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法性)과 불성(佛性), 注視하는 者
同時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을까?
일을 하면서 종종 法門을 듣는다. 주로 불교tv를 통해서이다.
일을 하면서 귀로는 法門을 듣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일의 특성상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과정이 있는 가 하면 마치 ‘밭가는’ 것 과 같이 ‘
單純作業’을 할 境遇도 있다. 法門을 들을 때는 물론 단순작업을 할 때이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작업의 경우 법문을 들어도 법문이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이 것을 보면 한 瞬間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證明된다. 그렇다면 단순작업을 할 때 법문이 귀에 들어 오는 것은 어떤 현상일까.
흔히 학생들이 라디오나 mp3를 켜 놓고 음악을 들으면서 工夫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제대로
集中을 할 수 없어서 공부의 능률이 오르지 않을 것이다. 한 瞬間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 한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러나 단순 반복 작업을 할 경우 그 것이 가능하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지 않는 단순반복작업은 일을 하는 중간에 음악이든, 법문이든 들으면 귀에 들어 온다. 그러나 법문의 경우 전 내용을 기억 할 수 없고, 가장 인상적인 일부의 내용만 기억이 날 것이다. 그런 법문 중에 ‘귀에 띄는’ 법문은 다시 듣기로 듣는다. 그리고 녹취하여 글을 쓰는데 사용 한다. 그렇게 할 경우 그 법문은 약 10번 가량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禪師’들의 法門은 녹취하여 글의 소재로 사용 할 수 있을 정도로 감동적인 법문은 매우 ‘희귀’하다.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한 生覺 일어나면 煩惱이고 妄念이다.”불교tv에서 어느 선사의 법문 제목이다.
10대 중반 어려서 출가하여 역시 10대 때 得道 하였다고 자막에 소개 된 선사의 법문을 들어 보면
主로 ‘業과 ‘마음 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業과 마음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하면서 “業의 앞잡이가 되어 生死輪回를 거듭 한다”고 말하며, 죽고 새로 태어 나는 것을 마치 새옷을 갈아 입듯이 ‘몸만 바꾸는’ 것으로 이야기 한다. 또
선사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 ‘因緣’이다. 모든 것은 ‘因緣따라’ 生기고 因緣따라 滅한다는 ‘
因緣따라 法門’이다. 이 因緣法에 따르면 모든 만남과 헤어짐, 길흉화복도 모두 因緣따라 생기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우리나라 禪師들이 즐겨 使用 하는 單語가 業, 마음, 因緣과 같은 말이다. 이런 用語를
使用 하여 주어진 법문시간을 다 사용하지만 다 듣고 난 후에 남는 것이 별로 없는 듯한 느낌이다.
좋은 말, 마음에 남는 말, 주요한 말들을 노트 하려 하지만 쓸 것이 없다면 그다지 감명 깊은 법문이라 볼 수 없다. 선사들이 법문 시간을 다 채워 가면서 業과 마음과, 因緣法에 對하여 이야기 하지만 왜 그다지 가슴에 남는 法門이 되지 않을까.
그 理由는 아마도 日常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의 過程에서 겪고 있는 現實的인 問題와 부처님의
根本 가르침이 담겨 있는 無常, 苦, 無我에 對하여 이야기 하지 않음이 主된 理由일 것이다.
그렇다면 선사들은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할까.
한 물건, 그 분, 동그라미
선사들은 법문에서 業과 마음, 因緣과 더불어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 ‘眞如’ 또는 ‘佛城’과 같은 말이다. 自身의 마음을 자꾸 비워 나가다 보면 가장 純粹하고 깨끗한 마음이 드러나는 데,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마음과 같은 ‘本來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을 本來面目, 眞如, 佛性, 法性, 참나 등으로 부른다. 본래 ‘空 思想’으로 부터 유래된 그
用語들은 自身의 마음과 함께 恒常 存在 하는 것으로서 ‘存在 그 自體’라고도 말하고, 선사들은
여러 형태로 이름을 지어 부른다. 그 중에 ‘한 물건’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선가귀감)
이처럼 '한 물건'은 한 없이 밝고 神靈스러워 본래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존재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설명할 수 없어서 그냥 ‘한 물건’으로 보는 것이다. 그 한 물건이란 또 어떻게 표현 되고 있을까.
