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과학과 우주 생명
장회익(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이론물리 및 과학철학)
이 글은 사회교회연구소의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영성"이라는 주제하의 연속강연 가운데 장회익 교수님의 강연내용을 전제한 것입나다.
힘으로의 과학에서 눈으로의 과학으로
이제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로 넘어간다. 또는 새로운 천년이 온다고 해서 여러 가지 기대와 우려들을 하고 있습니다. 2천년이라는 것은, 기독교적 산출방식에 근거한 것이죠.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특별히 더 의미를 부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시간의 기준은 임의로 잡을 수 있고, 또 10, 100, 1000이라는 숫자에도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십진법을 쓰다보니까 거기에 맞췄을 뿐이죠. 사실은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간다 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사회적, 심리적 맥락에서는 의미가 있을 수 있고, 기독교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우연스럽게도, 바로 이 시기가 역사의 중요한 한 고비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생존을 위한 여건 부족으로 어려움에 처해 왔습니다. 쉽게 말하면 궁핍을 느껴왔던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필요한 생활 소재를 좀더 효과적으로 마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역사의 추진력이 되어 왔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뭔가를 얻게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선이었습니다. 그래서 근면 자체가 선이 되고 그러한 생각이 우리 가치관 속에 박히게 되었죠.
그런데 바로 이 시기를 넘어서면서 우리는 이제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마련했고, 어느 의미에서는 지나치게 마련했고,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 불분명해졌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해오던 그대로 하다 보니까 오히려 안한 것만 못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선 영산강 간척사업을 벌이다가 취소하게 되고, 네덜란드도 상당한 땅을 바다로 환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 독일에서는 강변에 쌓았던 둑을 다시 허물어 자연적인 상태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젠 무엇을 어떻게 얻어내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주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역사의 주된 추진력이 이렇게 바뀌게 될 분기점이 바로 이 시기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서구의 근대문명을 이룩한 가장 유명한 말은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힘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과학을 발전시켰고 그 힘에 의해서 엄청나게 뭔가를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론 복합적 의미의 힘이지만 순수하게 에너지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과거에는 오로지 우리 체력, 그 다음엔 소나 말을 사용해서 그 힘을 약간 빌리는 것이 활용할 수 있는 동력의 전부였다가 지금은 그것의 천 배, 만 배를 손쉽게 쓰고 있어요. 보통 자동차는 쉽게 얘기해서 100마력의 동력을 냅니다. 100마력이라는 것은 말 100마리가 끄는 힘입니다. 말 한 마리가 사람의 힘의 대여섯 배 힘을 내니까 내가 차를 몰고 어디를 간다고 하면 사람의 힘 500배를 들여서 움직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젠 `힘`으로서의 과학보다는 `눈`으로서의 과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다.` 대신에 `아는 것이 눈이다.`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사실 과학은 `눈`이 먼저고 그 다음이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알았기 때문에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 안다는 것은 사물을 넓게 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목적이 이미 설정되어 있었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만 앎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목적에 맞는 좁은 분야의 정밀한 지식만을 중시했습니다. 그들을 폭넓게 엮어서 전체 시야를 열어 주는 지식은 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부분적 지식은 있지만 이들을 전부 엮어서 우리의 과거와 앞날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폭넓게 보여줄 수 있게 하는 측면은 중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게 된 것들을 대략 엮어 불 때 어떤 큰 그림이 그려지는가 하는 데에 관한 것입니다.
뉴턴의 고전역학이 자연파괴의 주범인가
`현대 문명은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데 대한 시각에 상당한 차이들이 있는 거죠. 대다수의 사람들은 과학기술을 신뢰해 이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경제력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상당히 있습니다. 반면에 신과학이라든가, 생태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계론적인 세계관과 인간중심적 가치관을 비판합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계론적인 자연관과 대조되는 것은 목적론적 자연관입니다. 옛날에는 모든 것이 뭔가 하고 싶어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성에 해당하는 것이 돌이나 나무, 냇물, 바람 등 자연물들에 다 깔려 있다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나무에 가서 빌기도 하고 어떤 신을 달래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러한 자연물들은 법칙에 의해서만 움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사고가 바로 이것이 근대 과학을 일으킨 생각입니다. 그것에 대해 목적론적 사고에 대비해서 기계론적인 사고라고 명칭을 붙인 거죠. 그리고 이렇게 이해된 대상을 `기계`라는 것으로 모형화한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흔히 기계론적 사고의 전형이라고 얘기하는 갈릴레오, 뉴턴, 이러한 사람들의 고전역학만 하더라도 그러한 단순한 기계론적인 사고를 넘어선 것입니다. 기계론적 사고란 것은 쉼없이 맞물려 서로 힘을 미치는 것인데, 고전역학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힘을 주고 받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고전역학은 이미 그것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데, 이것에 대해서는 자연을 합법칙적 질서를 통해서 보려 하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립적인 표현이 될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굳이 `기계론적 사고`라고 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 주고 있는 것예요.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기계`로 보겠다 하면 기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
