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사띠(sati)의 중요성

장백산-1 2021. 12. 13. 00:04

사띠(sati)의 중요성
 
사띠, 초기불교를 비롯 모든 불교수행의 핵심

붓다, “사띠 확립하는 사문 법 · 율에서 향상 · 증장 · 충만할 것”이라 설해
걷고 · 서고 · 앉고 · 누울 때 등 수행자 눈에 항상 지견 나타나 있어야
사띠의 의미 · 기능에 대한 견해 서로 달라도 수행 위한 정확한 이해 필수

 

요즘은 교학보다 수행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절실히 느낀다. 수행에 있어서 사띠(sati)의 중요성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 bhāvanā)에서 사띠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한마디로 사띠 없는 수행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만큼 사띠가 수행에서 중요하다는 뜻이다.

 

‘아난다 숫따(Ānanda-sutta, 阿難經)’(AN10:82)에서 붓다는 열 가지 불가능한 경우와 열 가지 가능한 경우에 대해 언급했다. 그 열 가지 중에 ‘사띠(sati, 念)’가 포함되어 있다. 이 경에서 붓다는 ‘사띠를 놓아버린(muṭṭhasati)’ 사문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반대로 ‘사띠를 확립하는(upaṭṭhitasati)’ 사문은 이 법과 율에서 향상하고 증장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AN Ⅴ, 152-154)

 

실제로 붓다는 걷고[行], 서고[住], 앉고[座], 눕는[臥] 네 동작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지녀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를테면 걷고 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서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앉아 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누워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아리야와사 숫따(Ariyavāsā-sutta, 聖居經)’(AN10:20)에서 붓다는 성자들의 ‘열 가지 성스러운 삶’을 언급했다. 그 중에 사띠(sati)가 들어가 있다. 이 경에서 붓다는 ‘한 가지에 의해 보호되고(ekārakkho)’라고 했다. 이것은 사띠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것이 곧 성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즉 수행자는 걷거나 멈춰있거나 잠자거나 깨어있을 때 항상 지견(智見, ñāṇa-dassana)이 눈앞에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와 ‘장로게(長老偈)’에 “나가(nāga, 那伽)는 걸어가면서도 선정에 있고, 나가는 서 있으면서도 선정에 있고, 나가는 누워서도 선정에 있고, 나가는 앉아서도 선정에 있다. 나가는 어디에서나 잘 제어하고 있다.”(AN Ⅲ, 346-347; Theragāthā 696-697)고 했다. 나가(nāga, 那伽)는 뱀이나 용, 코끼리 등을 말한다. 여기서는 붓다를 나가에 비유한 것이다. ‘위대한 영웅’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같은 내용이 ‘중아함경’ 제118 ‘용상경(龍象經)’에도 언급되어 있다. 즉 “용은 걸어갈 때도 선정을 갖추고 있고, 앉아 있을 때도 누워있을 때도 선정에 있고, 용은 일체시(一切時)에 선정에 있다. 이것이 이른바 용의 일상법이다.”(대정장 1, 608c, “龍行止具定, 坐定臥亦定, 龍一切時定, 是爲龍象法.”)

 

위빠사나 수행의 실제는 사띠(念, sati/smŗti)의 확립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띠는 초기불교는 물론 그 이후 모든 불교수행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의 사념처(四念處)를 비롯하여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로 구성되어 있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에서 사띠의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은 사띠 확립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사띠는 삼십칠조도품을 아우르는 용어로 통용되기도 하고, 초기불교의 실천수행론 전체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수행에 있어서 사띠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바로 위빠사나 수행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띠의 의미와 기능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부터 초기불교의 수행법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사띠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른바 ‘사띠(sati) 논쟁’이 그것이다. 이 논쟁은 2004년까지 계속되면서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고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이후 2009년 12월부터 2010년까지 ‘법보신문’을 통해 한동안 잠잠했던 사띠 논쟁이 재점화되었다. 9명의 전문가들이 14회에 걸쳐 기고하는 형식이었다. ‘법보신문’에서는 지면 관계로 사띠의 의미와 해석 문제로 논의를 한정시켰다. 이 논쟁의 포문을 연 사람은 인경 스님이다.

 

결과를 요약하면, 조준호는 사선정(四禪定)의 상태에서 수행자의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사띠의 역할에 무게를 두어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번역했다. 임승택은 육근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들어오려는 불선함을 막으려는 문지기 역할을 강조하여 ‘마음지킴’으로 번역했다. 각묵 스님과 김재성은 대상에 마음을 두어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전재성은 사띠 본래의 의미인 ‘기억’과 ‘현재와 관련된 주의 깊음’의 의미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새김’이라고 번역했다. 임승택과 김재성은 사띠가 수동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부정했고, 조준호는 본격적인 사띠가 네 번째 선정 이전에도 진행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인경 스님은 불교수행의 핵심기능이자 심리치료의 치유적 기제로 활용되는 사띠가 ‘마음챙김’으로 번역되는 것은 그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한 술어로 보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사띠는 어떤 판단도 없이 지켜본다는 의미로 ‘알아차림’이 적절한 역어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인경 스님의 주장에 동의한다. 이 사띠 논쟁에서 번역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수행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었다. 즉 사띠를 통해 진행되는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ssanā, 觀) 수행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확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띠는 기본적으로 ‘기억’이나 ‘주의’ 등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염(念)’으로 한역되었고, 서구에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영역되었다. 요컨대 사띠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기억’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에 나타나는 현상에 ‘마음을 두어 자세히 살피는 것’, 즉 알아차림을 의미한다. 초기경전에서 사띠는 후자의 경우로 자주 나타나며, 불교수행의 중요한 핵심 기능 가운데 하나임은 틀림없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612호 / 2021년 12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