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악양에 살던 황선목 신부가 거처를 옮겨 새 은둔처를 마련한 곳은 하동 적량이다. 지리산에 골짜기가 많다지만 적량에도 숨은 골짜기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황신부네 집을 방문하면서 처음 알았다.
골짜기는 진주~하동 간 국도에서 들어갈 수도 있고 악양에서 산길로도 넘어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악양에서 넘어가는 길은 구재봉과 칠성봉 사이를 넘는 길이라 아름답지만 길이 너무 좁고 거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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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를 하러간 날 마침 스님 두분이 황선목 신부를 방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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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부의 집은 칠성봉 밑이다. 칠성봉의 오른쪽이 청학동이고 왼쪽이 악양이다. 삼신봉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회남재를 허리로 삼고 칠성봉을 엉덩이로 삼아 악양들을 휘감아 돌면서 만들어진 골이라 산이 펑퍼짐하면서도 깊다.
마을 이름이 동점(東岾)이다. 점(岾)자는 고갯길을 의미한다. 동점은 지리산에 있는 삼점(三岾) 중의 하나이다. 옛날에는 청학동 사람들이 삼신봉에서 출발해 칠성봉의 동점과 구재봉의 먹점을 거쳐 하동에 장보러 갔다고 한다. 동점마을도 ‘호중별유천(壺中別有天)’이다.
호리병처럼 좁은 입구 속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이다. 은둔자가 살 만한 곳이다. 골짜기 안에 넓은 들판이 있고 큰 호수가 있다. 호수의 앞뒤에 마을이 있는데 마지막 동네에서 2킬로미터쯤의 논길로 더 들어가니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한 갈래의 끝은 어느 스님의 토굴이고 또 다른 갈래의 끝이 황신부네 집이었다.
집 마당에 하얀 화물차가 한 대 놓여 있었다. 황신부의 자가용이다. 집은 황토벽돌로 만들어졌고 난방은 심야전기보일러와 장작불을 겸하고 있는데, 전기료가 많이 나와 장작불만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남향으로 앉은 집이라 통 유리창으로 보이는 산의 곡선이 아름답다. 가장 먼 곳이 금오산이고 금오산으로 산의 물결이 집을 향해 첩첩이 몰려온다.
스위스 유학후 20년간 마산교구서 사제활동
통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며 “산이 그림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하자, 황신부는 “그 맛으로 산다”고 대답했다.
1978년 스위스 쿠르교구 가톨릭신학교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취리히에서 신부생활을 시작한 그는 취리히의 성베드로 성당과 바오로 성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다가 귀국해, 20년간 마산교구의 여러 성당에서 활동하다가 1997년부터 지리산에서 은둔수행 중이다. 황신부는 황토집을 짓는데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집터를 허가받는 데에서 준공을 하기까지 집짓는 일 하나 하나가 장애였다고 했다. 손이 꺼칠했고 면도를 하지 않은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그의 모습에 시골농부의 습(習)이 배어들고 있었다. “서양신학 공부하고 사제노릇 한답시고 몸으로 하는 일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좌선수행보다 행선이 나에게는 훨씬 더 힘이 듭니다.”
그가 말한 행선(行禪)은 노동을 의미한다. 어제는 톱으로 큰 나무를 베고 도끼질을 했더니 온몸이 뻐근하단다. 그래서 오늘은 따뜻한 온돌방에서 쉬는 날인데, 내가 예고 없이 방문했던 것이다. 이야기 도중에 스님 두 분이 찾아왔다. 황신부는 “오늘은 손 있는 날”이라며, “평소에는 땅값 물으러 오는 사람만 찾아오는데, 오늘은 영성의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찾아 와서 유별나다”고 말했다.
스님들과의 대화 속에서 황신부의 생각을 주워 담을 수 있었다. 황신부는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존재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하느님에 귀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제생활을 하는 동안 궁금증을 풀어줄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고, 이런 방법으로는 평생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며
“내 스스로 찾아 나선 수행을 통해 ‘나’는 원래부터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또 “깨달음의 세계와 안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하면서 “마하리쉬와 같은 인도영성 수행 쪽으로 내 생각이 정리가 되어 가더라”고 했다.