흔히 현대 문명이 잘못되어 가는 원인을 기계론적 사고에 돌리고 그것의 원흉이 뉴턴의 고전역학이기나 한 듯이 말하는데, 과연 우리가 뉴턴의 고전역학을 얼마나 이해하고 그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연 지금 몇 사람이나 뉴턴의 고전역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요? 저는 과학문헌들을 통해서 언제, 누가 최초로, 우리 동양에서 또는 한국의 지식인 중에서, 뉴턴의 고전역학을 이해했나 하고 살펴봤더니 적어도 20세기초까지 이해했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어요. 적어도 17세기부터 서구 사상들이 들어왔지만 19세기말까지 뉴턴의 고전역학을 제대로 알고 언급하고 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어요. 아마도 외국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물리란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조금씩 이해한 사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현대의 한국인들은 얼마나 뉴턴의 고전역학을 이해하고 있을까. 저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또 직접 배워봤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얘기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물리학과를 졸업했지만 눈을 감고 내가 고전역학을 아는가 자문해 보았더니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단순하질 않아요. 한두 문제를 푸는 것까지는 쉽지만 고전역학의 전체 모습이 어떤가. 이것이 어떠한 사고의 패턴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기까지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고전역학을 아주 쉽게 얘기하면 합법칙적인 질서를 가지고 자연계를 설명하는 건데, 그 질서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물을 설명하는 모범적인, 그리고 가장 간단한, 그 어떤 패턴을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 진리라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사물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형태를 제대로 갖춘, 최초의 이론이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이미 자연 파괴가 일어나고 있지요. 그런데 어째서 고전역학을 이해했기 때문에 자연파괴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느냐 이거예요. 전혀 맞는 얘기가 아니예요.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들은 자생적으로 과학을 발전시켰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 중에 극소수에 가까운 사람들만이 고전역학에 따른 기계론적 사고 때문에 우리가 자연계를 이렇게 파괴했다는 것은 전혀 얘기가 되지 않아요. 물론 이런 점은 있습니다. 자연을 합법칙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자연계가 어떤 영을 가지고 있고 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함부로 건드리면 나를 해칠 수가 있다는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 수는 있지요. 그러니까 맘대로 만질 수 있게 하죠. 과거에는 산을 건드리면 큰일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냥 그저 단순한 물질에 불과해요. 산을 건드리고 싶은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전 얘기하고 싶습니다. 정도가 넘으면 문제죠. 정도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지, 고전역학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기계론적 세계관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을 밀어내고 반지성적 자세에 안주하려는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동시에, 가짜를 갖고 놓고 저게 주범이다 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찾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저는 과학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말씀을 드립니다.
인간중심적 가치관의 양면성
그 다음에 인간중심적 가치관이라는 것이 문제로 떠 오르고 있습니다. 과거의 신 중심, 또는 좁은 의미의 종족 중심, 신분 중심, 제도 중심, 물신 중심 등등의 부정적인 가치관 -신 중심의 가치관이 부정적이냐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습니다만 - 에 대해 인간중심적인 가치관은 상당히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선 생태 중심이라든가 생명 중심 등의 가치관에 비해서는 이것이 문제가 있는 거죠. 사실 우리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한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얼마 안 되는 과거입니다. 그 전까지는 타 인종이라든가 다른 나라의 사람은 위험하니까 없애는 것이 더 좋다는 사고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암묵적으로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속에는 그러한 내용도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거기에 비해서, 또 물질을 인간보다 더 중시하는 풍조에 비해서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지금도 거기까지도 도달을 못했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생태 문제로 넘어갈 때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지금도 환경윤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간중심 가치관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보호하지 않고, 생태계를 보호하지 않으면 결국 인간이 해를 입는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살아 있는 인간만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나게 될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논리를 펴고 있어요.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맞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문제가 많이 있어요." 우리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아는가."의 문제입니다. 상황이 분명하지 않을 때에는 우리한테 편리한 쪽으로 결정을 해버린다 이거죠. 또 우리가 함께 살면서 얼굴 보는 사람, 저 사람이 지금 밥을 굶고 있는데 10년, 100년 후에 있을 사람이 밥을 먹기 위해서 지금 저 사람이 밥을 굶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가치관이 거기서 멈춰 버리면 굉장한 위험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로서 인간중심가치관을 철저히 신봉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객관적 상황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고, 그렇게 되면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행위를 하게 되고, 이것이 결국은 장기적으로 생태계에 위험을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중심 가치관으로서는 부족하고 뭔가 한 단계는 더 넘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넘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태를 중시한다고 하더라도, 그 중시하는 이유가 우리가 그걸 보호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해가 오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인간중심적인 가치관 속에 있는 거죠. 인간 이외의 대상에 본원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논리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면 인간중심 가치관이라는 것을 넘어서기가 어려운 거죠.
