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대상(對相)은 실재(實在)하지 않아… 대상(對相)은 그저 심층마음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일뿐

장백산-1 2021. 12. 18. 22:18

대상(對相)은 실재(實在)하지 않아… 대상(對相)은 그저 심층마음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일뿐


감각되는 모든 것과 삼매까지도 오로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내
업력의 종자가 아뢰야식에 보존돼 있다가 인연(因緣) 만나면 현행(現行)
견성(見性)은 본래 마음을 자각(自覺)…남과 나의 마음 결코 다르지 않아

 

불자라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유식(唯識)에서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합니다. 유식무경은 오직 식이 있을 뿐이고 바깥의 경계, 즉 대상이 따로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우리 눈앞에 있는 대상(경계), 즉 물리세계(物理世界)가 엄연하게 있는데 이 물리세계(物理世界)가 어떻게 가상(假想)의 세계인가 의문을 가집니다. 눈 앞에 있는 이 물리세계(物理世界)가 가짜(가상현실)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matrix)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경험하는 세계는 입력된 정보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假想現實)입니다. 그러나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경험하는 물리세계가 실재하는 세계인 줄 알며 적응해 살아갑니다. 또 다른 영화는 2010년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입니다. 인셉션에서 드림머신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은 드림머신을 타고 누군가의 꿈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세계도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꿈입니다. 

물론 매트릭스의 가상세계 또는 인셉션의 꿈의 세계에서 살면서 가상세계 꿈의 세계 이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려면 매트릭스의 가상세계와 인셉션의 꿈의 세계를 벗어나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가상세계와 꿈의 세계 거기서 깨어나고자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상세계와 꿈의 세계 거기서 깨어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큰 깨달음이라는 의미의 ‘대각(大覺)’이라고 합니다. 수행으로서 깨달음을 얻어 가상세계, 꿈의 세계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길입니다.

 

수행 없이 의식차원에서 생각으로 엮어낸 이론체계가 희론(戱論)입니다. 유식(唯識)은 머릿속에서 생각으로 사유해 개념적(槪念的)으로 지어낸 희론이 아닙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인도에는 요가수행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유식학파(唯識學)는 바로 요가를 수행하는 요가수행자들이었습니다. 통찰력(洞察力)으로 유식(唯識)을 체험했는데 후에 이론가들, 또는 논설가들이 유식(唯識)을 이론화, 개념화, 체계화한 것이 유식사상(唯識思想)입니다.

 

‘해심밀경’의 분별유가품에서 유식(唯識)의 개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씨보살은 부처님께 삼매수행 중에 본 영상(影像)이 마음(識)과 다른지 같은지를 묻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다르지 않다. 오직(唯) 식(識/마음)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대상(對相)은 곧 식(識/마음)의 변현(變現)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자씨보살이 중생이 색(色) 등 마음의 영상을 반연(攀緣)하면 그 영상도 마음(識)과 다르지 않은지 다시 묻습니다. 부처님은 “그것 또한 오직 식(識/마음)일 뿐 다르지 않다. 다만 어리석은 범부가 전도되어서 모든 영상(影像)이 오직 식(識/마음)일 뿐인데 모든 영상이 유식(唯識)일 뿐임을 알지 못하고 전도된 견해를 일으킨다”고 답해주십니다. 결국 삼매도, 일상에서 감각하는 영상(影像)들도 우리 마음(識)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이나 지옥 물리세계도 우리 마음이 만든 영상(影像)으로 허상(虛像)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물리세계를 실재라 여기는데 이것은 마치 꿈을 실재라 여기는 것처럼 전도된 망상(妄想)입니다.

물리세계를 불교에서는 색(色)이라 합니다. ‘안’ ‘이’ ‘비’ ‘설’ ‘신’ 오근과 ‘색’ ‘성’ ‘향’ ‘미’ ‘촉’ 오경이 색에 포함됩니다. 유식에서 오근은 몸의 감각기관에 해당하고 이런 오근을 가진 몸을 유근신(有根身)이라고 합니다. 유근신이 의거해서 사는 물리세계를 기세간(器世間)이라고 합니다. 유식에서는 유근신과 기세간을 식(識)이 만든다고 합니다. 느)낌과 세상 전체 즉 일체를 식(識)이지어낸다는 뜻입니다. 그럼 어떤 식(識)이 일체를 만드는가. 일체를 만드는 식(識)은 일상적인 우리의 의식(意識)이 아니라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입니다. 

 

제1식부터 제5식은 안이비설신입니다. 제6식은 앞의 다섯 식을 종합해서 사유하고 판단하는 식(識입니다. 제6식인 식은 평소 우리들이 사용하는 의식(意識)이라는 개념(個念)입니다. 제7식은 말나식이라고 합니다. 제1식부터 제7식까지는 표층식(表層識)입니다. 그러나 제8식인 아뢰야식은 심층식(深層識)입니다. 아뢰야는 ‘함장’ 또는 ‘포함’의 뜻을 지닙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종자함장식’ ‘일체종자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종자(種子)는 무엇일까요. 불교는 업보사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선인락과 악인고과’, 업이 있으면 보가 있습니다. 종자(種子)는 바로 업(業)이 남기는 업력(業力)으로 요즘 말로 정보(情報)입니다. 

