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끌어당김의 법칙)을 넘어...
내가 세상(우주)로 내보내는 그것이 다시 내게 들어오는 것이다.
돈으로 보시를 하게되면 내게서 내 돈이 나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많은 돈을 보시를 해도 언젠가 그 돈은 분명히 내게 다시 들어오게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어 보라. 내게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칭찬과 감사와 찬탄의 말이 돌아온다. 상대를 칭찬해 주는데 상대로부터 내게 욕이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은가. 모든 것들이 살고 있는 이 우주가 돌아가는 법칙도 이와 같다.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냈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내게로 들어올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언제나 영적인 균형을 맞추는 대평등의 일들만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이 우주(세상)이 돌아가는 운행 법칙이다. 나에게서 세상으로 나간 것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언제나 다시 내게로 들어온다. 내가 상대를 괴롭히면 상대방과 나와의 에너지는 불균형하게 되고 우주는 그 불균형을 균형이 되게 맞추기 위해 상대방이 나를 괴롭힐 일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욕을 하면 내게는 상대로부터 욕을 얻어먹을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조화로운 작용이다.
예를 들어 직장상사가 직원을 욕하고 괴롭혔다 치자. 그러면 상사와 직원과의 우주적인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다. 상사는 화를 풀었지만 직원은 괴롭힘을 당했다. 상사는 +에너지가 되었지만 직원은 -에너지가 되었다. 둘 사이에 깨진 에너지 균형을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직원이 어떻게든 다시 상사를 욕하고 괴롭힐 일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설사 이번 생에 상사와 직원 두 사람이 다시 못 만난다고 치더라도 두 사람 사이의 에너지의 불균형은 남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다음 생에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 깨저버린 에너지의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교 표현으로는 인연(因緣)이고 업보(業報)이다. ‘저 사람과는 악연인가봐’라고 할 때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는 반대로 직원이 직장상사로 태어나고 상사가 부하직원으로 태어나게 된다. 상사는 에너지의 불균형을 균형 있게 맞춰야 하기 때문에 우주적인 작용으로써 이상하게 그 부하직원만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괴롭히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만남과 상황을 주선하는 것이 우주법계고, 아바타에서 말한 에이와고,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성이라는 것이며, 인디언들이 말하는 어머니 대지라는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주는 이와 같이 대평등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을 언제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세상이 불평등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진리에서 보았을 때 이 우주는 지극히 평등하며 언제나 완전한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진행된다.
아주 쉽게 누군가에게 욕을 해 보라. 내게 무엇이 되돌아오는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랑하고 칭찬하면 사랑받고 칭찬받을 일들이 내게 생겨난다. 세상을 향해 감사함을 느낄 때 더 많은 감사할 일이 내게 찾아오고, 세상을 향해 불만을 느낄 때 더 많은 불만스러운 일이 내게 찾아오게 된다. 세상으로 감사를 내보내면 내게 감사가 들어오고, 화를 내보내면 화낼 일이 내게 들어오며, 만족하면 만족할 일들이 내게 생기고, 무시하면 무시 받을 일이 내게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우주의 평등하게 균형을 맞추는 영적인 작업인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맞출 뿐이다. 우주의 에너지가 언제나 균형을 맞추는 것을 우주의 작용, 혹은 우주의 법칙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작용을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우주는 자연스럽게 함이 없이 그저 균형을 맞출 뿐이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면 자연은 균형을 맞추려고 기상이변 등을 일으켜 본래적인 자연의 상태로 되돌아 가려고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사람도 몸을 함부로 다뤄 탁한 에너지가 몸 안에 쌓아면 감기몸살 같은 형태를 통해 내보내줌으로써 우리 몸의 자정작용, 균형작용을 돕는다. 이 우주 전체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언제나 이와 같이 에너지가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흐른다.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다.