유기체적 패러다임과 생태적 의식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할 방안 몇 가지가 나와 있는데요. 그 중의 하나로 우리의 세계관, 가치관을 유기체적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기계론적 세계관에서부터 목적론적인 세계관으로, 다시 과학 이전의 관점으로 되돌려 보자는 거죠. 우리의 세계관이 이렇게 변해 온 것은 우리가 몰랐던 것을 새로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측면이 많은데, "다시 알았던 걸 취소하고 모르는 걸로 하자.", 이것은 아무리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대단히 어려운 거죠. 흔히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찾는다 해도 결국 따지고 보면 또 하나의 패러다임에 묶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가장 진리에 가까운 곳으로 가는 거지, 무슨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후에 보면, "아, 그 때 그 사람들은 이러한 패러다임에 묶여 있었구나." 이렇게 되는 거죠. 패러다임을 바꿔서 유기체적인 것으로 가지고 하는 것은 "나는 '유기체'라고 하는 고착된 틀에 박혀 보겠다."는 말밖에 안 되는 거지요. 우리는 진리를 찾겠다고 나서야지요. 진리를 찾겠다고 나서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패러다임에 고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미리부터 어떤 패러다임에 빠지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생태적인 의식을 가지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서도 '생태적 삶'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생태적인 의식을 가지고 본다는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니고 사실을, 생태적인 상황을 더 분명히 이해하는 측면이라고 저는 보고 있어요. 사실이 생태적이니까 생태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 사실이 아닌데 만들어서 보자는게 아니지요, 내가 실상을 사실대로 보려 한 것이, 낸 눈에는 생태적으로 보인 것이, 결과적으로는 '생태적'이라는 또 하나의 패러다임에 빠진 것이라면, 그것은 나도 어쩔 수 없지요. 그러나 뻔히 패러다임인 줄 알면서 스스로 빠지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예요.
동양적 사고와 과학의 눈
또 하나 "동양사상으로 복귀하자."는 얘기들을 합니다. 물론 동양사상은 서구사상하고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사실 대인지식, 즉 인품, 인격에 대한 것과 대물지식, 즉 물질에 관한 지식을 분리함으로써 각각 독립적인 학문체계를 구성했기 때문에, 특히 대물지식에 관련하여 정교한 과학을 성취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그 둘을 한데 섞어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영위할 것인지 또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는 데에 주로 관심을 갖습니다. 즉 동양에서의 학문 추구라고 하는 것은 앎 자체가 아니고 앎을 통해서 어떻게 삶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틀 자체가 기본적으로 상당한 균형을 잡고 있어요. 그 틀 안에서 사물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다는 것이 곧 그 틀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큰 의미에서는 지금 서구문명과 같은 이런 불균형을 초래하지는 않는 측면이 있지요, 따라서 만약 동양적인 사고만 가지고 있었더라면 현대 문명의 위기는 오지 않을지런지도 모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다시 동양적인 것으로 가보자고 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적인 것의 장점도 잇지만 약점도 있는데, 약점은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하게 보는 눈이 상당히 어둡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대 과학의 '눈'이 보여주는 것, 즉 '눈으로서의 과학'이 말해주는 것을 별도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이 사물을 명료하게 본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술문명도 만들 수 없는 거죠. 우리가 과학기술의 힘을 이만큼 발휘한다는 것 자체는 그 밑에 그만큼 꿰뚫어 보는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를 내다보는 눈'은 과학에서도 부족합니다. 사실상 지금 현대 과학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 점이라고 봐요. 현대 과학이 아는 것도 꽤 있는데 이것을 종합해서 전체적인 시야를 열어 주는 데는 부족하다는 것이죠. 과학자들은 부분부분은 굉장히 많이 알지만 그 사람보고 옆에 있는 것에 대해 얘기해 보라고 해보세요. 그러면 "내 전공이 아니다." 하고 전부 피하죠. 수백 개의 전공으로 갈라져서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연결해서 전체적인 시야를 얻지 않으면, 그래서 이것을 통해 견제하지 않으면, 지금 이 문명이라는 기계는 굉장히 위험하게 내달릴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어요. 그것을 해내는 것을 저는 `과학의 문화적 측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말하는 `생명`