東山法演師祖曰, 동산법연사조왈
釋迦彌勒 猶是他奴. 석가미륵 유시타노
且道, 他是阿誰. 차도 타시아수
동산의 법연 선사가 말하였다.
“석가도 미륵도 오히려 그의 종이다.
자아, 말해보라.
그는 대체 누구냐?”
(무문관 45칙)
석가모니 부처님도 앞으로 오실 미륵 부처님도 그의 종이라 한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누구 일까.
이에 대하여 ‘無門關講說(무산본각 지음)’에서 저자는 그 분을 ‘佛性’이라고 表現 하였다.
言語가 끊어지고 分別이 通하지 않는 그런 境界를 그저 그 분, 한 物件, 佛性, 眞如, 참나, 自性,
本來面目, 法性 等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 境界를 맛 본 이들이 中國의 祖師에만 있었을까.
중동의 사막지대 부족이었다면 그를 야훼 또는 알라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명칭으로 創造主라 불렀을 것이다. 고대 중국이었다면 上帝로, 우리나라 巫俗人들이라면 장군님이나 동자님으로 불렀을 것이다.
석가도 미륵도 마치 종처럼 부려먹는 그는 또 ‘동그라미’로도 표현 된다.
월호스님은 불교tv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들어 법문하였다.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석가유미회 가섭기능전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
석가도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傳하랴
(직지심경 134, 월호스님의 생활법문 <행복창조>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1&PID=P597)
부처님이 出現하기 以前에도 存在하고 있었던 ‘그 것’을 ‘동그라미(一相圓, 일상원)’로 표현한 것이다. 그 동그라미를 석가모니 부처님도 몰랐는데 가섭과 같은 부처님의 제자 역시 알았을 리
없다는 이야기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자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 조차 몰랐던 바로 '그 것'은 밝고 신령스런 ‘한 물건,‘그 분’, 그 것’으로 표현 되는데, 중국 불교에서는 ‘法性’이나 ‘佛性’으로 표현 된다. 그래서 최근 bbs 불교방송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 프로를 들으면 방송의 마지막 멘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매번 듣기에 이르렀다.
“당신과 내안의 神性한 빛, 거룩한 불성(佛性) 앞에 경배 올립니다”
佛性이 왜 밝고 神性한 빛이고, 人格體처럼 거룩하고 더구나 경배의 對相이 될까. 불교도들의 경배의 대상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로서 삼보가 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느데,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전혀 보이지 않는 佛性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불교tv 사이트에서 법문과 강좌를 찾아 보았다.
성본스님의 禪佛敎 특강에서
이미 종영된 프로중에 ‘성본스님’의 선불교에 대한 강좌가 있다.
그 강의에서 中國에서 발생한 禪宗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중국인의 ‘現實 肯定’思想과 노장의 ‘無爲自然’思想을 結合하여 만든 것이 禪 思想이다.”
(성본스님의 선불교 특강,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455)
중국선종연구로 선학 분야의 권위자로 잘 알려진 동국대 선학과 교수이기도 한 성본스님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인도의 불교를 이해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論理的인 印度佛敎를 現實的인 思考를 가진 中國人들이 理解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도시(圖示)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方法 中의 하나가 空 思想을 하나의 원(圓)으로 表現 한 것이다. 변상도 같은 것이다.
또한 중국의 忠孝思想을 바탕으로 중국인들의 현실에 맞도록 만든 경전이 ‘우란분경’과 같은 ‘위경(僞經)’이다. 이런 위경에 대하여 성본스님은 ‘사람이 만든 경’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위경은 가장 중국적인 경전이라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현실긍정사상과 노장의 무위자연사상이 결합하여 선사상이 만들어 졌듯이, 이 禪思想을 土臺로 하여 만들어진 經典이 능엄경, 원각경, 금강삼매경과 같은 僞經이라고 스님은 설명한다.
