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릉록 33. <참된 사리(舍利)는 눈으로 볼 수 없다>
배휴 배상공이 황벽 대사께 물었다. "부처의 몸은 하염없기 때문에 모든 숫자적인 개념으로는 한정할 수가 없거늘,
어찌하여 부처님 몸의 사리가 여덟섬 너말이나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까?"
"네가 이런 견해를 말한다면, 그저 '가짜 껍데기 사리'만 볼 뿐 '참된 사리'는 보질 못하느니라."
"사리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노력하여 얻은 결과물입니까?"
"사리는 본래 있는 것도 아니며 노력하여 수행의 결과로 얻으신 것도 아니니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부처님 사리는 그토록 잘 다듬어졌고 그토록 정교해서, 금빛 사리가 항상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사께서 꾸짖어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견해를 가지고서 어찌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일찍이 너는 허공(虛空)에 사리가 있는 것을 보았느냐? 모든 부처님의 마음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큰 허공과 같은데
그런 허공에서 무슨 사리를 찾는다는 것이냐?"
"지금도 분명히 눈으로 사리를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사리 이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사리 그것은 너의 망상심(妄想心)이 일어나서 사리라고 보고있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대사께는 사리가 있습니까? 있다면 청컨대 내보여 주십시오."
"참 사리는 보기 어렵느니라. 네가 다만 열 손가락으로 수미산의 높은 봉우리들를 한꺼번에 움켜쥐어 그 봉우리들을 부수어
가루로 만든다면 그때 비로소 참된 사리를 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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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오당이 이 글에 덧붙이는 한소리 *
배휴 배상공이 황벽 대사께 물었다. ["부처님의 몸은 하염없기 때문에 모든 숫자적인 개념으로는 한정할 수가 없거늘,
어찌하여 부처님 몸의 사리가 여덟섬 너말이나 된다고 말씀하니까?"]
여기서 배휴가 황벽스님께 [부처님의 몸은 하염없기 때문에......한정할 수가 없거늘]이라고 말할 때의 부처님의 몸은 색신(色身)으로서의 부처님 몸이 아니다. 즉 석가모니 부처의 몸이 부처가 아니라 마음이 부처인데 어찌 몸이니 사리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색신을 벗어버리고 나면 사리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망상심에서 하는 것이며, 사리를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것 또한 망상심(忘想心)에서 지어서 하는 말인데 어찌 그 말이 진여의 경지의 마음이겠는가.
그래서 황벽스님이 단박에 꾸짖어 말씀하신다. ["네가 이런 견해를 낸다면, 그저 가짜 껍데기 사리만 볼 뿐 참된 사리는 보질 못하느니라."] 사리는 진여의 마음을 일컬어 모양으로 비유해서 하는 말일뿐 사리는 진여법신(眞如法身)인데 어찌 형상으로 지어서 말 할 수가 있으며, 자기 견해로 말하는 사리는 [가짜 껍데기 사리만 볼 수 있을 뿐 참된 사리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견해를 지어 자기 망상심을 표현하는 것은 전부 거짖이므로 진여법신(眞如法身)을 대변하는 사리를 색으로 보았느니, 사리가 여기 있다느니 하는 말은 전부 자기 견해로 지어낸 가짜라는 것이므로 황벽스님이 이렇게 진여법신(眞如法身)을 곧바로 보라고 하신다. 그래도 진여법신(眞如法身)으로서의 사릴를 알아차리지 못한 배휴가 또 따져 묻는다. ["사리가 본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노력하여 수행으로 얻은 결과물입니까?"]라고 또 색법(色法)을 묻는다.
그러자 황벽스님은 참으로 딱하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리는 본래 있는 것도 아니며 노력하여 수행으로 얻은 결과물도 아니니라."]라고 왜 이렇게 알아차리지 못할까 그 이유는 배휴는 색법으로 묻고있고 황벽스님은 진여 당체에서 답을 하시니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배휴 배상공이 또 묻는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부처님 사리는 그토록 잘 다듬어졌고 그토록 정교로와서, 금빛 사리가 항상 있는 것입니까?"]라고 색법으로 따지고 묻는다.
이에 황벽대사께서 배휴에게 꾸짖어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견해를 가지고서 어찌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참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신다. 참선(參禪)은 모든 비교, 모든 시비, 모든, 모든 분별, 모든 판단, 모든 해석, 모든 견해와 모든 망상심을 쉬는 것인데, 어찌 일어나는 모든 비교, 모든 시비, 모든, 모든 분별, 모든 판단, 모든 해석, 모든 견해와 번뇌와 망상심을 실체가 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하여 말로 지어 말하는 것이냐 그러니 그런 자세는 참선하는 자의 기본 마음 가짐이 아니며, 여태까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저장식(貯藏識)을 바탕으로 일으나는 견해와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묻고 생각을 지어 내는 것이니 참선의 기본은 물론 조계의 법통도 모르는 소리라고 일갈 하시면서 다시 이렇게 꾸짖으신다.