과학은 꼭 여기에 있는 것을 들여다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기본법칙과 질서를 파악하면 그 중에 일부를 가지고 나머지도 알게 되는 합법칙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달에 직접 가 보지 않았지만 우리가 현재 여기서 보고 있는 달, 지구상에서 얻을 수 있는 데이터만 가지고 달은 이렇고 이럴 것이다 하고 가보면 실제로 그렇다 이거죠. 이렇게 지식을 공간적으로도 넓히고 시간적으로도 넓히는 겁니다. 공간·시간적으로 넓혀 나가고 또 작은 미시 세계로도 줄여 나가서 굉장히 많은 시야를 확보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생명이라는 것, 우리 자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과학에서는 그것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해주느냐, 이것이 사실 우리한테는 더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 자신도 물리학이라는 분야를 전공한 사람인데 자꾸 생명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물리학은 생명 아닌 것만 보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물리학자 한 사람이 자기 딸 얘기를 농담 섞어서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물리학이 뭔지 자기 딸한테 아무리 설명해 줘도 못 알아 듣더랍니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 갔다 오더니 싱글벙글 하면서 이제 물리학이 뭔지 알았다 하기에, 뭐가 물리학이냐 했더니, 산 것을 연구하는 것은 생물학이고 죽은 것을 연구하는 것은 물리학이다, 그러더랍니다. 흔히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살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연계의 보편적인 법칙을 다루는 것, 즉 대상이 아니고 법칙적인 측면을 보는 것이 물리학입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생명이 뭔가하는 건데, 물리학적인 배경 지식을 바탕에 깔고 봤을 때 생명 아닌 것과 생명인 것 사이의 차이가 어디서 오는냐, 이것이 제가 보려고 했던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본 생명의 모습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아직도 생명이 뭐냐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정의가 없어요. 대형 백과사전을 찾아보더라도 여러 가지 다른 정의를 내놓고 이것은 이런 장점이 있지만 이런 문제가 있고, 저것은 저래서 문제가 있고, 그래서 생명은 정의가 안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어요. 그래서 생명은 정의가 안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생명의 본질이 무엇이냐, 그것에 대해서 어떤 답을 얻고 싶다 하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어려운 질문이지요. 그래서 제가 생각했던 것은 생명의 단위가 뭐냐 하는 질문으로 바꿔 봤어요. 얼핏 생각하면 대답이 아주 간단하지요. 사람 한 사람, 강아지 한 마리, 나무 한 그루, 이것 하나 하나가 모두 생명이고 바로 이런 것이 생명의 단위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런 아주 상식적인 질문도 당장 생물학자들한테 가면 그 답이 달라져요. 생물학자들은 그것들이 생명의 단위가 아니고 세포 하나 하나가 생명의 단위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가 그 세포 안에 다 들어 있다 이거죠. 사실은 우리들도 모두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했어요. 모태에서 생겨날 때 최초에는 누구나 한 세포에서 시작돼요. 이것이 갈라져 둘로 되고, 다시 넷으로 되고 여덟 개로 되고 열여섯 개로 되고 해서, 그것들이 쌓여서 모태에서 태어날 때즘 해서는 적어도 수천만 개, 수억 개의 세포가 되어서 몸의 형체를 이루는 거죠. 우리 모두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하나의 세포라고 해서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도대체 그 안에 무엇이 있어서 생명이냐, 거기에 생명의 본질이라 할 만한 것이 뭐가 들어 있나, 유전자 즉 DNA라는 것이 뭐냐 하고 과학자들이 들여다보니까 하나의 분자덩어리예요. 흔히 있는 몇 가지 탄소, 질소, 산소 이런 것들이 엮어져 있는 분자 덩어리 외에 아무 것도 아니죠. 그러면 생명이 어디로 갔나? 우리가 생명을 찾아, 그 가장 본질적인 핵심을 찾아 내려가다 보니까 생명이 없어집니다. 생명은 분명히 있는데 우리가 놓친 거죠. 그러면 어떻게 다시 찾을까? 이번에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가 봐야 돼요. 유전자 홀로 떼어놓으면 생명이 아니예요. 세포 안에 들어 있어야 유전자 기능을 하죠. 물론 유전자만으로 구성된 바이러스 같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다른 세포안에 들어갔을 때라야 생명 노릇을 하지, 밖에 홀로 나와 있어서는 생명으로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유전자는 반드시 주변의 다른 물질과 함께 세포를 구성할 때라야 생명 노릇을 하죠.
그러면 세포는 어떠냐? 이것 또한 홀로 떨어져 있어서는 생명 노릇을 못해요. 사람의 세포도 내 몸에 붙어 있을 때에 사는 거지. 일단 떨어져 나가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물론 요즘 복제기술이 있어서 어쩌면 사람 세포 하나 떼어 가지고 잘하면 사람 하나 만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양에서 성공했지요?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거 하나 데어서 아무데나 얹어 놓으면 되는 게 아니예요.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만들려고 한다면 엄청나게 공을 들어야 합니다. 양 한 마리의 세포를 가지고 다시 양 한 마리를 복제하기 위해서 굉장한 공을 들였어요. 그러한 특별한 상황에 놓여 있을 대 양의 세포가 양이 될 수 있는 거고, 사람의 세포도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지, 세포 하나 홀로 분리시켜 놨을 때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포도 사람이면 사람처럼 조직의 한 부분이 되어 있어야 생명이다 하고 우리가 이해를 하게 되죠.