평생 하느님 못 만날까 두려워 수행 시작
그렇다면 “신부님의 종교는 지금 무엇입니까”라고 내가 묻자,
“존재의 근원을 찾는다는 점에서 종교는 다 똑 같습니다. 불교니 기독교니 하며 종교를 말하는 것은 편 가르기에 불과해요.”
그의 수행은 기독교 쪽이 아니라 불교 쪽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 놓은 책이름도 <지리산 주지 신부의 참나찾기>(한솜)이다. ‘지리산 주임 신부’가 아니라 ‘지리산 주지’이다. 주지스님이다. 책의 내용도 온통 불교 수행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도 지리산에서 수련 중인 도인과 기인들이다. 지난주에는 비구니 스님 두 분이 방문해 이틀을 머물다가 갔는데, 그들이 황신부에게 가르쳐준 것은 마하리쉬의 수행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1997년 마산교구로부터 1년간 안식년을 얻어 수행을 하면서부터 사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신부생활은 이 만큼 한 것으로 접자”고 결심을 했다. 그는 안식년이 끝나도 복귀하지 않았고 결국 마산교구로부터 2002년 10월 ‘성직(聖職)정지처분’을 받았다.
죄목은 명령불복종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라는 주교의 권유에 “하늘이 안과 밖이 없는데 교회는 왜 안과 밖이 있느냐”며 주교에게 항의했고, 주교가 하느님을 대신한다는 말에 대해 “주교 말은 하느님의 말이고 신부 말은 마귀새끼 말이냐”며 대들었다. “나는 내가 택한 이 길에서 끝장 내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제복을 벗어던졌다.
“나는 시대를 잘 타고 났습니다. 중세시대였다면 나의 죄목은 사형감이죠. 조직이라는 것이 그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북에서 빨갱이가 내려와도 살 길을 만들어 주는데, 교회라는 조직은 이탈자에게 오히려 ‘천벌’을 내립니다. 교회에 대한 불복종을 하늘에 대한 불복종으로 간주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교회가 이탈자에게 물질적으로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궁핍하여 패망하면 ‘봐라. 교회를 나가면 저런 꼴이 된다’고 말합니다.”
“좌선수행보다 나무 베는 일이 더 힘들어”
황신부는 지리산에 거처를 정해놓고 살면서 ‘은수자적인 공동체’를 구상했다. 조직의 간섭 안 받고 자기 삶을 자기가 살면서 영적인 유대를 맺을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8년을 지리산에 살다가 보니 “내가 조직이 싫어서 나왔는데 이런 공동체를 만들면 또 다른 조직을 생산하는 것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은 혼자 수행하는 방법을 택했다고”고 말했다.
황신부가 지리산을 은둔처로 생각한 이유는 “지리산이라는 명칭이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지(智)자와 리(利)자를 따와서 지리산으로 불리다가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많은 산이라는 뜻으로 변형돼 현재는 지리산으로 쓰이게 되었다”며 “이 정도 되는 산이라야 득도를 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지리산의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다가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지리산이 좋은 은둔처이긴 하지만 은둔 수행자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가 생계이다. 황신부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지리산에 들어와 나무 해서 장작 패고 군불 지피니까 방바닥이 따뜻해 좋습니다. 이제 입에 풀칠할 것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겨우살이 차를 한 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오늘 처음 차를 출시합니다.” 황토방 거실에는 겨우살이 차를 자를 때 쓰이는 작두가 두개 있고 막 만들어낸 차통이 있었다. 겨우살이는 지리산에서 직접 채취한 것으로 샀는데, 세 번 덖고 난 후 아무래도 아린 맛이 남아 있어서 네 번째는 한 시간 더 미열로 덖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작불로 땐 황토방에 건조시킨다.
가장 힘드는 부분이 자르는 일이란다. 황신부는 작두로 밤새 겨우살이를 자르면서 ‘죽다가 살아났다“고 말했다. 황신부를 신부라고 부르기에 민망하다.
그래서 그의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벗님’이라고 부를 것을 권유한다. 교회의 교우도 아니고 절에서의 도반도 아니다. 벗님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산을 내려오면서 황신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황신부의 은둔수행은 이문열 작품의 <사람의 아들>에 나오는 주인공 민요섭의 갈등과 오버랩되고 있었다.
/창원대강사·언어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