전에 보았던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리가 에이와에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을 때 여주인공 네이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에이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이와같이 우주법계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오직 삶의 균형, 에너지의 균형을 맞출 뿐이다. 진리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안과 밖의 차별이 없다. 진리는 다만 에너지의 균형을 맞출 뿐이다. 진리는 에너지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 것이다. 그 때 우주법계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돈을 훔친자에게서는 돈을 앗아가고, 빼앗긴 자에게는 되돌려 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욕을 했으면 욕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고, 사랑을 하면 사랑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내게서 나가는 것과 내게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정확한 균형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주법계가 하는 일, 진리가 하는 일이다.
한창 유행처럼 번지던 ‘시크릿’이라는 책에서는 이러한 진실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엇이든 내가 우주로 내보내는 것이 내게 끌어당겨지는 것이다.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나, 화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 혹은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마음먹은대로 세상에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다는 말이 모두 이러한 법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법칙, 즉 내가 우주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 곧 내게 다시 들어오는 것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증명되고 있다. 우주는 이처럼 다만 우리가 우주로 내보내는 것을 다시 우리에게 들어오게 할 뿐이지, 내보내는 것 들어오게하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다. 우주의 본질에는 좋은 것 나쁜 것, 옳고 그른 것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에서, 판단과 분별에서 옳고 그름이 생겨나는 것이지 우주법계에는 그런 차별이나 분별 구분이 본래부터 없다. 다만 내가 우주로 내보내는 것을 분별 없이 다시 내게 들여보낼 뿐이다. 그러니 내가 우주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에 중심을 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 우주로 내보낼 생각보다는 세상으로부터 더 많이 얻기를 바라며 더 많이 가지려고만 한다. 세상을 향해 내보내야만 다시 내게 들어온다는 우주의 평등한 이치를 모른 채 내보내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며, 내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고, 얻고, 빼앗고, 성취하고,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우리가 이 세상 이 우주를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이 세상 이 우주로 내보내는 것이다. 진실은 우주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 곧 내게 들어오는 것이란 사실이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곧 나에게로 들어올 것이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는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와 같은 말이다. 무엇을 나누고 베풀 것인가가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짓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내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서 내게 들어오는 것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가, 우주로 내보내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보내는 것 뿐이다. 내보내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지만 내게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우주법계의 의지이다. 즉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닌 우리가 우주로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더 크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엄밀이 말하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오직 어떻게 하면 이 세상으로 이 우주로 더 많이 내보낼까, 나눌까, 베풀까, 보시할까, 회향할까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 뿐이다. 세상으로부터 내게 들어오는 것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말라. 세상으로부터 내게 들어오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법계의 소관일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우주로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 곧 내게 들어오는 것이니!
세상으로 우주로 내보내는 것과 업보(業報)
불교의 업(業)사상도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과보를 받는지가 결정된다. 지은 업에 따라 보(報)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업을 지었느냐가 곧 무엇을 우주로 내보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즉 몸과 말과 생각(마음)으로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냈느냐에 따라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라고 말해지는 이 법칙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의 법칙이라고 알려져 있다.
