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스크랩] 제5장 삼계 해탈(三界解脫) - 제1절 삼계 (三界)와 해탈(解脫) - 1. 삼계(三界) [2]

장백산-1 2011. 5. 14.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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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절 삼계 (三界)와 해탈(解脫)
          1. 삼계(三界) [2] 4선천은 번뇌의 그림자가 없는 무운천(無雲天), 그리고 번뇌의 구름이 없기 때문에 복이 저절로 오는 복생천(福生天), 그리고 넓이가 삼천대천 세계와 같이 광대무변한 광과천(廣果天)입니다. 4선천을 의지해서 정범지(淨梵地)가 있는데 보통 4선천의 광과천까지는 일반 외도나 천중들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정범지는 청정한 곳이므로 성자만 가는 곳입니다. 정범지에 있는 무번천(無煩天)은 번뇌가 없는 천상경계요, 무열천(無熱天)은 번뇌가 없으니 항시 청량미를 맛보는 경계요, 선현천(善現天)은 모두가 다 좋게만 광명으로 보이는 경계로서 우리 중생들은 기분이 좀 나쁘면 다 나쁘게 보이고 밉게 보이겠지만 여기서는 벌써 애증(愛憎)을 떠난 경계라는 말입니다. 또는 선견천(善見天)은 모두가 좋게만 보이니 우리의 견해도 응당히 선량하게 되는 경계요, 색구경천(色究竟天)은 모든 존재의 끄트머리 즉 모든 광명의 본질로서 가장 청청한 광명을 음미하고 생활하는 하늘의 경계입니다. 그 다음 화음천(和音天)은 신묘한 음률(音律)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경계입니다. 우리가 금강경에 색(色)이나 소리로는 여래(如來)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 있으니까 색은 별것이 아니고 광명이 별것인가? 극락세계나 영원의 세계는 소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우주란 것은 세간적인 때 묻은 색이나 소리를 초월한 영원한 묘색(妙色)과 묘음(妙音)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정확한 수리로써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고 잘못 살면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앞서 언급한 광명은 태양 빛같이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청정 적광(寂光), 정광(淨光)입니다. 그런 적광은 영생으로 항시 상주부동한 것이고, 음향이나 하나의 리듬(rhythm)도 화명애아(和明哀雅)라고 하여 법화경이나 또는 화엄경을 보면 천상의 음률 표현을 하고 있는데 보통 우리가 느끼는 명곡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한결 청정하고 무상한 오욕(五慾) 경계를 떠나버린 청정하고 평온하며 신묘한 음악인 것입니다. 그런 묘음이 우주에는 항시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사, 광명진언(光明眞言)이나 또는 어떤 진언이나 모든 진언이란 우주에 있는 신묘한 리듬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의미로 풀이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주에는 그와 같이 신묘한 리듬이 항시 있습니다. 우리가 명곡을 들으면 좋아하는 것도 가장 신묘한 리듬이 우리 불성 가운데 원래 존재하기 때문에 명곡을 들으면 그만치 우리 마음도 맑아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무색계는 색을 떠나버린 하나의 심식(心識) 곧, 마음만 있는 중생이 사는 세계입니다. 무색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는 공이 끝도 가도 없는 무량무변의 세계를 다 수용할 수 있는 경계이고 또 식(識)무변처는 일체가 유심조(唯心造)요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모든 것이 마음으로 통찰해 보이는 경계입니다. 처음에는 텅텅 비어 보였지만 업장이 더 녹아지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 곧 의식인 생명이 충만해 있음을 깨닫는 경계요,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식(識)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무엇이라 이름 지을 수도 없는, 이름과 상(相)을 여읜 경계입니다. 또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번뇌가 거의 다 스러져서 번뇌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 번뇌가 있는 것을 지각(知覺)하지 못할 정도로 청청한 경계이며 3계 가운데 최상의 천상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성도하시기 전 6년 고행 때도 육사외도(六師外道)한테 가서 여러 가지로 많이 배웠습니다마는 그런 가운데도 3외도 한테 배웠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공부와 관계가 있고 우리에게도 아주 훌륭한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 고행외도(苦行外道)인 발가바(Bhargava) 선인한테 가서 가지가지의 심각한 고행을 했는데, 어떤 기록에서는 발가바외도한테 배운 고행은 별것이 아니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그 당시 싯달타(Siddhartha 悉達多) 태자가 부처님같은 분을 만났으면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고행을 별로 않고서도 깨달음을 성취했겠지요. 그러나 고행으로서 미처 해탈을 못했다 할지라도 욕계 번뇌는 초월하여 범천(梵天)에 날 수 있는 능력은 얻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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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아승지겁을 닦아온 부처님인지라 고행을 해도 느낌과 얻음이 다르겠지요.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고행을 하면 그것에만 집착해서 고행을 할려고 하지마는 선량하고 총명한 사람은 고행을 해도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행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부처님께서 물었을 때에 ‘범천(梵天)에 나는 것’이라고 함으로 ‘그러면 하늘에 나는 것은 영생(永生)을 하고 인생고를 다 벗어나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되물으니까 ‘범천에 난다 하더라도 역시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 복이 다하면 다시 타락한다고 대답하니까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생로병사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요, 그런 하늘에 태어나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고 발가바 선인을 버리고서 다시 스승을 찾아간 것이 아라라칼마입니다. 