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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탄핵에서 기각까지의 숨겨진 이야기

장백산-1 2008. 8. 28. 22:22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서 기각까지의 숨겨진 이야기
번호 159218 글쓴이 하늘 조회 8309 등록일 2008-8-26 19:59 누리2411 톡톡5


탄핵에서 기각까지의 숨겨진 이야기
('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 / 이진 / 2008-8-27) 


역사상 가장 불법적인 선거운동

3월 12일 오전 9시, 노 대통령을 실을 헬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경호기들이 간격을 두고 따라왔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경복궁의 공간미는 현대적 빌딩들의 건축미를 압도했다. 기득권층의 특권을 견제하고 도덕정치의 회복을 꿈꾸던 정도전과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세운 조선 왕조 500년사를 간직한 곳이었다. 노 대통령은 경복궁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끄러미 그곳을 내려다보았다.

 

  

오전 10시 30분, 경남 창원시 외동 산업단지 공단 동남아지역본부에서 경남지역 보고회의를 주재한 노 대통령은 역시 창원시에 소재한 주식회사 로템을 방문했다. 노 대통령은 그곳에서 고속철도 차량 생산라인을 돌아보고 사원들과 오찬을 함께 한 뒤 진해로 내려가 해군 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수행비서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빗발쳤다.

 

 

오전 11시 50분, 노 대통령이 고속철도 차량 생산라인을 돌아보는 사이 탄핵소추 가결 소식이 수행원들의 귀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국회가 난장판이 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청와대에서는 전 직원들이 TV 앞에 모여 국회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장에서 구내식당까지 걸어가면서 공장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려던 행사가 취소되었다. 노 대통령이 차량에 올라탔다. 수행비서가 보고를 했다.

 

"193대 2로 가결이 되었다고 합니다"

 

"응"

노 대통령은 짧게 반응했다.

"해서 참석 일정은 그대로 진행하게, 괜찮네!"

대통령 직무정지 효력은 국회에서 보낸 통지서를 총무비서관이 수령한 직후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12시 5분, 대변인의 짧은 보고를 받은 뒤 노 대통령이 식당에 들어오자 사원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일터를 방문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노 대통령이 환하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감동 받은 것은요"

노 대통령이 잠시 말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이 박수를 길게, 세게 쳐준 것입니다. 가슴이 찡하네요. 여러분들이 제 사정을 아시고 각별히 저를 격려하시느라 박수를 길게 치신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은 뒤 대화를 할 텐데 대화는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여러분의 자랑과 소망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무정지가 되거든요. 그래도 오늘 저녁까지는 괜찮을 겁니다"

사원들이 다시 한번 장내가 떠나갈 듯 크게 박수를 쳤다.

 

노 대통령은 로템사를 떠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로템은 평생 잊지 않겠구먼"

 

노 대통령이 로템에 있던 시각, 경남지역 주요 여성단체장과의 오찬에 참석했던 권 여사는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 당시 권 여사를 수행했던 경호원은 "여사님이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갈 때 몸이 몹시 떨리는 모습을 보았다. 여사님이 감정적으로 그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고 전했다. 권 여사는 준비해간 원고를 읽지 않았다.

 

 대신에 "민심이 천심이고 민심이 선택한 사람이 노 대통령이었다"면서 "임기 5년 동안 정책을 맘껏 펼 수 있도록 받춰줘야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즉석연설로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오찬 후 노 대통령은 오후 2시로 예정된 해군 사관학교 졸업식 및 임관식 참석을 위해 진해로 이동했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휴게실로 들어간 노 대통령은 등줄기가 젖은 셔츠를 갈아입었다. 3월 답지 않은 이른 더위 탓만은 아닌듯했다. 노 대통령은 그곳에서 몇 통화의 전화를 받았다. 고건 총리는 대통령이 청와대로 돌아오시는 대로 국무위원들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보고했다. 국무위원들을 만나도 되는가 논의했다. 국무회의가 아니라 '간담회'라고 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례 행사를 수행했던 박봉흠 정책실장은 노 대통령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옆방에서 담배를 연이어 태워 보냈다.

