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강 한반도대운하의 대재앙

이은하의 대운하 노래, 새로운 국면의 신호탄인가?( 펌)

장백산-1 2008. 3. 12. 12:30
이은하 대운하, 새로운 국면의 신호탄인가
번호 61934  글쓴이 풍경생태 (scapecology)  조회 1191  누리 537 (537/0)  등록일 2008-3-12 07:04 대문 22 추천 [대운하] 

 

이명박 대통령의 대표공약으로 뽑혔던 대운하는 한때 반대의 여론을 누르고 찬성의 여론이 더 높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검증이 시작되자 그 논리의 빈약성으로 연일 얻어맞고 현재 반대의 여론이 50%를 넘어섰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이제 조금만 밀어붙이면 백지화 될 것 같은 생각도 할 수 있지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호의적인 여론이라는 것은 바람과 같아서 언제든지 쉽게 요동칠 수 있다. 게다가 대운하가 정치와 연결되어 있어서 바람을 일으키는 책략가들은 꿍꿍이의 계책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당장의 총선에서는 불리한 형국이라 이한구를 비롯한 한나라당의 정서는 총선공약에서 대운하를 내세우지 않기로 결정한 듯하다. 문국현은 이재오와 정면승부를 내세웠고 유시민은 대운하반대를 뚜렷하게 표명했지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상대방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면 쉽지 않다.


대운하는 계속 새로운 논리를 찾아 이동했다. 마치 죄인이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새로운 거짓말을 만드는 것처럼 물류, 관광, 친환경, 내수 진작을 지나 창조적인 프로젝트라는 단어까지 동원하더니 급기야 대중문화로 파고들 기세다.


40대 이상이 주로 기억하고 있을 가수와 랩을 이용한 대운하 찬가가 만들어졌다. 네티즌 사이에 찬반양론이 거세지만 문화부 장관이 연예인인 지금 국민의 교육을 위하여 이런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산과 같은 드라마나 유명 프로그램에서 운하를 연상할 수 있거나 직접 다루는 내용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 가수가 자기 소신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비난만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시도가 이어진다면 그 논란의 강도는 점점 줄어들고 인정되는 분위기가 될 수도 있다.


종교계는 봉암사 법회를 기점으로 불교는 정면으로 반대가 시작되었고 천주교나 원불교도 상당부분은 반대하는 분위기로 가겠지만 개신교는 현재 유보적이고 찬성하는 목사들이 더 많아 보여 지켜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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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는 61년만에 산문을 열고 대운하반대를 선포했다.



 

학계는 서울대 교수를 비롯하여 다른 대학교로 확산되어가는 분위기라서 찬성하는 교수들은 기를 펴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는 잘못 부추긴 추부길의 영향이 커 보인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했던가.


다시 돌아가 문화계인데 대운하를 반대하는 문인들의 모임이 있다고 하지만 그 반향은 아직 커 보이지 않다. 방송과 언론이 지배적인 영향을 주는 구조에서 문인들이 아무리 활동을 하더라도 방송에서 이은하의 대운하 찬가가 한번 흘러나오면 이의 영향력이 현실적으로 더 클 수밖에 없다.

   

운하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구조로 가려면 홈그라운드를 만들어 반대하는 사람들을 그리 끌어오려는 방법을 쓸 것이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판을 버리고 문화계에서 이슈를 만들어 이미지 메이킹을 하려는 시도를 할 가망성이 많다. 마치 민자사업으로 돌리듯이...


추부길은 운하 전도사로서 운하전문가가 아니라 광고 전문가이다. 돈과 힘을 가진 세력은 홍보가 최고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가 홍보 관련 비서관으로 발탁된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운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지금 생각을 정리해 볼 시기가 되었다. 찬성하는 사람들이 논리를 만들어내면 그에 대하여 반대하는 논리를 만들어 부수는 전략이었다. 이는 나름대로의 효과가 있어서 찬성하는 쪽의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은하가 찬가를 부르니 반대할 깜이 되는지 판단하기가 참 뭐하다. ‘멀리 기적이 우네’라는 노래로 손가락을 하늘로 찔러서 유명해지고 게다가 ‘무슨 꽃뱀’이라는 흥행에 실패한 에로물에 출연하여 특별한 사상이 없어 보이는 연예인을 비판할 거리가 애매하다.


이제는 운하의 논리를 �아가서 반대하는 것도 해야겠지만 그 보다 우선 취할 것은 강 자체의 논리로 가야한다. 강의 중요성, 강의 정서, 그리고 강이 다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것을 보유하고 있다는 가치를 찾아내야 한다. 강이 어떤 보물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강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이 도보 순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선각자들의 소리도 들어야 하지만 강이 우리에게 하는 소리를 직접 듣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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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은 나를 따르라고 깃발을 들었다.



강이 우는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우리를 평안하게 감싸주는 강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화내는 격동의 강을 본 적이 있는가? 시인들이 노래하고 소설가들이 주제로 삼았던 강의 모습을 얼마나 가슴에 담고 있는가? 강이 안고 있는 생태계의 신비를 보았는가?


이제 변덕을 부리고 있는 이은하의 운하가 아닌 강 자체로 우리의 눈을 돌릴 때가 서서히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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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곡이 흘러 도도한 강물이 되듯이 운하 반대의 흐름도 거대한 강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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