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십이처(5) - 나에게 이해된 세상일 뿐

장백산-1 2024. 11. 19. 15:50

 

 

십이처(5) - 나에게 이해된 세상일 뿐

 

청정한 육근을 통해  인식되는 세상은 괴로울 것이 없지만, 오염이 된 육근과  ‘나’라는 관념이 개입되게 되면 육근에 대한 의식이 육내입처로 바뀌면서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것이 고(苦)의 원인이다.

 

그러면 육근이 오염되면서 어떻게 육입처의 의식으로 왜곡되는지를 살펴보자. 앞에서 안이비설신 오근이 각자 자신의 대상을 인식한 것을 가지고 의근(마음)은 종합하여 사람, 동물, 과일, 산과 들 등 삼라만상으로 인식하며, 나아가 행복, 질투, 고요, 기쁨 등의 정신적인 것들 또한 인식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근의 활동을 살펴보면, 의근은 외부에 있는 것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대상들을 오근의 도움을 받아 자기 식대로 인식한다. 왜 그럴까?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는 존재를 ‘나’라고 착각함으로써 ‘내가 있다’는 아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즉, 의근에 아상이 개입되어 의입처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것을 보았더라도 사람들 저마다 각자 그 장소에서 인식한 것이 다르고, 느낌도 다를 수밖에 없다. 외부의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한 것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조합되고 종합된 ‘의입처가 만들어 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인연따라 만들어진 나[육내입처]와 세계[육외입처]가 곧 십이처이고, 십이처(十二處)가 곧 일체 모든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이 곧 전부다. 나에게 감각되고 인식된 것만이 세상 모든 것, 즉 일체(一切)다.

 

만약에 내 바깥에 고정된 실체로써의 세상이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보는 것이라면, 누가 보든 보이는 세계는 같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시광선만을 볼 수 있는 인간의 안근으로 보는 세상과 자외선까지 볼 수 있는 물고기나 꿀벌이 보는 세상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물고기들은 자외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눈에는 똑같이 생긴 물고기지만 물고기들은 물고기마다의 자외선의 얼룩무늬로 서로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뱀은 눈 아래 있는 골레이세포(golay cell)라는 특수한 신경 세포를 통해 적외선을 감지한다고 하니, 적외선을 감지하는 뱀이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같을 수가 없다.

 

만약에 세상이 정해진 하나의 모습으로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면, 이렇게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육입처라는 제한되고 한정된, 허망한 의식을 통해서만 육외입처라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보는 자에 따라서 어떻게도 보일 수 있는 무한 가능성의 장이다.

 

그래서 육입처라는 허망한 착각의 의식이 소멸되게 되어 육근이 청정해진다면, 부처님이 세상을 보는 것처럼 육안(肉眼)만이 아닌 천안(天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을 모두 구족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눈, 불안은 안입처라는 허망한 분별에 갇힌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란 다시 말하면, 무아(無我)이며 공(空)한 비실체성이라는 세계의 본질이다. 바다 위에 무수히 많은 파도가 치듯, 텅 빈 무아, 공의 바탕 위에 삼라만상이라는 파도가 인연 따라 치고 있다. 파도가 겉으로 보기에는 무수한 파도이지만 결국 하나의 바다이듯, 분별없이, 육근의 오염 없이 바라보면 이 세상도 결국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분별된 세계, 무수히 많이 나뉘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본 바탕은 바다와 같은 대열반 적멸의 고요함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깨닫지 못한 우리가 보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다. 세상에 대해 알았다고 말하는 순간, 사실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안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해된 세상, 나에게 파악되어진 제한된 세상을 안 것에 불과하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