 

수행 참모들 모두 노 대통령 앞에서는 탄핵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탈해하는 표정은 아무도 숨기지 못했다. 해군 사관학교 졸업생들은 노 대통령과 악수를 하며 '충성'을 외쳤다. 노 대통령은 "내가 (여기오는 게)마지막일지도 모르겠는데, 내년에 다시 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을 실은 차량이 이동하는 동안 도열하는 졸업생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청와대로 돌아오는 길에 노 대통령은 대변인을 불러 말했다.

"보고를 받은 뒤 나의 첫 일성은 이것이 변화의 진통이라고 해주게. 고통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국민도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고 나 또한 고통스럽다. 그러나 헛되이 하지 않겠다. 정치적 판단과 법의 판단은 다른 것이다,

 

 역사상 가장 불법적인 선거운동이 '탄핵의결'이다 그렇게 해주게"

 

오후 4시 50분, 헬기와 청와대 대정원에 내릴 무렵 본관 앞에 모여선 비서진 100여 명의 모습이 보였다. 헬기에서 내려서자 김우익 실장이 다가왔다.

"저희들이 기를 모아드리려고 이렇게 모였습니다."

 

눈물이 핑 돌자 노 대통령은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다들 왜 이렇게 나와 있어요? 어디 내가 죽나?"

비서진 사이에서 "힘내십시오!"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노 대통령은 기세 좋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사는 게 이렇게 기록이 많아요. 여러 번 해본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세종실로 들어가니 국무위원들이 박수를 치며 노 대통령을 맞이했다.

"저는 탄핵 결의야말로 총선용 정치이지만 자충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앞으로 법적 판단이 남아있고, 국민의 판단도 남아있습니다. 저는 이 두 번의 판단에 기대를 걸고 그 결과를 겸허히 기다리겠습니다."

별다른 이야기 없이 10여 분만에 국무위원들과의 간담회는 끝이 났다.

 

오후 5시 15분, 총무 비서관 정상문이 국회로부터 탄핵소추 결의 통지서를 접수했다.

노 대통령의 젊은 시절 막역한 친구였던 정 비서관의 비통함은 남달랐다. "허, 참 나…" 정 비서관은 하늘로 고개를 추켜올려 눈물을 되 삼켰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의 공식업무도 정지되었다. 청와대 브리핑 소식지도 중단되었다. 국무위원들과 간담회 내용은 청와대 대변인이 아닌 정순륜 국정홍보처장이 기자들에게 브리핑했다. 노 대통령은 웃으며 본관을 나섰다. 그 후로 탄핵이 기각될 때까지 집무실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관저에 들어서며 노 대통령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밀가루를 뒤집어쓴 기분이로군"

관저 직원들은 돌아서서 쏟아지는 눈물을 닦았다. 권 여사와 건호, 정연 내외가 내실에서 노 대통령을 맞았다. 노 대통령은 며느리의 품에 안겨 있는 갓난 손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잡으며 방긋 웃어주었다.


촛불 시위

대통령의 모든 공식일정이 사라졌다. 노 대통령은 숙면을 취했다. 이호철이 잠시 관저에 들렀지만 보고는 짧았다. 주말을 지내고 난 노 대통령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서재엔 참모들이 보내온 책들이 수북이 쌓였다. 주로 역사서였다. 봄처럼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참모들은 처음에 고건 체제가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궤도를 벗어날까, 노심초사했다. 고 총리는 노동문제, 공안사건, 한총련, 송두율, 집회-시위, 한-미 관계에 관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노 대통령과 똑같은 경향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노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고건의 대통령 대행체제를 철저히 보좌해주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여러분이 국무총리실을 제대로 보좌해주지 않고, 총리가 탄핵기간 중에 내린 결정들이 하자가 생기면 그것은 나중에 결국 내 책임으로 돌아옵니다. 이런저런 걱정들 마시고, 최선을 다해 도와주십시오."

