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중성자 설비 세계 7번째 준공… 나노·생명과학 연구에 큰 도움
이달 1일 대전의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는 국내 나노(Nano)·생명공학 분야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고대해온 설비가 준공됐다. 미국과 일본·프랑스·독일 등에 이은 세계 일곱 번째 냉중성자(cold neutron) 연구시설이다.계획부터 완공까지 10년 남짓 걸린 이 시설은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에서 튀어나오는 열(熱)중성자를 영하 250도의 액체수소로 냉각시켜 냉(冷)중성자로 바꿔주는 설비다.
- ▲ 한국원자력연구원 연구원들이 일본 업체가 맡긴 실리콘 결정을 실험용 원자로인 하나로의 내부에 들여놓고 있다. /원자력연구원 제공
중성자는 원래 원자로 안에서 우라늄의 핵분열을 촉발하는 입자이다. 핵분열이 시작되면 그 과정에서 또 천문학적인 숫자의 중성자가 연쇄적으로 튀어나온다. 이때 발생하는 열로 물을 끓여 터빈을 돌리는 게 원자력 발전이다. 원자로가 쏟아내는 중성자는 그 에너지 수준만 잘 조절하면 산업적으로 다양한 활용가치가 생긴다. 냉중성자가 그 한 예이다.
냉중성자는 나노미터(10억분의 1m) 수준의 물질을 관찰하기에 안성맞춤인 파장을 지니고 있다. 또 살아 있는 생체 물질을 파괴하지 않고 관찰할 수 있어서 생명현상 연구에 더없이 좋은 빛이다. 냉중성자가 나노기술과 생명공학 분야의 혁신을 이끌 것으로 기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핵분열 과정에서 감속재(減速材)를 거치며 원래의 1억분의 1 수준으로 에너지가 떨어진 열중성자는 1나노미터 이하의 원자 세계의 관찰, 암세포의 표적(標的)치료, 초고가의 반도체 생산에 쓰인다. 원자로에서 거의 무한대로 쏟아지는 중성자는 발전(發電)뿐만 아니라 산업과 의학의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미시 세계의 '팔방미인'이다.
◆나노 세계를 비추는 빛 '냉중성자'
대부분의 병원균은 크기가 나노미터 수준이다. 병원균이 우리 인체 세포막을 뚫고 침입하는 메커니즘을 관찰하려면 병원균과 세포 모두를 죽이지 않고 관찰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하다.
일반적인 전자현미경은 파장이 나노미터보다 훨씬 길어서 이런 정밀한 세계를 들여다볼 수가 없다. 정밀도가 높은 방사광 장치는 광선의 에너지가 너무 강해 관찰 대상 세포나 병원균을 죽여버린다.
반면 냉중성자를 쏘면 살아 있는 세포나 병원균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원자력연구원 이창희 박사는 "냉중성자는 에너지가 X레이의 100만분의 1 수준이어서 세포나 병원균의 생체막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냉중성자는 또 방사선 측정장치의 X레이보다는 파장이 길고 전자현미경의 전자보다는 파장이 짧다. 바로 이 범위가 1~100나노미터 크기를 측정하기에 좋은 파장이다. 냉중성자가 나노 소재와 구조물 연구에 더없이 좋은 이유다. 그간 국내 나노·생명과학 분야 과학자들은 나노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냉중성자 설비가 있는 미국 등 해외로 나가 실험을 해야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된다.
◆암세포 표적치료와 초고가 반도체 생산에는 '열중성자'
초고가의 전력용 반도체를 만들 때 원자로에서 나오는 열중성자가 이용된다. 전력용 반도체는 KTX 같은 고속열차나 프리우스 같은 하이브리드 자동차, 풍력발전 등에 사용되는 반도체. PC 등에 사용되는 일반 반도체보다 허용되는 전류의 세기가 1만배 이상 높고 가격도 일반 반도체보다 100~200배나 비싸다.
- ▲ 순수한 실리콘 결정에 중성자(그림 맨 왼쪽 분홍색 입자)를 쬐면 일부 실리콘 원자가 인(燐)으로 바뀌면서 도체도 부도체도 아닌 반도체로 변한다. 이를 한 장 한 장 잘라내면 반도체 웨이퍼가 된다. 이처럼 중성자를 사용해 만든 반도체는 일반 반도체 가격의 100~200배가 넘는 고가의 전력용 반도체로 사용된다.
전력용 반도체는 반도체의 원재료인 실리콘 결정 덩어리(잉곳)를 원자로 안에 놓고 중성자를 쪼이는 방법으로 만든다. 중성자를 쐰 실리콘 원자 일부는 인(燐)으로 바뀌고, 물질구성이 바뀐 실리콘은 도체도 부도체도 아닌 반도체로 변한다. 이렇게 만든 반도체는 일반 반도체보다 매우 균질하고 품질이 좋아서 많은 전류를 견뎌야 하는 전력용 반도체로 사용된다.
열중성자는 항암(抗癌) 치료에도 쓰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암세포가 좋아하는 붕소를 이용한 표적치료. 붕소가 포함된 화학물질을 환자의 체내에 주입하면 붕소 성분이 암세포에 달라붙는다. 원자력병원 신경외과 이창훈 박사는 "이때 암이 생긴 부위에 열중성자를 쐬면 붕소가 붕괴하면서 짧은 파장의 전자파가 나오면서 암세포를 죽인다"고 말했다.
중성자와 붕소를 이용한 치료법은 특히 뇌종양 치료에 효과적이어서 미국과 일본, 유럽의 핀란드 등에선 상용화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원자력병원과 원자력연구원이 실험용 원자로인 하나로에 중성자 치료설비를 설치,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인가를 신청한 상태다.
중성자가 이처럼 다양한 산업적 활용가치를 갖게 된 이유는 뭘까? 원자력연구원 이창희 박사는 "실험용 원자로 한 군데서 얻을 수 있는 중성자가 1초에 단위면적(㎠)당 100조 개에 가까운 수준"이라며 "이처럼 대량으로 생성되는 중성자의 특성이 산업적 가치를 낳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