사람은 그럼 완전한 생명이라고 볼 수 있느냐? 그것도 또한 그렇지가 않아요. 사람 하나 딱 떼어 가지고 우주 안의 어느 한 위치에 딱 갖다 놓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5분을 견딜 수가 없지요. 숨을 못 쉬니까. 공기가 없잖아요. 공기가 있다는 것은 이 우주 안에서 보면 굉장히 특별한 상황입니다. 지구 표면에서도 조금 높이만 올라가도 벌써 곤란을 느끼죠. 아주 특별한 상황이 바로 공기고, 온도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옷을 벗고 상온에서 스물 몇 시간 있으면 얼어 죽습니다. 물론 음식물도 있어야 될 건 말할 것도 없지요. 엄청나게 까다로운 여건 아래에 있을 때만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까지 다 포함할 수 있는 생명은 뭘까 하고 또 우리가 한걸음 더 올라가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어디까지 더 가면 우주의 아무 데나 떼어다 놓아도 살 수 있는 생명이 되느냐, 그것이 제 관심사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았더니, 예를 들어 태양으로부터 오는 에너지같이 생명이 존속되기 위해 만족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가 있었어요. 결국 생명은 태양이 있고, 지구가 있고, 그 안에 특별한 조건이 만족되는 이러한 상황이 있어야만 생명이 되고, 그리고 그러한 상황만 된다면 우주 안에 어디다 갖다놔도 살아 갈 수 있다 이거죠. 지구하고 태양계를 함께 딱 떼어서 다른 은하계에 갖다놔도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족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몇몇 여건들, 이것이 됩니다. 이것이 생명이 존속될 물리적 필요조건이예요.
생명의 시작과 성장
그런데 사실 현대 과학으로 추적해 나가 보면 이 생명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하는 것을 대략 알 수가 있어요. 대략 35억 년 전에, 아주 쉽게 얘기하면, 초보적인 세포 한개가 우연히 생겨났어요. 그런데 그 세포는 어떤 성질이 있느냐? 잠시 존속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 곧 깨어져 없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없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태양과 지구라는 여건 아래서는 자기와 비슷한 걸 만드는데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가 없어지기 전에 최소한 자기와 비슷한 것이 하나 이상 만들어질 수 있도록 영양을 끼친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가 생기고 그 하나가 미처 없어지기 전에 또 하나가 생기는 거지요. 그런데 새로 만들어진 것 또한 처음 걸 그대로 본받았기 때문에 이것 역시 그런 기능을 가지게 되지요. 그러면 다시 또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새로운 것이 또 생기고, 이렇게 계속 이어나가게 되지요. 여기서 이런 기능을 지니게 될 물리적 특성을 우리가 `정보`라고 부릅니다. 이런 식으로 대를 이어 정보가 전해지면서 생명이 존속해 나가게 되지요.
이것이 우리 지구 생명의 최초의 상황입니다. 그런 여건이 대략 35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둘이 되고, 넷이 되면서 물론 중간중간 변화되기도 하고 단절된 것도 많지만, 그래도 역시 살아남은 것이 계속 있어서 35억 년간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우리들한테까지 내려왔어요. 여기 모든 분이 그걸 거꾸로 추적해 볼 수가 있지요. 추적을 해 보면 결국 하나로 가게 되는데, 그 가운데에 한번도 단절이 없었어요. 단절이 있었다면 우리가 여기 없는 거지요. 35억 년 동안 죽 한번도 끊이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또한 놀랄 만한 일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각자 고립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서로간에 연결을 가지면서 존재하지요. 그러니까 사람은 다른 생물체가 만들어주는 영양을 먹음으로써 살게 되고, 이것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생태계라는 모습으로 상호의존하고 있지만, 그뿐이 아니고 과거로 올라가면 정보를 전부 공유했습니다. 한 조상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러면 이 전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봐야 될까요. 이것이 우리 각각의 사람 모습하고 굉장히 비슷해요. 사람도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하는데, 둘, 넷, 여덟이 되면서 수십 년이 지나 지금 내 몸을 이루게 되었는데, 나는 지금 그 초기의 세포를 안 가지고 있어요. 그 당시의 세포들은 이미 다 없어졌지만 여전히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나라고 부르죠. 세포라든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보면 10년 전의 나하고 전혀 다르지만 10년 전에도 나고, 지금도 나예요. 정보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내가 기억을 하고 있고 그때 심정을 내가 지금도 느끼고 있고 이러한 뭐가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그리고 앞으로 더 나로 존재하게 되겠지요. 앞으로 존재할 나는 지금 이 물질 덩어리는 아닐텐데도 불구하고 그것도 역시 나고 또 그런 내가 나로서 계속 생존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전체는 하나인데, 물리적으로는 하나가 아니예요.