 

고 총리는 처신에 신중했다.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고 해도 청와대 공간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딱 한 번 3월 25일에 있었던 주한 외교관 신임장 제정식을 청와대 영빈관에서 치렀을 뿐이다.

1년 동안 실험해온 '노 대통령의 책임 총리제'가 힘을 발휘했다. 사람들은 대통령 없이도 시스템이 굴러가고 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8월에 "총리중심 국정운영체계가 2004년 초부터 가동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었다.

 

우연한 일치라 하기엔 너무나 놀랍게도 시간적으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국민들은 새로운 경험을 했다. 언론은 고건 총리가 중심이 된 국정운영시스템에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아내와 함께 티베트 여행 중이던 문재인은 곧바로 귀국해 대통령 변호인단을 꾸렸다. 김우식 비서실장이 간간이 관저로 올라와 청와대 업무보고를 했다. 비서실은 공식적 업무를 중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매일이 전쟁이었다"고 할 만큼 긴장감에 젖어 있었다. 정무 홍보 민정수석실은 탄핵절차와 헌법재판소의 재판 판례에 관한 분석을 해나갔다. 또 헌재 판결 여부에 따른 국정운영 방향에 대한 논의가 수시로 진행되었다. 첫 며칠 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던 비서실 직원들도 점차 자기 업무를 찾았다. 미뤄두었던 업무관리카드를 채워나갔다.

 

노 대통령은 관저에서 책과 자연에 파묻혔다. 막 꽃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한 정원과 경내를 산책했다. 밤이면 관저 뒤뜰 언덕에 올라가 광화문 쪽을 바라보았다. 촛불의 끝자락이 희미했다.

 

 

 

 

"TV만 보고 있으려니 답답해요. 촛불시위 한다는데 혹시 보이나 싶어서 뒤뜰에 올라가 봤는데 잘 안 보이네요"

노 대통령은 관저를 찾아오는 참모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난 촛불시위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숨이 팍팍 나옵니다. 야, 저 사람들이 나중에 용산기지 이전 반대 시위를 할 사람들인데 저걸 어떻게 말리나?"

 

용산기지 이전 협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라 노 대통령은 시위대들을 염려하는 듯이 보였지만, 표정 속에 절반의 걱정 못지않은 절반의 고마움이 섞여 있었다. 탄핵을 반대하는 촛불시위대의 질서정연함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매일 밤 광화문에 모인 그들은 스스로 길을 내고 스스로 자리를 정돈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가족들과 함께 거리로 나와 축제처럼 노래 부르며 탄핵을 반대했다.

 

TV에선 탄핵을 제지하려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모습이 수없이 반복 보도되었다. "국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김근태 의원의 절규를 볼 때마다 노 대통령은 코끝이 찡해져 왔다.

탄핵사태 이후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에 변화가 왔다. 지지율이 3월 9일에 27%에서 12일에 32.4% 그리고 17일에 46%로 수직 상승 중이었다.

 

정치는 상대적 선과 악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적을 형상화하지 않으려 했다. 초심을 복개했다.

'너가 싸울 상대는 무형의 것이다. 그것은 제도이다. 변화를 필요로 하는 구문화와 관습이 내 싸움의 상대이다.'

제도와의 싸움은 이제 겨우 1년의 토대를 닦았을 뿐이었다. 정치개혁 하겠다고 시작했던 불법 정치자금 수사는 이제 절정에 달했다. 노 대통령은 생각했다.

'이 고비를 넘길 수만 있다면 나는 남은 임기를 혁신에 쏟아부을 것이다.'

 

의료진의 관저 출입이 잦아졌다. 몇 가지 헬스기구가 들여졌다.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을 했다. 허리둘레 지방이 점차 빠져나가고 근육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참모들과 오찬을 하던 도중, 노 대통령은 혼잣말을 하듯이 은근히 근육 자랑을 했다.

