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언어)라는 상에 끄달리지 말라.
내 앞에서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한 욕을 하거나, 듣기 싫은 말을 하거나, 혹은 유난희 자기 잘난척을 할 때 나는 괴롭고 화나고 답답한 마음이 올라올 것이다. 맞붙어 싸우게 될 수도 있고, 공연한 말싸움으로 에너지를 낭비하게도 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자칫 잘못하면 멀어지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왜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에 휘둘리는 것일까?
먼저 이같은 상황이 괴로운 것은 왜 그런지 살펴보자. 상대방이 내가 듣기 싫은 말을 했거나, 자기 잘난 척 하는 말을 했다. 아니,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듣기 싫은 말을 했다는 것은 전적인 내 판단에 불과하다. 자기 잘난 척 했다는 생각도 그 사람의 말에 대한 나의 판단일 뿐이다.
상대방이 나보고 뚱뚱하다거나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 말을 듣기 싫은 말로 판단했다. 그런데 뚱뚱하다거나 능력 없다는 말이 무조건 기분 나쁜 말일까? 어떤 특정한 부분에 우리는 능력이 없을 수도 있고, 또 내가 좀 뚱뚱할 수도 있다. 더욱이 그건 그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을 그저 입을 빌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말이 진짜 힘을 지니는지,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상대방의 말에 내 스스로 힘을 부여해 준 채, 그 말로 인해 상처 받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상대방의 말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말을 스스로 상처 받는 말이라고 판단하고, 기분 나쁜 말이라고 판단하면서, 상대방의 말이 진실일거라고 힘을 실어 준 결과다.
이처럼 말이란 실체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다만 그 말에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그 말을 따라가서 그 말에 온갖 다양한 해석을 붙이고, 감정을 섞으면서 기분 나빠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행위일 뿐이다. 말이라는 것을 잘 살펴보면, 사실은 소리 파동이며 하나의 울림에 다름 아니다. 어떤 특정한 소리 파동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로 세상 사람들이 합의를 하였다보니, 말이 뜻을 지니기 시작했다. 그렇더라도 그 말이라는 합의에 동의한 것은 나 자신일 뿐이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상(相)이라고 한다. 상을 타파하게 되면 그 어떤 괴로움에도 끄달리지않고 휘둘리지 않는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즉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다고 말하며,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라고 하여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알면 곧바로 여래를 본다고 했다.
상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모양을 지닌 것은 물질적, 정신적인 대상 할 것 없이 전부 다 상이다. 쉽게 말해 이것 저것으로 구별될 수 있는 모양을 지닌 것은 전부 상이다. 그래서 분별상이라고도 한다. 말도 하나의 상이다. 뚱뚱하다는 말은 날씬하다라는 말과 비교되고 분별되는 하나의 모양을 지닌 상이다. 그런데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고 했듯이 말이라는 상은 사실 본래 허망한 것이다. 뚱뚱하다는 말 자체는 기분 나쁜 말도 아니고, 좋거나 나쁜 말이 아니다. 내가 그 말에 기분 나쁜 감정을 섞고, 나쁘다는 생각을 개입시켰기 때문에 그 상은 힘을 지니는 것일 뿐이다.
그 어떤 말이라는 상에도 속지 않을 수 있다. 말의 의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본다면 곧장 여래를 본다. 깨닫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말을 자유 자재하게 써먹으며 활용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 말에 휘둘리거나 끄달리지는 않게 된다. 말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할 뿐, 말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상을 타파하면 이러한 공덕이 있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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