아라라칼마(Alarakalma)는 이른바 수정주의(修定主義)자로서 선정에 드는 공부를 하는 외도의 스승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에게 ‘대체 어떤 공부를 하느냐’고 묻자 ‘무색계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닦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소유처는 무색계의 셋째번 하늘이니 상당히 높은 경계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인도에는 벌써 선정에 깊이 들어간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을 가리켜 신선, 바라문선인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벌써 욕심을 떠난 단계이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자기 스승과 같은 정도로 무소유처까지 들어가는 삼매(三昧)를 발득(發得)했습니다. 무소유처에 들어가 보니 재미가 있고 쾌락도 있으며 분별망상은 거의 가셨으나 아직은 삼계내(三界內)이기 때문에 해탈의 법락(法樂)은 못되어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정도 같으면 되겠다 싶어 멈추어 버리겠지요. 수승한 근기와 수승하지 않는 사람의 근기와의 차이는 이런 데에 있는 것입니다. 수승한 근기는 보통 웬만한 것에 절대로 머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라라칼마한테 ‘무소유처까지 들어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니까 ‘무소유처정을 닦는 것은 모든 괴로움을 떠나 안락스럽고, 5신통(五神通)을 얻으며 사후에는 무소유처 천상에 태어나기 위함이라’ ‘그러면 생로병사를 해탈하고 영생을 합니까?’ ‘영생은 하지 못하고 다만 오백대겁(五百大劫)까지는 살고 그 뒤에는 다시 떨어지게 된다’ 고 대답함으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영생 해탈이 목적이라’ 시며 떠나려 하자 자기 아들로서 자기보다 공부가 한 차원 높은 웃다카라마풋타(Uddaka Ramaputta)에게 찾아가라고 하여 그에게 갔습니다. 웃다카라마풋타에게 가서 ‘스승님은 대체로 어떤 공부를 하십니까?’ ‘나는 무소유처를 지나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증득(證得)하는 공부를 한다’ 고 하여 세존께서는 그곳에서 순식간에 비상비비상처정을 증득(證得)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습니다. ‘비상비비상처를 닦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나서 오랜 세월 동안 천상묘락을 누리기 위함이라’ ‘그러면 그곳에서는 영생을 할 수 있습니까’ ‘영생을 할 수는 없고 팔만대겁(八萬大劫)을 살다가 선정의 복이 다하면 떨어진다’ 팔만대겁은 그야말로 삼천갑자 동방삭이보다도 훨씬 더 많겠습니다마는 다시 또 떨어져서 잘못하면 지옥에도 간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생로병사를 해탈함인데 여기도 머물 데가 아니구나. 이제는 스스로 혼자 닦아 나가야겠구나’ 생각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세 선인(仙人)들은 그 당시 인도의 위대한 스승이지만 그들의 법은 삼계를 벗어나는 생사 해탈의 법은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신명을 걸고 좌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현교(顯敎)에는 없으나 밀교(密敎)에 있는 법문인데 보리수하에서 싯달타 태자가 공부를 할 때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경각(警覺)을 시켰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밀교도 공부를 하다 보면 참고 할 대문이 많습니다. 그것은 뭣인고 하면,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우리 자성불(自性佛)의 기운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서로 화합되어서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자성이 부처가 아니라면 제 아무리 두드리고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자기는 몰라도 사실은 자성불이 부처가 되고자 몸부림치는 것을 우리 중생들이 욕심과 진심과 치심으로써 억지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 애써서 차근차근 거둔다면 자생적으로 본래 자성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성불은 꼭 내 몸뚱이의 머리나 심장이나 어디에 갇혀 있는 것인가? 자성불(自性佛)은 바로 무장무애한 우주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침투가 안 된 곳이 없습니다. 자성불은 자기 몸이 되고 우주 만유가 다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사 스승이 없다 하더라도 정말로 바르게만 닦는다면 꼭 자성불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계행 지키고 한사코 공부하려고 정진해 보십시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바른 스승이 생기고 공부할 처소가 생기는 것입니다. 천지신명은 심심미묘한 것입니다. 한탄할 것은 자기 번뇌요, 다른 것에 책임을 전가시킬 아무런 것도 없습니다. 보리수하에서 싯달타가 그와 같이 ‘이제 다른 이에 의지하지 않고 내 스스로가 깨달아야겠다’ 고 비장한 결심을 할 때, 선정(禪定)도 벌써 삼계내의 가장 꼭대기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갔다고 할 때 정말로 신묘한 지혜가 발동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삼세제불이 감응(感應)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밀교 경전의 표현을 보면 삼세제불이 경각을 시켜서 즉신성불(卽身成佛)하는 오상성신법(五相成身法)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 복잡한 것은 생략하기로 합시다.
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
글쓴이 : 虛 堂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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