"참 이상해,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가? 배에 자꾸 근육이 생기네!"

청와대 바깥에서는 총선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승자의 절제

탄핵은 노 대통령에게 사색의 시간을 주었다. 어쩌면 임기 후 1년간 쉼 없이 달려온 날들에 대한 휴가 같은 것이기도 하다고 여겼다. 노 대통령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탄핵에 대해 마음을 비웠다 하면 무책임하다 할것이고 , 사명감을 가지고 책임을 다하겠다 하면 욕심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내 딜레마이다. 나는 지금 사명감과 무념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사람들은 내게 큰불행이 닥친 것처럼 나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마음을 정리하는 데에 굉장히 방해가 된다. 그들의 위로는 내 생각의 자유를 구속한다. 나에겐 혼자 생각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노 대통령은 미뤄 두었던 숙제를 하듯이 그간 일어났던 사회 현상 하나하나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 나갔다. 간간이 관저로 손님들이 찾아왔다. 이병완 수석의 추천으로 도올 김용옥이 찾아왔다. 노 대통령은 함께 산책을 하며 조선조 역사를 논했다. 조광조 개혁정치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관한 이야기가 화두가 되었다.

 

수석 보좌관들과는 유럽혁명사를 이야기했다. 나폴레옹에서 로베스 피에르, 비스마르크와 벨헬름 1세까지 참석자들 사이에 유쾌한 토론이 벌어졌다. 노 대통령은 드골의 리더십에 흥미를 느꼈다. 드골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 독서와 사유, 토론이 허기진 시간들을 채워주었다.

 

노 대통령은 유머를 잃지 않았다.

정윤철 감사원장이 찾아오자 "감사원장께서 대통령 감사를 잘했으면 위법을 안 할 건데, 감사를 소홀히 하셔가지고…"라며 전윤철을 반겼다. 위로 겸 경제 현안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찾아왔던 전윤철 원장은 노 대통령의 연이은 농담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전 배가 고프면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밥부터 먹고 합시다."

 

유인태 수석이 청와대를 나간 후 정무 업무를 겸하게 된 이병완 수석은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입당문제를 들고왔다. 입당을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노 대통령은 짐짓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입당하지 않으면 열린우리당이 탄핵을 반대하는 데에 정체성 위기가 생기나요?"

노 대통령은 당장에 입당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겼다.

"유불리를 가지고 입당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책임정치의 원칙입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가끔 찾아와 당과 총선 분위기를 전했다. 정동영 의장은 영등포 청과시장 내에 있는 건물로 옮기게 된 사연을 흥미롭게 설명했다.

"쓸만한 곳을 찾았다고 하기에 밤 10시에 랜턴 들고 가봤는데 완전히 폐허에다 노숙자들이 자고 있고 그랬습니다. 남녀 화장실이 있는데 일어서면 여자 화장실이 다 보여서 질겁해가지고 다 고쳐놓고 하니까 천지개벽 한 것처럼 바뀌었더라고요."

 

열린우리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이 계속 오르더니 78%에 달할 만큼 폭발적이었다. 절반 의석을 넘어 3분의 2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또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도 47%로 상승 중이었다. 노 대통령은 정동영 의장에게 후보들의 절제와 겸손을 당부했다.

 

'비스마르크가 휼륭했던 것은 빌헬름 1세의 정복욕구와 달리 필요한 만큼만 정복하는 정복의 절제를 행했다는것이다. 그러나 빌헬름 1세는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대 독일 황제로 즉위하고, 알사스 로랜을 빼았았다. 절제하지 않는 정복욕은 그를 패망케 했다. 1차 대전에서 프랑스는 독일을 이겼다'

그러나 4월 1일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국민일보가 정동영의 이른바 노인 폄하 발언을 들고 나온 것이다. 분노한 노풍이 몰아쳤다. 정 의장이 몇 번이고 엎드려 사과를 했지만 불길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열린우리당 후보들이 당과 심지어 청와대에까지 전화를 해 정 의장을 원망했다.