그럼 어째서 하나일까요. 정보적인 연속성을 통해서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초기 지구에 나타난 첫 한 세포로 출발해서 지금 나까지 연결된 이건 뭘까요. 이것이 더 큰 하나입니다. 그것은 기억을 못하지 않는냐? 사실은 기억을 하고 있어요. DNA가 바로 그 기억의 덩어리예요. 그러니까 이 DNA의 정보는 35억 년 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지혜를 담고 있는 거예요. 정보적으로 연결이 돼 있는 거죠.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우리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정보가 35억 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바로 나의 정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제 과학의 힘을 빌려 거꾸로 추적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5억 년 전에는 내가 어떤 상황에 있었다. 10억 년 전에는 어땠다 하는 것을 이제 상당히 많이 봐나가고 있어요. 그러면 아, 나는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성장해서 이렇게 지금까지 왔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된 거죠. 그런데 이 상황이 참 재미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저는 이것을 하나의 실체라고 보고 있어요.
온생명, 낱생명, 보생명
내 생애에 있었던 이 전체, 말하자면 내가 태어나서 자란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한 `인간`이라고 부르고 또 `나`라고 부르죠. 그렇다면 지구 초기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죽 연속된 이 큰 전체도 또 어떤 실체인데, 그럼 이건 뭐라고 부르느냐?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에는 이름이 없어요. 아무도 그것을 하나의 실체로 의미있게 생각하고 이름을 붙여 놓지 않던 거예요. 도리 없이 제가 이름을 붙였죠. 그래서 영어로 global life라고 했습니다. 영어로 먼저 이름을 지은 이유는 제가 그 논문을 영문으로 먼저 발표를 했기 때문이예요. 한 10여 년 전 유고슬라비아에서 있었던 과학철학 모임에서 그렇게 발표를 했지요. 그리고 나서 우리말로 번역을 하려는데 잘 안돼요. 지구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좀 답답하고, 우주 생명이라는 표현도 써봤는데 이건 너무 크고, 여러 가지로 어려왔어요. 그러다가 `온생명`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내고, 그 후에는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지구 초기의 그 어느 때 최초로 발생해서 지금까지 쭉 성장해온 그 존재, 그것이 온생명이고, 좀 전에 말씀드린 생명의 진정한 단위입니다. 다른 태양 근처에도 다른 계열의 것이 있다면 그건 또 하나의 온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보통명사예요. 전 우주에 하나의 온생명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우주 안의 생명을 통틀어 온생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예요. 말하자면 한 생명이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갖추어진 생명의 한 거시적인 기본단위라고 얘기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 지구상에서 여러분과 나는 같은 온생명의 부분들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려 할 때, 온생명이라고 하는 데까지 가야 비로소 무리 없이 생명의 전체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생명 자체의 생리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얘기해야 할 것이 많고, 또 온생명이 겪어 온 역사를 보면 아주 재밌는 게 많아요. 가령 우리에게 언제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생겼느냐, 또 어느 시기에 왜 본능이라는 것이 생겼느냐 하는 것도 지금은 추적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어느 시기에 왜 생겼는지를 알면, 우리가 지금 본능을 어느 정도 왜 만족시켜 주어야 하는지,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해야 하는지, 하는 것들을 그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서 얘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과학적으로 제대로 파악한다면 많은 문제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안에서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이 온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묘한 것이 한 덩어리로 완전히 그냥 기계처럼 묶여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 떨어진 `낱생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개체생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 있는 한 분 한 분은 모두 낱생명이예요. 이것이 조직을 잘 해서 또 하나의 큰 낱생명을 만들고 또 더 큰 규모의 낱생명을 만들고…, 이런 식으로 점점 더 큰 짜임을 이루어나갑니다. 그런데 이 낱생명들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실 개인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낱생명의 의식이거든요.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생명이라 한 것은 이 낱생명을 얘기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 낱생명은 단독으로는 생존할 수가 없지요. 반드시 온생명의 한 구성원으로만 생존할 수가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하나의 낱생명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자신을 제외한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에 결정적으로 의존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생명`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전체는 온생명이지요. 여기서 기준으로 삼을 낱생명은 임의롭게 생각할 수 있어요. 이것은 저 개인일 수도 있고, 인류 전체를 얘기할 수도 있고, 토끼 한 마리를 얘기할 수도 있죠. 이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그 보생명은 범위가 달라지지요. 가령 제 개인의 보생명 안에는 여러 분이 들어가지만 인류의 보생명에는 우리 모두를 제외한 나머지 온생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온생명 또한 낱생명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지요. 온생명은 개개의 낱생명들을 통해 그 생명성을 견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낱생명들의 생존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낱생명 하나하나는 열심히 생존하려는 경향을 가집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 개체를 유지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면서도 주변, 즉 보생명과 조화를 잘 이루어야 온생명이 유지되고 자기 개체도 생존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항상 외견상으로 상충되는 두 가지 성질을 갖는데, 이것이 채취와 보존이고 또 동료 개체들 사이에는 경쟁과 협동입니다. 생태계에서 무얼 쟁취해내어만 생존이 가능하면서도 그 생태계를 보존해야 하는 상반된 두 가지를 반드시 갖게 되는데, 이는 온생명이 항상 이러한 개체 단위의 구조로 엮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지요. 이러한 성향이 우리 본능 속, 그리고 우리 심정 속에 부각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이기심이 있으면서도 이타심이 있죠. 자기들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또 다른 사람도 생각합니다. 왜 이런 이중적 성격을 가질까 하는 생각들을 오래 전부터 해 왔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지요. 이러한 온생명 생리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다 도태가 된다고 얘기할 수 있죠.