육근이 바로 나 자신이고 육경이 외부의 대상(세상)을 지칭하는 것이니 업보의 법칙(육근과 육경 사이의 법칙)은 나와 세상 사이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육근 즉 내가 무엇을 육경(세상)으로 내보냈느냐에 따라 육경은 내게 보를 보내주는 것이다.그래서 육근은 업을 짓고 육경으로부터 보를 받는다.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보를 받는다는 이 업보의 법칙이 바로 우주로 내보내는 것을 필연적으로 내게 다시 들어오게 한다는 법칙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 바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우주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는 이치인 것이다. 우주는 언제나 에너지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 업보라는 어떤 사상을 만들어내려고 애쓴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악행을 함으로써 악업을 지으면 둘 사이의 에너지는 불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 때 우주는 그 불균형을 균형과 조화로써 맞추기 위해 당연하게 과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업보니, 인과니 하는 말이 바로 우주법계의 대 평등성, 균형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육근, 즉 우리는 오직 업을 지을 뿐이지 어떤 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보’를 받는지까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보’라는 말은 ‘다르게 익어간다’는 의미로, 육근이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우주법계에서는 어떤 과보를 받게할지를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온갖 정보, 업력, 인연, 수행력 등을 총괄적으로 따져 ‘보’를 최종적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우주법계는 총체적이고, 시공을 초월한 전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한 뒤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언제 받아야 그나마도 그 사람에게 영적성숙의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보’를 받을 때 우주법계는 진리는 항상 자비와 사랑의 바탕에서 보라는 그러한 결정을 바로 그 때 바로 그곳에 내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우주 법계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번뇌와 업장과 아상과 집착이 적고 우주법계의 흐름과 일치를 이루고 있다면, 우주법계로 내보내는 것과 우주법계로부터 받는 것 사이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내보냄과 동시에 받을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사실 우주법계의 측면에서 보면 내보내는 것과 받는 것은 동시에 일어난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시간이 걸린다고 믿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우주 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위한, 우리를 돕기 위한 자비와 사랑의 관점에서 순리롭게 행하는 바 없이 무위(無爲)로써 일을 행한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보를 받느냐가 결정된다는 큰 틀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일반적인 경우 과보를 받는 것은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법계로부터 어떤 과보를 언제 받을지는 우주법계가 결정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우주법계로부터 어떤 과보를 받을까가 아니라, 어떤 복을 받을까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업을 지을까, 어떤 복을 지을까,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어떤 행위를 할까, 즉 어떤 것을 이 세상으로 이 우주법계로 내보낼까 하는데 있는 것이다.
‘나는 매 순간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우주로 내보내는 것이 곧 다시 내게 들어오기로 예정된 것이니 무엇이 내게 들어올 것인지에는 신경도 쓰지 말고, 오직 우주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에만 마음을 모으라.
책 ‘시크릿’과 영화 ‘아바타’와 불교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과 시크릿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 그리고 불교의 업보, 인과응보의 법칙은 모두 같은 진리를 다르게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나를 중심으로 내가 우주로 내보내는 것이 곧 다시 내게 들어오는 것이다. 시크릿의 표현으로 하자면 우주로 내보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끌어당기는 것인 것이다.
아바타에서는 이것을 전체적인 이치로써 설명하고 있다. 즉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주는, 에이와는, 불성은, 신성은 언제나 우주로 내보낸 것을 다시 돌려받게 함으로써, 즉 우주로 내보낸 것을 끌어당기게 해 줌으로써 우주 에너지의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표현에 의하면 세상을 향해 내가 업을 지음으로써 과보를 받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인과응보, 업인과보, 업보의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 업인과보의 법칙 등은 전체적인 진리를 표현한 말이고,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은 우주로 내보내는 것 보다는 우주로부터 ‘받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며, 불교의 업사상은 우주로부터 받는 것 보다는 우주로 ‘내보내는 것’에 중점을 둔 실천적인 표현이다. 전세계 사람들이 시크릿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사람들은 나에게서 우주로 나가는 것보다 우주에서 나에게로 들어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우주를 향해 짓는 업(業)보다는 우주로부터 받을 보(報)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시크릿에서는 돈도, 인간관계도, 건강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끌어당길 수 있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설명되어지고 있다. 