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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明)

장백산-1 2024. 10. 26. 19:27

무명(無明)

 

 

무명 (無明)은 ‘명(明)이 없다’는 말로, 그 의미는 각 경전마다의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진리에 대한 무지를 말하며, 『잡아함경』과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로 정의되고 있다.

 

진리에 대한 무지란 연기법에 대한 무지로써, 이 세상은 모두 연기되어진 존재이며, 연기되어진 모든 것들은 무상하고 무아이므로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인연 따라 연기적으로 만들어진 무상한 존재에 대해 실재한다고 여겨 집착하는 상태가 바로 무지요 무명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면 그것은 곧 괴로움이다. 실재하지 않음을 깨달으면 괴로움도 없다. 이것이 곧 사성제다. 사성제에 무지하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모르고,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며,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을 알지 못한다. 이처럼 12연기의 무명은 곧 연기와 사성제, 무아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며, 내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산다면 어떻게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처럼 삶에 대해, 우주에 대해, 나에 대해, 과거와 미래에 대해 모르고 살기 때문에 어리석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며, 내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무명의 타파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무명을 타파하여 명[明:밝음=지혜]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다. 무명이 소멸될 때 결국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며, 내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기 때문에 짓는 어리석은 행위인 업행(業行), 그것이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행(行)이다. 지혜로운 행위, 하되 함이 없는 행위가 무위행(無爲行)이라면, 어리석은 행위인 이 행(行)은 유위행(有爲行)이다. 하면서 스스로 한다는 유위의 행위이기에, 유위행은 유위업(有爲業)을 발생시키고, 그것은 업보(業報)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처럼 행은 모르기 때문에 짓는 업행이며, 선행도 악행도 근원에서는 모두가 유위행으로써 업을 늘리는 무지의 행이 아닐 수 없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