온생명의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온생명 안에 존재하게 된 여거 낱생명들 가운데서도 아마 가장 중요한 존재가 `인간`일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독특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온생명에서 거의 최종적으로 나온, 상당히 늦게 태어난 존재인데 역시 온생명의 다른 개체들과 공존하면서, 또 그것들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는 존재입니다. 사람이야말로 사람만 닥 추려 놓으면 전혀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다른데 의존을 대단히 많이 하면서도 또한 매우 특징적인 묘한 존재입니다. 물론 그 선조를 추적해 나가면 다른 생물종들과 큰 차이가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의식`이라는 것을 차츰차츰 가지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정신구조를 추적해 보면 사람에게 와서 이 의식이 굉장히 선명해진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의식도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우선 `나`라는 것을 아는 자아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우리`라는 것을 느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자기 혼자뿐 아니라 우리라고 하는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식을 지닌 존재는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낱생명 중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의식을 지닌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자기를 의식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불행한 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식물인간이라 말하죠. 불행하게도 그렇게 돼버리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정말 딱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온생명을 생각해 볼까요? 온생명이라는 것을 보면 하나의 큰 생명의 단위인데, 이것이 태어난 이후 35억 년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이 나타남으로 해서 의식을 갖게 되었지요. 사람 자신이 온생명의 한 부분이니까 그 안에서 의식을 지닌 존재가 태어난 것인데, 처음에는 이것이 오직 인간 자신만을 주체로 하는 작은 의미의 의식이었지요. 그러다가 차츰 자신들이 이 온생명의 한 부분인 것을 알게 되고 이 온생명을 자신의 큰`몸`이라 느끼게 된 것이예요. 말하자면 인간의 공동체 의식이 온생명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이것을 온생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인간이 출현하면서 비로소 온생명 자신이 `나`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겁니다.
이것은 정말로 엄청난 사건이예요. 보세요. 35억 년의 우주적 과정을 거쳐 처음으로 이러한 의식이 발생했으니 이는 곧 우주사적 사건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가장 집적적인 주체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 자신이예요. 우리가 왜 우주의 이 시기에 바로 이 온생명 안에서 하필이면 이러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태어난 이상 우리의 책임은 막중한 것이예요. 바로 이 온생명의 의식이 되어 이 온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대단히 중요한 점은 우리가 바로 온생명의 의식이 되어 온 생명의 상황을 살펴보니, 이것이 바로 엄청나게 위독한 병적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예요. 최근에 와서 지구는 상처 투성이이고 생태계는 크게 병들어 있어요.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 있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 때문이예요. 인간들이 좀더 물질적인 풍요를 누려 보겠다고 해서 애써 본 결과 우리 온생명의 생리를 이 지경으로 뒤흔들어 놓은 것이지요. 이는 마치도 암적 질환과 매우 흡사합니다. 암세포하는 것이 뭡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세포 아니예요? 그것이 자신의 본분과 위상을 망각하고 과잉 번영을 꾀한 것이 신체 전체로 보면 암이라는 질환으로 나타나는 것밖에 아니지요.