물론 무엇을 우주로 내보냈을 때 끌어당겨질 수 있는지도 설명되고는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점은 우주에서 내게 무엇이 들어올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우주로 내보낼 것인가에 있다. 직접적으로 우리의 의지로써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놓고 보았을 때, 나에게 중요한 것은 우주에서 무엇을 끌어당기느냐가 아니라, 우주로 무엇을 내보내느냐에 있다. 끌어당기느냐에 중점을 두면 끌어당겨질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기에 그 의도가 순수해지기 어려운 점이 있다. 보시를 할 때나, 선을 행할 때도 바라는 바 없이 하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보시를 하면 많은 돈이 끌어당겨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면 그 보시는 큰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그 보시의 행위 자체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가진 풍요를 누리고, 만족함으로써 부유함이 끌어당겨진다고 할 때라도 끌어당겨질 미래의 결과를 마음에 두고풍요를 누리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며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끌어당김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의 중점은 우주로부터 끌어당겨질 것이 아니라 우주로 내보낼 것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보다 ‘내보내는 법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우주로 내보내는 것이 곧 우주에서 내게 끌어당겨지는 것이라는 법칙에 힘을 쏟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했을 때에 비해 당황스러워 한다. 우리는 내보내기는 싫고 끌어당기는 것은 좋아한다. 끌어당긴다는 표현이 우리의 욕심을 더 충족시켜주며,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하기 쉽다. 그렇기에 ‘내보내는 법칙’에 대해 실망감이 들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우주로 내보내는 것이 곧 우주로부터 내게 끌어당겨지는 것이다. 현재 속에 미래가 있다. 우리는 다만 무엇을 우주로 내보낼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 우주로부터 무엇이 끌어당겨질 것이냐, 내게 들어올 것이냐를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투명하게, 이타적으로, 사랑으로 다만 우주로 내보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주적인, 불성과 영성에서 보내주는, 에이와의 무한한 에너지, 힘이 거기에 붙게 될 것이다. 우주로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 바로 거기에 이 모든 법칙을 내가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운행시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오늘은 또 무엇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화와 증오와 미움과 욕설과 질투와 탐심과 집착으로 얼룩진 에너지를 세상으로 내보내지는 않았는가? 그것은 곧 내가 내보낸 것이기에 곧 내가 받을 것이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아내에게 자식에게 바라지 말라
아내에게 바라는 마음을 내보내지 말라.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라고, 좋은 성격을 바라지 말라. 그저 내가 먼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어 줌으로써 좋은 남편의 모습을 내보내고,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내보내 주라. 그러면 내가 내보낸 것과 일치하는 좋은 아내, 좋은 자식이 딸려 올 것이다. 우주로 내보내는 것이 곧 내게 들어오는 것이니까.
아내가 내게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국 아내가 내조를 못 한다는 것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아내가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우주를 향해 ‘내조 못하는 아내’라는 메시지를 내보냄으로써, 결국 지금 보다 더 내조 못하는 아내를 과보로 받게 될 것이다.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란다는 것은 결국 자식의 나쁜 성적으로 인해 실망스럽다는 마음을 우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정확히 그것이 우주에서 다시 내게 들어 올 것이다. 자식의 성적이 더 나빠지기를우주법계에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세상에 만족하고 감사하라. 우주로 세상으로 만족과 감사를 내보내라.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보고 그 점을 지적함으로써 ‘부족한 아내’라는 부정적 에너지를 우주로 내보내지 말고, 그래도 잘 하는 부분을 보고 그 점에 감사해 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우주로 내보냄으로써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
정확히 바로 그 만족스러운 점, 감사한 점이 우주로 내보낸 만큼의 크기로 다시 내게 들어오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아내가 달라지겠지 하는 끌어당겨질 것을 미리 마음에 두고 행해선 안 된다. 끌어당김의 법칙이 아닌 ‘내보내는 법칙’에 마음을 쏟을 때 그 힘은 더욱 투명해지고 순수해져 우주법계의 힘이 내게 붙을 것이다.
자신의 월급에, 연봉에 불만이 있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봉에 대한 불만을 우주로 내보내지 말라. 돈에 대해 작다는 불평어린 마음을 우주로 내보내면 우주는 고스란히 적은 돈을 내게 되돌려 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월급일지라도 그 돈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감사해 하고, 풍요로워하는 마음을 우주로 내보낸다면 우주법계는 고스란히 그 돈으로 인한 풍요로움을 더 많이 만들어 내게 보내 줄 것이다.
