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는 흑인 대통령이 아니라 지식인 대통령
(서프라이즈 / 개곰 / 2008-11-09)
오바마는 시카고대학에서 헌법학을 가르치던 시절 도발적인 질문을 학생들에게 잘 던지기로 유명한 교수였다. 가령 이런 질문이었다. "흑백분리정책이 없어지니까 정말로 살기가 좋아졌는가?" "흑인이 정말로 백인보다 운동을 잘하는가?" 그의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얼렁뚱땅 넘어가는 법이 없고 끝까지 생각해서 어떤 논거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게 만드는 오바마 교수의 강의 방식에 혀를 내둘렀다.
미국에 20년째 사는 영국 작가 조나단 라반은 오바마가 이번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감격스러운 것은 단순히 그가 흑인이라서가 아니라고 가디언지에 기고한 글에서 토로했다. 가슴을 졸이며 개표 방송을 지켜보다가 오바마 당선이 확정된 순간 하느님도 안 믿는 지인들과 함께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칠순이 내일모레인 라반이 눈물을 철철 흘린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 송곳 같은 판단력을 가진 지식인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격스러워서였다.
오바마가 지식인이라는 것은 그가 즐겨 읽은 책에서도 드러난다. 제퍼슨, 링컨, 간디, 아담 스미스,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의 책이야 오바마가 아니더라도 영향을 받은 정치인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오바마의 남다른 점은 신학서나 철학서도 많이 읽었다는 데 있다. 오바마는 라인홀드 니버, 폴 틸리히 같은 사회비판 의식이 강한 신학자의 책은 물론이거니와 철저하게 종교를 비판한 니체의 책까지도 자신에게 많은 자극을 준 책으로 꼽았다. 어떤 문제의 근본까지 파고들어 생각하는 버릇이 오바마에게 있다는 것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신학과 철학에 그가 심취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신문도 잘 안 읽고 저녁 아홉 시면 잠자리에 드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부시와 너무나 대비된다.
부시가 집권한 8년 동안 미국이 자기파멸의 길을 걸었던 것은 단순히 네오콘이 무지몽매한 부시를 둘러쌌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네오콘이라도 일급 학자라면 달라지는 현실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궤도 수정을 했을 텐데 부시가 매달린 월포비츠 같은 네오콘은 그런 지적 능력이 없고 그저 학창 시절에 매파 스승으로부터 주입받은 단순 논리에 현실을 두드려 맞추기에 급급한 이류, 삼류의 지성밖에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고 이념에서 출발하는 연역론자들이었다.
반면 오바마는 경험과 사실을 중시하는 귀납론자다.
귀납론자의 특징은 현실과 이론이 들어맞지 않으면 이론을 뜯어고친다는 것이다. 반면 연역론자는 현실이 아무리 다르게 굴러가도 낡은 이론만을 고집한다. 한국의 먹물들 중에는 이런 종자들이 득시글거린다. 그리고 선입견 없이 현실을 바탕으로 사유하려던 노무현 같은 지도자를 저주하고 돌멩이를 던졌다.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이념에 휘둘리는 연역론자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라반은 가장 명석한 두뇌와 양식과 판단력을 가진 지도자가 지난 화요일부터 미국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을 두루 만나면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마음이 놓일 수가 없다고 털어놓는다. 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를 이겨내기는 쉽지 않겠지만, 경험을 중시하고 신중하며 이상은 높이 두되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에서는 보수적으로 임하는 오바마가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모양이다.
지도자에게 가장 높은 도덕성과 지성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은 조선 왕조에서 이어 내려온 전통이었다. 조선의 임금은 고통스러운 자리였다. 세자로 책봉되면 코흘리개 시절부터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공부를 해야 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했다. 조선 왕조가 추구한 유교 이념이 현실을 바탕으로 사유하기보다는 관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달라지는 현실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세계를 좁고 단선적으로 보는 부작용은 있었지만, 지도자에게 가장 높은 도덕성과 지성을 요구하는 전통은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세종 임금이 한글을 거의 혼자 힘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살인적인 학문 수련이 쌓인 내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이런 훌륭한 전통이 식민지를 겪으면서 폭력적으로 끊기면서 해방 이후로 말보다는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철칙으로 아는 쌍놈들이 지도자 노릇을 계속해온 것이 한국의 비극이다. 그런 참담한 역사를 끊고 자랑스러운 전통을 되찾은 것이 지난 10년의 김대중, 노무현 정부였다.
김대중도 노무현도 모두 고등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이 두 지도자야말로 해방 이후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지식인이다. 대학 졸업은 물론이거니와 미국물, 일본물, 유럽물을 먹은 박사들이 한국에도 즐비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쭉정이일 뿐이다. 자기 현실을 놓고 사유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쭉정이 좌파들에게 냉엄한 현실은 신자유주의라는 관념어 한 단어로 말끔하게 정리되며 역시 쭉정이 우파들에게 복잡한 현실은 빨갱이 척결이라는 공갈 한 마디로 간단히 정리된다.
김대중은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서양 민주주의를 아시아에 그대로 들여올 수는 없다며 아시아적 민주주의론을 들먹이자 민주주의는 보편적이며 자동차를 아시아가 더 잘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도 아시아가 앞으로 더 잘 할 수도 있는 것이라며 명쾌하게 반박했다.
노무현은 남북 문제는 북미 문제가 풀리면 저절로 풀리게 되어 있다면서 무리한 남북 정상회담을 고집하지 않고 북미 관계가 호전될 수 있도록 측면 지원을 하는 데 집중했다. 복잡한 현실을 꿰뚫어보고 일의 선후 관계를 알았던 것이다. 진보네 보수네 하면서 밖에서 주워들은 이론만 들먹이는 한국의 대졸 먹물들 머리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발상이다.
만약 8년 전에 오바마 같은 사람이 미국 대통령에 뽑혔더라면 남북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한국은 욱일승천 날개를 달았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설치류 수준의 지능밖에 갖지 못한 사람이 한국 대통령으로 당대 최고의 지성을 가진 미국 대통령과 한반도 현실을 논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담하고 부끄럽고 두렵다.
이명박이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기가 오바마와 닮았다고 주장했다해서 분개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명박과 오바마는 분명히 공통점이 있다. 이명박도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이명박도 오바마처럼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조국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