인간은 당연히 온생명 안의 온생명이 낳은 낱생명인데, 이것이 그만 자신들만 생각하여 과잉 번영을 꾀하는 바람에 온생명 전체가 회복을 장담하기 어려운 위험에 빠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우주적인 역설이예요. 인간이 태어남으로써 우리 온생명이 비로소 `나`라고 하는 자의식을 지닌 존재가 되는가 싶었는데, 아니 이것이 바로 암세포들이 되고 있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는 아주 절망적인 이야기인가? 한 가지 희망은 있습니다. 인간이 암세포와 다른 것은 암세포는 자신이 암세포라는 사실을 파악할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존재임에 비해, 인간은 설혹 현재 이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와의 대화를 통해 이를 의식할 잠재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설혹 인류의 99%가 이 중요한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들에게 말을 걸 수가 있고 이들 또한 마릉ㄹ 듣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발 이 시점에 온생명의 의식 구실을 할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점,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깨어 있는 1%에 속해 있어서 온생명의 무서운 질환을 치유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우주사적 소명-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존재들이라는 자각에 이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온생명을 `나`로 의식하는 고차적 의식단계에 이른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만일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을 `나`로 의식하는 그 어떤 집합적 지성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리 온생명이라고 하더라도 그 어떤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의 자아를 의식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인간의 이러한 온생명 으식이 객체로서의 온생명 의식뿐 아니라 주체의 연장선에서의 온생명 의식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객체로서의 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주체로서의 자아에 이르게 되는 것은 기와의 주체인 작은 `나`가 그 중심에 놓이면서 자신의 의식을 내부로부터 온생명 전체로 확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생명가치관
우리가 일단 생명의 성격을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이 안에서 생명가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만일 자신의 생명, 즉 자신에게 부여된 낱생명을 그 어떤 절대적 의미를 지닌 기본 가치로 인정한다면 이를 포함하는 본원적 생명인 온생명에 대해서는 최소한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상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도 내 손가락 하나의 안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 몸 전체의 안의는 그것보다는 한 차원 더 중요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일단 온생명의 본원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낱생명들의 집합적 그리고 개별적 가치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온생명이 가치롭다는 판단에 이르는 것은 바로 우리 각자가 지닌 낱생명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이며, 우리가 온생명에 참여하는 것 또한 이 낱생명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므로, 온생명의 가치를 인정한다 하여 낱생명이 지닌 가치의 절대치가 결코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상위 가치로서의 온생명 가치를 인정하고 나면 개별 낱생명들이 지니는 기능적 차별화를 또한 규정할 수 있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함께 온생명의 부분들을 이루고 있으므로 모두가 그 어떤 절대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음이 사실이나, 그 생사와 생존의 방식에 있어서는 온생명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나름대로의 위계와 질서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일견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 사회 안에 나타나는 하나의 유비를 살펴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인간의 생명에 대해 그 어떤 절대적 가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예컨대 살인 등의 극단적인 반사회적 행위를 하는 일부 개인에 대해서는 경우에 따라 그 생명을 제거하는 제재마저 가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정이 반드시 인간의 생명가치를 폄하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인간 생명에 대해 기본적으로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하나의 고차적 기준에 의해 기능에 따른 이들의 차별화는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낱생명들의 가치가 온생명이라고 하는 제3의 가치를 위한 도구적 가치 혹은 종속적 가치로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낱생명들에 부여하는 이러한 가치가 하나의 절대적 가치, 예컨대 그 어떤 절대자를 위한 기여의 정도만으로 평가되는 도구적 성격의 가치와 과연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컨대 어느 누가 낱생명의 가치를 온생명만을 위한 도구적 가치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할 때 현실적으로 그 어떤 차이가 나타나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의 대답이 가능합니다. 그 하나가 기여중립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차이이다. 도구적 가치만이 인정된다고 할 때 만일 이것이 기본적 가치에 대해 아무런 기여 또는 해약이 없는 기여중립의 상황에 머무른다면 그 자체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임의로운 처리의 대상이 될 수가 있을 것이나, 개체로서의 절대적 존재가치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설혹 이러한 기여중립의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 존재의 지속이 존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이러한 낱생명들의 주체적 의식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낱생명의 주체적 관점에서 볼 때에 온생명은 이미 자신과 분리된 별개의 객체가 아니라 더 큰 `나`의 일부로 인정되므로, 이 두 가치는 분리된 두 개의 가치가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즉 이는 별개의 두 가치 사이의 가치 종속적 상황이 아니라 동일 가치의 구성상에 나타나는 내적 구획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컨대 한 유기체의 경우 이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으로 인정되면서도 이들은 도한 유기체의 정상적 기능 수행에 어떻게 기여하는가에 따라 그 상대적 가치를 부여받게 됨과 흡사합니다. 온생명의 경우 각각의 낱생명들은 생명으로서의 기본적 가치를 부여받음과 동시에 온생명의 `건강한` 전체 기능 수행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또 하나의 판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온생명의 건강한 존재양상 더 나아가 이것의 이상적인 존재양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위한 각 개체생명들의 기여도를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곧 하나의 좋은 상대적 가치 척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온생명에 그 어떤 이상적인 존재양상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것이 있다면 이를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선험적인 해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위해 불완전하나마 그 어떤 최선의 추정을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최선의 지식, 예컨대 온생명의 역사적 성장과정과 온생명의 생태적 존재양상 등에 관한 지식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온생명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온생명은 풍요롭고 다채로운 생명현상들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고 있으며, 특히 인간을 비롯한 영특한 지적 존재들을 빚어내어 그들을 통한 또하나의 창조작업을 이루어 나가는 실로 경탄해 마지 않을 그 어떤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온 생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온생명의 바람직한 존재양상이란 최소한 이러한 창조적 다양성을 지속시켜 나가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만일 온생명이 지닌 병적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바로 이러한 창조적 기능과 성과를 그 어떤 이유로 인해 상실하거나 상실해 버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단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각각의 낱생명들이 지니는 절대적 가치와 함게 이들에게 부여할 기능적 가치의 판정기준이 마련되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 그 어떤 존재가 온생명의 이러한 바람직한 존재양상에 기여하는 방향의 결과를 초래하면 이는 좀더 가치로운 존재가 될 것이며,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면 이는 상대적으로 덜 가치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판정일 뿐 절대적 판정은 아님을 유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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