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릉록 34. 일체처에 마음이 나지 않음
"대저 참선해서 도를 닦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다만 '마음의 작용을 잊으면 곧 부처님의 도가 융성하고, 사량분별하면 곧 마구니(사량분별심, 망상, 분별하는 생각, 번뇌 망상)의 도가 치성해진다'하는 사실만을 논할 뿐이니, 끝내는 털끝만큼한 작은 법(도)도 얻지 못하니라."
배상공이 황벽대사께 물었다. "대사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법을 전하여 부촉하셨습니까?" "사람에게 전해 줄 법은 없느니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2조(二祖) 혜가스님이 달마스님께 마음을 편안하게 해달라고 청했습니까?"
"네가 만약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2조 혜가께서는 분명히 마음을 찾아서 편안한 마음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찾으려 해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달마스님께서, '너의 마음을 이미 편하게 해주었노라'고 말씀하신 것이니라. 만일 마음을 얻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생멸법(生滅法)으로 돌아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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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오스님이 추가하는 한 마디*
황벽스님이 법좌에 오르시어 사부대중을 향하여 한 말씀을 하신다. ["대저 참선해서 도를 닦는 사람은 모름지기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라고 일괄하시고, 주장자를 들어 탁자를 한 번 크게 치신다. 그러나 아무도 말이 없었다.
참선해서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라고 하신 말의 뜻이 무엇일까. 이 말은 무생(無生)의 도리(道理)를 설하신다. 무생(無生)의 도리(道理)란 무엇일까? 시작도 없고 끝이 없고 한량이 없는 무진법계(無盡法界)엔 함도 없고 지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죽음도 없었서,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 일뿐인데, 마음이라고 지칭하는 한 물건이 빚어내는 무량수 무량광의 지음은 끝임이 없으나 끝임없이 지어내는 것들의 본바탕은 언제나 그대로 여서 변함이 없다는 말이니,
상대법으로 죽음을 들어 생이 있다하고, 생을 예를 들어 죽음이 있다고 하듯이, 생이 없으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없으면 생이 없다. 오직 그대의 한 마음이 모았다 흩었다 할 뿐. 다 감각으로 느끼고 있을 뿐 모두가 다 허상(虛相)일 뿐. 실상이 없는 도리를 무생의 도리라고 설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 무슨 말을 붙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황벽스님은 한 번 더 도를 구하느니, 진리를 구한다는 사부대중을 향하여, 마음의 지음도 허망하고 헛된 것임을 예를 들어 말씀하신다. [다만 '마음의 작용을 잊으면 곧 부처님의 도가 융성하고, 사량분별하면 곧 마구니의 도가 치성해진다'하는 것만은 논할 뿐이니, 끝내는 털끝만큼 한 작은 법도 얻지 못하니라.“]
마음의 작용을 잊으면 도가 융성하다는 것은 마음의 작용은 마음이 마음 스스로 생각을 지어내면 온 우주가 따라 나오니, 생각을 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시비하고 분별하고 비교하교 판단하고 사량해서 해석하면 그것은 상대법이요, 차별법이 치성해진다는 것만 새겨, 분별법으로는 단 한 법도 얻지 못한다고 일괄 하시면서 무생(無生)의 이치를 다시 한 번 일깨우신다.
그때 배상공이 황벽대사께 물었다. ["조사께서 어떤 사람에게 법을 전하여 부촉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법을 전하여 부촉하셨습니까라고 물으면서, 황벽스님의 법을 누구에게 전하고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다. 황벽스님이 그렇게 먼저 무생의 도리를 설해도 의문이 가시지 않아 생멸법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줄 법이 없느니라."]라고 황벽스님을 잘라 말씀하셨다. 이 말을 잘 새겨 들어야 한다. 여태 무생의 도리를 설하셨는데, 무슨 줄 법이 있겠는가. 즉 무법(無法)이 곧 법(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2조(二祖) 혜가스님이 1조 달마스님께 마음을 편안하게 해달라고 청했습니까?"]하면서 배휴가 끝까지 매달린다. 그래서 황벽스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일러 주신다. ["네가 만약 마음이 있다고 말을 한다면 2조께서는 분명히 마음을 찾아서 마음을 얻었을 것이다.] 황벽스님이 혜가스님이 초조 달마대시에게 심법(心法, 마음이라는 법)을 구한 대목을 예로 들어 말씀하신다.
달마대사께서 혜가 스님에게 불편한 그 마음을 가져와라 그러면 내가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리라고 했지만 혜가 스님은 자신의 불편한 그 마음을 찾지 못하겠다고 하시니 없는 마음이 왜 편치 못하느냐고 하시니 혜가 스님이 무심의 경지를 단박에 터득하시어 무생의 도리들 알아 차렸다는 뜻을 전하시며 [그러나 마음을 찾으려 해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달마스님께서, '너의 마음을 이미 편안하게 해주었라'고 말씀하신 것이니라.]라고 혜가 스님의 득도 의 도리를 설하신다.
무생의 도리를 터득치 못하고 계속 생멸법으로 있었다면 어찌 혜가 스님이 도를 알았겠느냐 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얻은 바가 있다고 말한면 그것은 모두 생멸법으로 돌아가고 만다."]고 하시면서 여기서는 생멸법과 상대법이라는 분별을 하는 생각을 쉬지 못한다면 무생의 도리를 어찌 알아차려 생사 경계라는 분별에서 벗어나겠느냐며 배휴에게 부디 무생을 깨닫기를 바라 이렇게 무생(無生)의 이치를 설하신 것이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사)무학 숲 명상쉼터에서 원오스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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