 속에서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전법일까요? 우선 전법하는 수행자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상대방이 지금 절에 안 다니고, 불법을 안 믿어도 좋으니 우선은 부처님의 법과 인연을 지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급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상 생활 속에서 항상 부처님 법대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조금씩이라도 부처님 법을 들려주 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이 저 사람의 근기에 맞을까 하는 염려는 접어두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인연을 지어 주는 것이기에 설사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고 혹은 쉽게 흘려 지나칠지라도 불법을 잠깐 이야기해 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전법을 한 것일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당장에 불법을 믿도록 하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작은 씨앗을 심어 주겠다는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훌륭한 전법, 법시는 내 스스로의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변화된 모습과 여법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그대로 생생하고도 가장 확실한 전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수행과 정진 그리고 맑게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가 보시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평소에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경전이나 불교관련 서적들을 틈틈이 구입하여 베풀어주는 일에서부터 요즘 같으면 맑은 인터넷 싸이트와 인연지어주는 일 또한 생활 속에서 작게나마 실천할 수 있는 좋은 법시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란 경전에만 한정되어있지 않습니 다. 진리를 글로써 말로써 풀다보니 그렇게 풀어논 말과 글이 경전(經典)으로 엮여진 것이지 이것만 경전이라고 딱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경전의 내용이 그대로 모든 상황에 천편일률적으로 다 맞는 것이 아니며, 경전에 들어 있지 않은 말이라도 진리일 수 있는 노릇입니 다. 큰스님들의 말씀이나, 어록, 법어집, 논서 등이 우리들에게 밝은 깨침과 지혜를 주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지혜로운 말 한마디는 그대로 진리가 되고 경전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이롭게 하고 지혜롭게 해 주는 말이 그대로 법시(法施)가 됩니다.
생활 수행자라면 마땅히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지혜로운 진리의 언어가 될 수 있어야 하고, 그 언어 속에 맑고 향기로운 향기를 뿜어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입을 열면 그대로 법시가 되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법에 맞는지 늘상 입을 관찰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③ 무외시(無畏施)
무외시(無畏施)는 말뜻 그대로 두려움을 없애게 하는 것,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혹 나는 가난해서 나누어 줄 물건도, 돈도 없으며, 머리에 든 것이 없으니 법시도 할 수 없어 나는 보시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더라도, 가진 것, 아는 것 하나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얼굴 표정을 밝게 하는 것, 따뜻한 말 한 마디, 칭찬 한 마디 등 남을 대할 때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훌륭한 무외시(無畏施)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남의 어려움을 함께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고, 또 즐거움이 있을 때는 함께 웃어주는 마음의 여유야말로 진정한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한량없는 공덕을 짓고 있는 것이며, 복 짓는 삶을 살아가는 것 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살다보면 그렇게 괴롭지도 힘들지도 않은데 항상 얼굴이 어둡고 찡그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다 과거세의 업력(業力) 때문이겠지만, 이는 엄격히 말해 한량없는 악업을 자꾸만 짓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꾸 웃는 얼굴 연습하는 일이 그대로 복전이 됩니다. 얼굴모습에서부터 포근하고 따뜻한 인상을 주어 그 모습 그대로가 무외시의 실천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얼굴만 보아도, 만나기만 하여도 기쁘고 행복한 사람 말입니다. 따로 이 무외시를 짓겠다 할 것도 없이 모든 이들이 나를 보면 행복해 하고, 좋아한다면 그것이 최고의 무외시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얼굴모습에서부터 날카롭고 험악하여 무외시를 베풀고 싶어도 첫인상부터가 거부감을 느낄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전 항상 조언을 합니다. ‘법우님 인생을 확~ 바꾸고 싶으시다면 늘상 활짝 웃고 다니세요’ 웃는 모습은 천하의 못나고 험악한 사람이라도 아름답게 마련입니다. 그대로 무외시의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인상을 늘상 찌뿌리고 다니고, 마음이 밝지 못하여 탁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 하루 이틀 그 어두운 마음이 습(習)으로 물들어 굳어집니다. 한생각이 굳어지면 이윽고 마음에서 물질로까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두운 마음이 날카로운 외모로까지 바뀔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일수록 거꾸로 자꾸 웃는 연습을 하면 따라서 마음 또한 자꾸 웃게 되고 그렇게 되면 조금씩 조금씩 외모도 바뀌게 되며, 업이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 무외시(無畏施)는 상대에게만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를 밝게 가꾸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집에서 주부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남편과 자식들, 그리고 부모님의 마음에 은연중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이런 집은 항상 오손도손, 도란도란한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남편의 말 한마디, 자녀들의 말 한마디가 그대로 밝고 환한 가정을 만드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집에 가면 웃으며 좋은 말하는 것, 칭찬하고, ‘힘들었죠’ 하고 위로하는 것부터 실천에 옮기면 됩니다. 회사에 출근하면서부터 활짝 웃고 밝게 인사하는 것, 미워하던 직장상사에게 오히려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 오래도록 미워하던 이가 있었다면 편지 한 장이며, 메일을 보내주는 것, 부모님께 ‘사랑해요’하고 말해 드리는 것, 그런 작은 실천이 무외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보면 ‘저 사람은 뭐가 그리 좋아서 늘상 싱글벙글이야’ ‘참 저 사람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밝게 했지만 ‘내가’란 상(相), 즉 아상(我相)이 없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내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했는데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내 딴에는 잘하려고 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해 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진정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는 무외시(無畏施)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무외시(無畏施)는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중생을 시봉(侍奉)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모두에게 부처님의 밝은 성품이 있음을 알아 내 주위 모든 사람을 부처님 모시는 것처럼 시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무외시(無畏施)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처존불 이사불공(心處存佛 理事佛供), 마음이 가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평등 본체인 이(理)와 차별 현상인 사(事)에 불공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근본 참 성품인 부처의 성품에 불공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상황 따라 생겨난 오염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체 모든 중생들에게도 부처의 성품과 똑같은 불성이 있으니 그들에게도 똑같이 불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늘상 부처님께 공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모든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공양하고, 욱하고 올라오는 오염된 마음, 탁한 마음, 분별심을 부처님께 공양올릴 일입니다. 부처(佛), 중생(衆生), 마음(心)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이 만중생에게 공양 올리는 일이며, 올라오는 마음 공양올리는 일이 부처님께 공양올리는 일입니다.
요약하면 법시(法施)는 타인의 마음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며, 재시(財施0는 타인의 몸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며, 무외시(無畏施)는 타인의 몸과 마음 모두를 이익 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이 세 가지 보시 모두는 결국 밝은 마음으로, 깨끗한 재물로, 지혜로운 가르침으로, 타인의 두려움을 없애줌으로 이끄는 부처님공양이며, 중생공양이고, 마음공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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