앞서 언급한 직지심경의 동그라미(일상원)은 空思想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眞如 또는 佛性이라 볼 수 있다. 그런 佛性 또한 중국인의 현실중시 사상의 바탕하에 오로지 중국에서만 출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법성(法性)과 불성(佛性)
그런 佛性을 부처님도 모르고 부처님의 제자들도 몰랐기 때문에 無門關 45칙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미래의 미륵 부처님도 그의 종이라고 표현 하였다. 인도불교에서도 나오지 않는 佛性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김종욱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眞空과 妙有를 뛰어 넘어 如如하고, 眞如이고, 如實한 것을 諸法實相이라 하는데,
이 것의 性稟이 事物에 드러나면 법성(法性)이라 하고, 人間에 드러나면 불성(佛性)이라 한다.
(김종욱 교수의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09)
法性과 佛性은 모두 空思想을 基盤으로 함을 알 수 있다. 비우고 또 비워서 ‘진공(眞空)’이 되면 그 眞空 속에 存在 그 自體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이를 ‘묘유(妙有)’라 한다. 强한 否定으로
大肯定이 되어 “산은 산이 아니었던 것이, 산은 역시 산이다”와 같은 식으로 되는 것이라 본다.
이처럼 存在 그 自體를 진여(眞如, 진실로 같다), 여여(如如, 같고도 같다), 여실(如實, 진실로 있는 그대로 이다)로 表現하는데 이 것을 실상(實相)이라 한다. 따라서 모든 法의 實相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이를 다른 말로 법성(法性)이라 한다. 그런데 性稟 ‘성(性)’자가 들어 가면 中國式 불교의 典形이라 는 것이다.
印度佛敎에서 使用된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의 경우 ‘장(藏)’자는 부처가 될 ‘可能性’을 말하지만, 중국불교에서 말하는 佛性에서의 性稟은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런 부분이 중국인들의 現實主義的 性向이 强하게 반영 된 것으로 본다.
그런 性稟이 事物에 드러나면 ‘법성(法性)’이 되고, 人間에게 드러나면 ‘불성(佛性)’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들 性稟이 ‘人格化’ 되면 무엇이라 부를까.
<일어 나는 모든 것을 ‘주시(注視)"하는 者>
일반적으로 大乘佛敎에서 法性이 人格化 된 것을 ‘법신(法身)’으로 본다. 산스크리트어로 이를 ‘바이로차나(Vairocana)’라 한다. 法寶宗刹인 海印寺에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 데 그 부처님이 法身佛인 것이다. 그렇다면 佛性이 人格化 된 것은 무엇일까. 그 것은 아마도 ‘진아(眞我)’일 것이다.
진짜 나라는 의미의 眞我를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 하면 ‘참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일까 불교방송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에서 佛性과 참나에 대한 낭송문을 보면 어떻게 人格化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 중 참나에 관한 낭송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慈悲로 지켜 보는 ‘意識’이 있으니
恒常 거기에 있어 왔고,
언제나 現存 하는 것이 참나이다.
그 것은 몸도 아니고, 生覺도 아니고,
感情도 아니고, 對相도 아니고,
世上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참나는 永遠히 現存하여 보는 者이고,
일어 나는 모든 것을 ‘注視’ 하는 者이고,
.
.
(bbs불교방송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 正牧스님의 낭송문)
바이욘(Bayon)
캄보디아의 유적.
보살 로케스바라가 자비로운 미소로 내려다 보고 있다.
The face of the Bodhisattva Lokesvara looks
with a benevolent smile.
출처 : http://www.tropicalisland.de/cambodia.html
bbs불교방송에서 正牧스님이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낭송하던 ‘참나’에 대한 것이다.
佛性의 다른 이름인 참나는 항상 거기에 있어 왔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이고, 그 참나는 그렇다고
해서 몸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참나는
영원히 존재하며, 늘 우리의 일상을 ‘지켜 보는 이’라 말한다.
