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스크랩] 리더십연구 : 의식의 장 의식의 에너지

장백산-1 2011. 1. 15. 15:58

 

 

우리 연구의 목적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의식의 에너지 장에 관한 실제적인 지도를 그려내는 데에 있다. 독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에너지 장의 수치 등은 대강의 숫자로 나타냈다.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의식의 지도'에서 측정된 수치는 감정이나 인식, 태도, 세계관, 영적 믿음 등을 통해 나타나는 특정한 의식 세계와 서로 상응한다. 시간이 허락되었다면 이 도표는 인간 행동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더 광범위한 것으로 확장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의식 세계를 수치화하는 데 있어서 '용기'의 수준인 200 이 일종의 분기점이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어떠한 생각이나 태도나 느낌이든 그 수치가 200 이하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근육 반응이 약하게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수치가 200 이상으로 나타났다면 그 생각이나 느낌, 태도, 사물, 혹은 역사적 인물들은 피험자의 근육 반응을 강하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200이라는 수치야말로 끌개가 강하냐 약하냐, 영향력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분기점인 것이다.

200 이하의 수준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삶의 태도는 '살아남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은 가난과 결핍에서 비롯되는 절망과 우울의 영역이다. 그보다 높은 '분노'와 '욕망'의 단계에 이르면, 개인의 생존을 위해 자기 본위의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자존심'의 수준에 이르면,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최초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긍정과 부정의 갈림길이 되는 '용기'의 수준에 이르면, 다른 사람들의 안녕이 점차 중요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500의 수치에 이르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고려하게 되어, 그것이 그 사람을 움직이는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600대에 가까워지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눈뜸에 관심을 갖게 되고, 600대에 이르면 인간의 선과 깨달음을 위한 추구가 삶의 기본적인 목표가 된다. 700에서 1,000까지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삶이다. 



토론

앞의 도표를 봄으로써 우리는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다. 겉보기에는 가치가 없어 보이는 태도들도 검증해 보면, 딱히 좋다거나 나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도덕적인 판단이란 수준이 높아진 상태에서만이 뒤를 돌아다보면서 할 수 있는 기능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슬픔'에 차 있는 사람(에너지 레벨 75)은 '분노'의 수준(150)에 올라감으로써 훨씬 진전된 상태에 도달한다. 분노 자체는 파괴적인 감정이고 낮은 수준의 의식 상태이지만, 사회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개인뿐만 아니라 소문화권도 질식시킬 수 있는 '무기력' 상태보다는 더 활기찬 에너지라 할 수 있다. 절망에 찬 사람들이 절망을 벗어나서 어떤 것을 원할 수만 있다면('욕망', 125), 그런 후 다시 ‘분노’ (150)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자존심'(175)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200의 수치로 측정되는 '용기'의 단계까지도 충분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용기'의 수준은 개인이나 집단적인 상태의 개선을 비로소 생각하게 되는 분기점이 된다.

반면에, 조건 없는 '사랑'의 상태에 이르러 사랑을 주는 것이 생활화된 사람에게는 그 이하의 수준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의식 향상을 위해 나아감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향상의 방향으로 저절로 계속되고, 또 저절로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어, 결국은 자아 향상이 우리의 생활 자체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자기 연민이나 편협성 같은 부정적인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조(Self-help) 그룹의 회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의식의 지도'에서 하위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 연민이나 편협성등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 그들의 생각을 정당한 것으로 믿고 수호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만 의식의 향상을 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항상 가르침을 펼쳐 왔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해 왔다. 이 사다리를 오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스승이 없이는 영적 성숙을 기약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적어도 특별한 가르침을 받거나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깨달음을 얻으려는 열망이 있어도 목표를 성취하기 어렵고 자신의 무능력에 절망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가 제시하는 도표가 이러한 궁극적인 인간의 열망에 유용하게 쓰여지기를 기대해 본다.

이 도표가 가져다주는 인식론적인 효과는 미묘하긴 하지만 광범위하다. 스포츠, 의학, 정신의학, 심리학, 인간 관계와 행복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에 이르기까지 실용적으로 쓰여질 수 있다. 의식의 지도를 숙고하며 들여다봄으로써 인과관계에 대한 새로운 자각도 싹틀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의식 수준과 더불어 의식의 지도를 들여다 보는 인지 능력도 향상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은 '결과물'이라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이 인식한 결과물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됨으로써 그 사람은 비로소 피해자의 입장을 초월하여 '나를 지배하는 외부의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 배움의 기회로 작용할 것인지 우리를 억압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태도인 것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에 저항하거나 도피하고자 함으로써 스스로를 그물에 가두는 데서 생겨나는 것일 뿐,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자체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혈압을 올리는 시끄러운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혼도 원하지 않을 때에는 큰 아픔이 되지만, 원하는 사람에게는 해방을 뜻한다.

'의식의 지도'로 인해 역사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도 새로운 조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가장 괄목할 만한 점은, 눈에 보이는 힘(force)과 인간에게 내재된 진실한 힘(power)을 구분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인도를 식민 통치하던 대영제국의 말기와 같은 역사의 한 시대를 이러한 연구 방법으로 탐구해 볼 수도 있다. 그 당시의 영국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타국을 착취하는 나라로서, 의식의 수치가 200 이하였다. 반면에 마하트마 간디의 행동 동기는 보통 사람의 의식 범주에서는 거의 정상(頂上)에 가까운 700의 수치를 보였다. 이 투쟁에서 간디가 이긴 것은 그가 가진 진실한 힘이 월등히 컸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의 힘은 진실한 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억지의 힘(175)이었고, 이 억지의 힘은 진실한 힘을 만나면 결국 패배하고 만다.

인간은 지금껏 법률 행위나 전쟁, 조작, 법률과 규제 등 억지의 힘으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치료'하려고 애써 왔다. 역사는 그 자취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렇듯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발버둥쳤건만 문제는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억지의 힘으로 문제를 치료하려는 정부나 개인은 근시안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민한 관찰자들은 선연하게 알고 있다. 사회의 갈등이란 근본적인 병인(病因)을 드러내고 '치유하기 전에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치료(treatment)와 치유(healing)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치료'하려는 사람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변화가 없고 한결 같다. 그러나 치유하려는 사람은 문제의 앞 뒤 관계를 파악하여 관점에 변화를 꾀한다. 그리하여 문제로부터 야기되는 증상을 다루기보다는 문제의 핵심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다. 고혈압 환자에게 약을 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다. 그러나 환자로 하여금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게 하여 분노하고 억압하는 마음을 없애도록 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의식의 지도를 들여다보고 명상을 함으로써 '기쁨'의 단계에 이르는 보다 빠른 길을 발견하기를 기대해 본다. 기쁨으로 가는 열쇠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게 조건 없이 친절을 베풀고 자비심을 갖는 데에 있다. 이러한 자비심이 없다면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자비심 없이는 어떠한 환자도 진실로, 또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없다는 바로 이 점에서, 개인의 치유는 나아가서는 곧 사회의 치유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치유받는 사람'이 곧 '치유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출처 : 리더십센터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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