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법(不二法) -- 법상스님
'나'와 '나의 삶'은 둘이 아니다. 내가 바로 나의 삶이고, 나의 삶이 바로 나다.
대상을 보는 자만 나가 아니라 보이는 대상 또한 나인 것이다. 대상을 보는 자는 보이는 대상에 의지해 있고,
보이는 대상은 보는 자에 의지해 있는 즉 연기적(緣起的)으로 있기 때문에 그렇다.
불이법(不二法)!
사람들이 '나'와 '나의 삶'은 둘이 아니라는 진실을 망각하면서부터 사람들의 괴로움, 두려움은 시작되었다.
내가 곧 내 삶이기에, 삶이라는 무대에 등장하는 것들 중에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릴 필요가 없다.
취사간택하고 분별하여 좋아하는 것은 갖고 싶어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리려는 분별을 하는 마음 자체가,
대상과 나를 둘로 나누려는 분별심(分別心, 분별을 하는 마음)일 뿐이다.
나는 곧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이다. 주객(主客, 나와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은 둘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만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바로 나인데 받아들이긴 뭘 받아들여? 받아들이고 말고 할것이 뭐가 있나?
그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저절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하나가 하나를 경험하고, 하나가 하나에 녹아들고, 포섭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생각으로, 분별심으로 나와 세계를 둘로 나누고, 또 세계와 세계를 차별함으로써, 취사간택하는
습관이 있다보니, 바로 나와 세상을 정신적으로 분별을 하는 습관이 원인이 되어 괴로움, 두려움이라는 환상(幻想)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바깥의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싫어하거나, 싸워 이기려 하거나,
도망칠 필요가 없다. 그 세상, 그 대상, 그 경계가 그대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겉껍데기에 불과한 이 몸이 내가 아니라, 삶 전체가, 이 세상 전체가, 대상경계가 바로 나다.
습관적으로 하던 분별만 하지 말고, 그냥 그저 있어 보라. 살면서 물론 분별을 하고 살되, 그 분별을 실체화하지 않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 인연따라 분별심을 자유롭게 쓰되,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모든 것은 받아들여진다.
받아들여진다는 말 자체도 이분법적인 말이다.
대상을 받아들이는 내가 있고, 받아들여지는 대상이 있는 것은 진정한 받아들임, 불이법(不二法)이 아니다.
그저 하나가 하나를 체험하며, 그 하나로 있을 뿐이다. 분별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그대로 받아들임이다.
본래대로 있는 것, 그것을 억지로 표현해서 받아들여라, 분별하지 말라, 방하착하라, 있는 그대로 보라는 등의
다양한 방편(方便)의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하던 것, 습관적으로 하던 분별만을 하지 않으면 될 뿐.
그리하면 나인 삶 자체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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