'거버넌스'의 시대

4월 15일 총선일 새벽, 노 대통령은 평소와 다름없이 명상을 시작했지만 생각이 이내 흐트러졌다. 대통령 선거 때보다 더한 떨림이 손끝을 흔들었다. 끈적거리는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진지 오래라 여겼는데 아니였다.

명상의 끝에 간절한 기도가 따라붙었다. 국가의 부패와 븐열에 대한 증오심이 요동쳤다.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싶었다. 단 몇석이라도 더 얻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아무리 극복했다 해도 개인적 욕심은 지워지는데 사회적 의미를 갖는 포부는 비워지지 않았다. 스트레칭을 하면서도, 면도를 하면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노 대통령은 기도했다. 그러다 문득 허허로운 웃음이 났다 "내가 지금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건가"고 자문했다.

 

 청년시절, 신의 정체를 논리로 증명해 보겠다고 철학서와 종교서적을 미친듯이 읽었지만 깨달음을 얻진 못했다. 깨달음은 자연에서 왔다. 군 제대 후 장유암에서 공부하던 때였다. 화단에 산 나리가 가득했다. 숲과 꽃의 배경에 흠뻑 취했다. 어느 날 울긋불긋 나비들이 모여들었다. 나비의 날개를 보았다. 꽃은 뿌리가있는데 나비의 날개엔 뿌리가 없잖은가? 꽃잎위에 앉아 날개를 접었다 펴는 나비를 한 나절이나 들여다 보았다.

"날개의 정교함이라니..."

하나님이 만든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질문이꼬리를 이었다.하나님은 왜 나비를 만들었을까? 신에 대한 확신이 다시 흐트러졌다. 노 대통령은 그후 지금껏 신 앞에서 방황했다.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가르침을 주었다.

생노병사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는 부처가 말해주었다.

하나님은 우주 생성의 비밀과 사후 세계를 계시했다.

연기(수수한 원인에 의해 결과가 생기는 원리)의 법칙을 부처는 존재한다 하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들었다 했다.

인간의 사고는 끝이 없지만, 논리에는 한계가 있다.

영혼의 세계는 초월적이므로 이성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노라'

노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와 삶의 토대는 공자에게, 존재와 해탈의 문제는 부처에게, 존재 이전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배웠다. 순종하며 사는것으로 타협했다고 여겼다.

새벽내내 마음을 완전히 비우지 못한 자아와 인간의 존재 근거에 대한 상념에 휩싸였다.

 

4월 15일 오찬은 정동영 의장, 이화여대 조기숙 교수와 함께했다. 3일 전 선대위원장을 사퇴하며 단식에 들어간 정동영에겐 짧은 미음이 나왔다. 노 대통령은 조기숙 교수가 오기 전 그에게 탄핵 기간 내내 고심하며 연구했던 '거버넌스의 시대'를 화두로 던졌다.

"지금 민주주의 발전단계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아니라 거버넌스의 시대입니다.

개방, 수평, 참여, 분권의 시대입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세계는 이것을 먼저 하는 국가가 선진국가입니다"

노 대통령은 정치 아젠다가 보수와 진보가 아닌, 거버넌스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것은 연합정부에 대한 노 대통령의 구상과도 연관이 있는 말이었다. 가까운 미래에 정치세력 간의 차별성을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거버넌스 시대를 함께 하느냐, 역행하려 하느냐에 따라 나뉜다는 것이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에 뚜렷한 차별점이 없어질 경우에 대비한 것이었다. 언론과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 오로지 진보와 보수의 대결 구도로만 아젠다가 정착되어 있던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 원칙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당의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정동영 의장은 묵묵히 노 대통령의 말을 경청했다. 30분쯤 늦게 도착한 조기숙 교수가 밝은 색 정장 투피스를 입고 오찬장에 들어섰다 "조 교수의 옷을 딱 보니까 되는 칼라예요" 노 대통령은 반겨 맞이했다. 한국의 정당사, 유럽식, 미국의 의회, 선거구제동에 관한 담소가 오갔다. 총선에서 관심은 이제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열린우리당이 몇 석을 차지할 것이냐였다.