 

이 업력의 종자는 언젠가 보(報)가 될 씨앗입니다. 그러나 종자가 보존되어야 보로 피어날 수 있습니다. 아뢰야식이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보관소입니다. 업력의 종자가 아뢰야식 안에서 자라나면서 더욱 힘을 키웁니다. 그리고 아뢰야식 안에서 자라면서 힘을 키운 업력의 종자가 적절한 인연(因緣)을 만났을 때 구체화 돼 세계(世界)를 만듭니다. 즉 현행화(現行化) 되는 겁니다. 이 현행화를 종자생현행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성된 세계가 바로 유근신이 의지해서 사는 기세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에서 말한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곤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예시로 중생의 몸은 전생에 지은 업의 보로서 만들어집니다. 악업을 많이 지으면 지옥세계에 태어나고 선업을 많이 지으면 락과를 받아 천상세계에 태어납니다.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둘 다 적절히 지으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육신, 유근신은 업력의 종자가 물리세계에 드러난 겁니다

진화론에서도 이에 대한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보가 축적돼 새로운 근을 가진 종이 생겨나는 방식으로 진화가 이루어지는 거죠. 반대로 경험의 정보가 쌓이지 않으면 근(根)이 퇴화할 수도 있습니다. 어두운 동굴에서 사는 박쥐는 색(色)을 볼 일이 없어 안근(眼根)의 경험이 쌓이지 않습니다. 박쥐들의 눈은 자연스레 퇴화해서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와인의 맛을 보고 감별하는 소믈리에나, 듣고 감상하는 수준이 판소리 명창의 경지에 이른 귀명창 등은 경험(經驗)에 의해 정보(情報)가 축적되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뢰야식(제8식)의 존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우리가 깜깜한 암실(暗室)에 있을 때는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도 없으면 안 듣는다고 합니다. 대상이 없으면 식(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암실에서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음을 알려면 봐야 합니다. 소리도 있는지 없는지 알려면 일단 들어봐야 합니다. 이것을 보고 마음의 활동(活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활동이 있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보이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듣고 있다는 것 들리지 않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식되는 대상이 없어도 이미 깨어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서 활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대승기신론’에서는 마음의 본래적 각성, 본각(本覺)이라고 합니다. 심층식인 아뢰야식을 성성히 깨어있는 마음, 본각, 불성이라 이름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일심, 선에서 본래면목이라 이름하는 겁니다.

일체(一切, 세상과 그 모든 것)는 물리세계고 이 물리세계를 만드는 것이 제8식 아뢰야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물리세계를 만드는 이 심층의 마음(심층식인 아뢰야식)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나의 본성을 깨달아 볼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 심층의 마음, 즉 본성(本性)을 깨닫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말합니다. 

견성(見性)을 달성하는 방법 세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수심결’에 나오는 무심법(無心法)입니다. 무심법(無心法)은 대상을 좇아가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지눌 국사가 말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 있습니다. 일상의 의식은 대상을 좇습니다. 성적등지문은 성성(惺惺)함과 적적(寂寂)함을 함께 유지(維持)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적적(寂寂)은 무심법(無心法)처럼 대상을 치운다는 뜻입니다. 그럼 대상을 좇는 마음이 없어지고 표층식에 대상이 없으니까 잠이 듭니다. 잠이 든 상태를 혼침(昏沈)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때 마음 깨어있는 것이 성성(惺惺)입니다. 

세 번째는 간화선(看話禪)입니다. ‘이뭣고’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등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의심이 걸리면 궁금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의심을 유지하면 의정이 되고 시간이 더 지나면 오직 의심만이 몸에 남아 의단이 된다고 합니다. 굉장히 답답하겠죠. 이때 만나는 답답함의 벽이 은산철벽이고 은산철벽이 터지면 화두가 타파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저는 사유(思惟)의 틀 바깥에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수심결’에서 제자가 지눌 국사에게 “본심(本心)이 무엇인지 설명을 들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본심(本心)은 어떤 마음입니까” 물으니 지눌 국사가 “지금 묻고 있는 그 마음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닌 뭔가가 있는데 정확히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그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마음이다. 계속 모른다고 생각하면 넘어서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궁금해하는 마음, 알고자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문득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돈오입니다.

 

견성은 본래마음, 심층마음을 자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의 심층마음과 너의 심층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평안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부처라는 사실을 알 테니 말입니다.

정리=윤태훈 기자 yth92@beopbo.com

이 강의는 한자경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가 2021년 10월 19일 대한불교진흥원이 서울 마포 다보빌딩 3층 다보원에서 개최한 화요열린강좌에서 강의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606호 / 2021년 10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