[일찍이 너는 무시무종한 허공에 사리가 있는 것을 보았느냐? 모든 부처님의 마음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큰 허공과 같은데 그런 허공에서 무슨 사리를 찾는 것이냐?"]라고 견해를 내지 않는 무심의 경지 즉 부처님의 마음은 바로 무시무종의 큰 허공과 같은데 무슨 그런 허공에서 무슨 사리를 찾는 것이냐며 크게 꾸짖어 말씀하시었다.
그렇게 고구정령으로 말씀을 해고 그래도 이분법적 상대법으로 사리를 보는 배휴는 또 이렇게 묻는다. 지금 분명히 눈으로 사리를 볼 수 있는데, 눈에 보이는 사리 이것은 도대체 무슨 물건입니까?"]라며 여기 사리가 있지 않습니까 대사님은 어찌 안보이십니까 그럼 눈에 보이는 이 사리는 도대체 무슨 물건입니까 라며 끝까지 의문은 표한다.
그래서 황벽스님은 ["그것은 너의 망상심이 일어나서 사리라고 보는 것이니라."] 여기서 바로 앞에 보이는 사리도 진여가 아니다라고 하시는 스님을 향하여 배상공이 이것이 사리라고 말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황벽스님은 망상심(忘想心)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피부)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육식(六識)인데, 이 육식이 바로 감각(感覺)이며 직심(直心)이니, 진여당체(眞如當諦)가 맞다. 그런데 육식(六識)을 황벽스님은 왜 망상심(忘想心)이라고 하실까?
여기서 우리의 자각(自覺)이 선사(禪師)의 마음에서 보는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즉 선사는 일분법(一分法)이고 중생은 이분법(二分法)이다. 일분법은 둘이 아닌 법, 불이법(不二法)이니 있는 그대로 완전한 것이고, 중생법은 이분법인 상대법(相對法)이다. 그럼 상대법은 무엇인가? 보는 법 하나를 들어 말하면, 견(見)을 말하면 여기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하고, 이 사과를 보면 눈이 사과를 보느냐하면 아니다. 사과라는 형상이 눈에 비칠 뿐, 안식(眼識)은 사과인줄 알지 못한다. 그럼 제 육식이 비치는 영상을 보고 결정을 내리면 되는데, 그냥 사과다 하고 알아차리면 되는데, 육식은 직관이면서 긍정과 부정의 구분 속에서 직심으로 알아차리지 못한고, 제 칠식인 말라식에게 전달하게 되고, 사량식인 말라식은 저장식인 아뢰야식(제 팔식)에게 전달하면, 이 저장된 기억이라는 종자식(鍾子識)에게 전달되어 이것이 모든 기억 속에 이와 비슷한 모든 종자를 화현(化現)시켜, 그와 비슷한 형상을 가진 것을 유출시켜 사과 형상을 전부 말라식에게 보여주면, 그 때 말라식이 사량 분별하여, 사과다 그런데 사과 중에서도 좋다 싫다, 크다 작다, 잘생겼다 못생겼다....하면서, 육식에세 알려주어 직관인 육식이 사량 분별하여 봄으로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상대적 측면에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심은 항상 사량 분별하는 이분법으로 보기 때문에 이것을 들어 상대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참선과 수행을 하여 번뇌와 망상을 쉬게 하는 것은 바로 사량 분별적 이분법을 없애자는 것임으로 무심을 강조하고 직심을 그대로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며, 근본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황벽스님은 배휴에게 배휴는 진여사리가 아닌 망상심(妄想心)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배휴는 다시 묻고 또 묻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상께서는 사리가 있습니까? 있다면 청컨대 내보여 주십시오."] 하면서 보여 달라고 까지 하신다. 그러니 황벽스님은 아직 직심을 갖추지 못한 배휴를 향하여 ["참 사리는 보기가 어렵느니라.] 참 사리는 보기 어렵다는 것은 색법으로 이분법으로 보고 있는 배상공은 아직 보기 어렵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용맹정진하여 칠식인 말라식과 팔식인 이뢰야식까지 다 벗으나 육식인 직심만이 있을 때는 볼 수 있다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다만 열 손가락으로 수미산의 높은 봉우리들을 한꺼번에 움켜쥐어 그것들을 부수어 가루로 만든다면 그때 비로소 참된 사리를 보게 되리라."]하시면서, 그대 마음이 허공처럼 텅~비어서 모든 번뇌망상에서 벗으날 때 모든 것은 자유자재로 수미산도 무너뜨리고, 하늘도 땅도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은 모든 것은 그대 스스로 마음이라는 한 물건이 자유자재하여 무엇에도 걸림이 없다라시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임을 밝히신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사)무학 숲 명상쉼터에서 원오스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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