건곤일척의 승부

노 대통령은 4월 15일 저녁식사에 수석보좌관들을 초대했다. 식사 후 총선 개표 방송을 함께 보자고 했다. 저녁 6시 참모들이 관저로 올라왔다. 오랜만에 농담과 웃음이 끊이지 않는 식사시간이었다. KBS, MBC, SBS 방송 세 군데를 모두 볼 수 있도록 관저 접견실에 대형 스크린 TV 석 대가 준비되었다. 대통령 내외가 한가운데 앉고 양쪽 주변으로 참모들이 편한 자세를 취한 체 TV를 시청했다.

 

<9시 뉴스> 헤드라인부터 총선 열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이 부산에서 35%, 대구에서도 35% 정도의 지지율을 확보하는듯했다. 이강철 후보가 화면에 보이자 노 대통령이 웃으며 말했다.

"대구에서 35% 받으면 영웅인 겁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한 뉴스 앵커가 "노 대통령의 반응이 궁금합니다."라는 코멘트를 하자 노 대통령이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한명숙의 선전에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문희상을 헹가래치는 장면이 나오자 노 대통령이 "으휴 저 무거운 사람을 들어도 되나?"고 소리치기도 했다.

 

 

광고 방송 중에 빨간 드레스를 입은 이효리의 현란한 춤이 나왔다.

"저 사람은 누군가요?"

전 국민이 다 아는 톱가수를 대통령만 몰랐다. 왁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밤 10시를 넘어서면서 150석 이상이 확보되었다. 노 대통령은 할 말이 있다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나는 총선 결과를 재신임으로 받아들입니다.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넘기면 그대로 가고, 못 넘기면 원내 연합세력에 실질적 정권을 넘기는 것이 제 복안이었습니다."

참모들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노 대통령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먹질을 하건 뭐를 하건 국민들이 볼 때 가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권력투쟁이 국민을 불안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측 가능한 정치, 국민이 덜 피곤하고 결론이 나는 정치를 해야 합니다. 여소야대 정부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탄핵 사태가 나온 겁니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하려고 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병완 수석이 재신임 국면을 정리했다.

"국민이 '탄핵' 심판을 내린 것입니다. 이제 누가 재신임 이야기를 하면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소리 듣게 됩니다."

웃음이 나왔고 긴장이 풀어졌다. 노 대통령 얼굴에서도 안도감이 나왔다.

 

"지난 1년 동안 힘들었던 일 생각하면 엉엉 울고 싶습니다. 그래도 우는 것보단 웃는 게 낫지요, 어느 정도 누구의 승리라기보다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의미 있는 선거였습니다."

4.15 총선의 중요함은 당선된 여당의 숫자에 있지 않았다. 지역구도에 어떤 변화가 오느냐가 중요했다. 노 대통령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지역구도 극복에 실패한 것을 그대로 가슴에 묻었다. 영남에서 30%대의 지지율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노 대통령은 씨앗에서 싹이 트는 것 같은 희망을 느꼈다.

총선일 밤, 노 대통령은 자리를 마무리 하고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경상도에서의 30%입니다. 우리를 믿고 지지해준 그 사람들의 표가 사표가 되지 않다록 해봅시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했다. 외신들은 탄핵안의 기각결정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노 대통령의 국정 2기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총리에 이해찬이 기용되었다. 노 대통령은 그에게 거의 모든 행정권한을 이임했다.

"나는 시스템 매니아예요. 정부 혁신이 재미가 있습니다. 할 일이 참 많은데 생색은 전혀 나지 않는 것이 정부 혁신이에요. 그래도 내가 대통령으로서 정말 해보고 싶습니다."

청와대 뒤뜰엔 사라졌던 다람쥐들이 어느새 뛰어놀고 있었다.


- 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 中 -

 

ⓒ 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