당신이 회사 사장이라면 회사의 이익을 크게 내기 위해 사원들에게 혹은 고객들에게 적은 이익을 되돌려 주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회사가 부자가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회사가 부자가 되는 것, 회사가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그것은 정확히 우주로부터 끌어당기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부자가 될 것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비워버리라. 그리고 우주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에만 집중하라. 즉 사원들에게 회사가 번 이익을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어 주라. 또한 고객들로부터 돈을 끌어당기려는 마음을 버리고, 다만 고객들에게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하라. 고객들에게 어떤 것을 베풀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을 생각 없이 다만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고, 우주로 내보내 줄 것에 마음을 집중할 때 바로 우주법계의, 에이와의, 불성의, 신성의 한량없는 사랑과 자비의 힘이 내게 붙을 것이다.
먼저 자신에게서 시작하라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는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만족하라. 그 삶에 전적으로 감사를 표명하라.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라. 그것은 곧 자신의 삶에 무한한 만족스러운 일들과 감사할 일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전적인 사랑을 보내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감사를 느끼는 자에게 우우로부터 무엇이 흘러나오겠는가? 또한 반대로 자신을 억압하고, 미워하고, 자괴감을 느끼며,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우주에서 무엇이 보내지겠는가?
아름다운 것, 지혜로운 것, 사랑과 자비, 만족과 감사와 같은 진리의 덕목들을 우주로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진리의 덕목이 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며, 만족하고, 예뻐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그같은 진리의 덕목들이 끌어당겨질 것이 아닌가.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주로 내보낼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받을 것, 얻을 것에 집중한다 함은 곧 나 자신은 아직 무언가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부족하니 바깥에서 세상에서 우주에서 무언가를 끌어당겨 옴으로써 부족한 나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나 본래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하다. 삶은 세상은 우주는 언제나 부족함이 없이 풍요롭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미래의 그 어떤 순간 어떤 곳에도 결코 만족은 있을 수가 없다.
반대로 나 자신이 꽉 차 있어서 흘러 넘친다면 어떻겠는가?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와 풍요로움과 만족이 넘친다면 애써 외부에서 세상에서 우주에서 무언가를 끌어당길 필요가 없다. 내 안에 자가발전소가 있어서 전기를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자력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깥에서 외부에서 세상에서 우주에서 끌어당기기를 바라겠는가? 그런 사람은 바깥에서 외부에서 세상에서 우주에서 무언가를 끌어당겨 오려고 하기 보다는 내 안에서 생산한 것을 바깥으로 외부로 세상으로 우주로 나누어 주고, 내보내 주고, 베풀어 주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지금 여기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우주로 바깥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주의 한 마음이 세상으로 우주로 바깥으로 내보내짐으로 인해 그에 상응하는 힘겨워할 일들이 생길 것이다.
하루를 정리하며 매일 밤 세상으로 우주로 바깥으로 ‘내보낸 것에 대한 일기’를 적어 보라. 오늘 하루 무엇을 세상으로 우주로 바깥으로 내보냈는지를 돌아보라. 세상으로 우주로 바깥으로 물질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내보낸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 즉 마음(분별심)으로 세상으로 우주로 바깥으로 내보낸 것이 없는지도 주의 깊게 살펴보라. 행동과 말이 중요하지만 생각, 즉 마음(분별심)이 더없이 중요한 것처럼 생각, 즉 마음(분별심)으로 무엇을 세상으로 우주로 내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야말로 ‘우주로 내보내는 법칙’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
우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무언가가 내게 끌어당겨지기를 바라지 말라. 우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무엇을 얻을까, 벌까, 가질까를 생각지 말라. 오직 우주로 세상으로 무엇을 내보낼까를 생각하라.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상으로 우주로 내보냈는가? 얼마나 세상에 우주에 많은 것을 베풀고 보시하며 나누었는가? 세상으로 우주로 내가 내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밝아졌는가? 우주가 세상이 밝아졌을 때 곧장 내가 밝아지는데 성공한 것이다.
2010.01.08 글쓴이: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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