空思想이 '참나'로
‘恒常 지켜 보는 이’는 地域이나 民族 또는 文化에 따라 하느님, 비로자나, 야훼, 알라, 창조주, 장군님, 동자님, 한 물건, 그 분, 주님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워 질 것이다. 그 중에 ‘觀自在菩薩(觀世音菩薩)’도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觀自在菩薩의 산스크리트어 명칭이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인데, 영문판 위키피디아의 해설(Avalokitesvara, http://en.wikipedia.org/wiki/Avalokite%C5%9Bvara)에 따르면, 에스바라(esvara)라는 말은 ‘世上을 注視하는 主人님(lord who gazes down at the world)’이라는 뜻이 되어, 原因 없이 存在 하는 存在 그 自體가 人格化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로 世上이라는 ‘로케(loke)’와 注視하는 主人님이라는 뜻의 ‘에스바라(esvara)’가 결합되면 ‘로케스바라(lokesvara)’가 되는데, 이는 ‘世上을 注視 하는 主님’이 된다. 정목스님이 방송에 낭송 하였던 참나가 ‘永遠히 現存하여 보는 者’이고, 또 ‘일어 나는 모든 것을 注視 하는 者’로 표현 한 것을 보면 로케스바라와 크게 다르지 않게 여겨진다. 이처럼 空思想이 發展 되어 放送에서 급기야 이 世上에서 일어 나는 모든 것을 注視하는 참나(佛性)에게 경배하자는 방송이 되기에 이르렀다.
선사들은 왜 자신의 이야기만 할까
한국의 大乘佛敎에 있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 자리는 별로 없다. 代身 그 자리에
觀世音菩薩이나 佛性등이 차지 하고 있어서 부처님의 根本 가르침 自體는 보이지 않는다.
無門關45칙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석가도 미륵도 그 분의 종이고, 더구나 부처님은 물론 부처님의 제자들도 몰랐다는 一相圓(동그라미)앞에 부처님의 根本 가르침은 通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까 선사들은 한 물건과 일상원(동그라미)에 대하여 갖가지 해석을 가한다. 대표적으로 월호스님을
들 수 있다. 禪學博士로 잘 알려져 있는 월호스님은 불교tv의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한 물건이라는 것이 이름을 지을 수 없고 모양을 그릴 수 없기 때문에, 逆說的으로
어떠한 이름을 붙일 수 있고 또 어떠한 모양으로 그릴 수도 있다. 따라서
눈앞에 드러난 現象界가 모두 佛性이고, 내 몸뚱아리를 포함하여 全 宇宙가 ‘본마음’ ‘참나’ 에서 나온다
(월호스님의 생활법문 <행복창조>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1&PID=P597)
아마도 이 말이 현재 한국불교의 선사들이 하는 법문의 내용을 이해 하는 데 있어서 核心을 짚어
주는 말이라 볼 수 있다. 禪師들이 經典에 根據하여 法門하기 보다 왜 自身의 이야기 위주의 법문을 하는 지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大乘佛敎에서는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깨달은자가 이야기 하면 모두 ‘불설(佛說)’이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일까 大乘佛敎에서는 大乘論師들이
수 많은 大乘經典을 편찬 하였고, 중국에서는 중국인들의 현실중시 사상에 맞는 수 많은 僞經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그런 傳統은 선사들의 법문에서 좀처럼 經典의 文句를 引用함이 없이 自身의
이야기위주의 법문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부처님이 說한 8萬4千 法門에 根據하여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더구나
석가나 미륵도 그 분의 종이고, 석가도 모르고 석가의 제자도 몰랐던 그 동그라미기에 더욱 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의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지 모른다.
그 '한 물건'이라는 것이 이름을 지을 수 없고, 모양도 그릴 수 없다면 逆說的으로 그 '한 물건'을 본 사람은 어떠한 이름도 붙일 수 있고, 어떠한 모양도 그릴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 월호스님의 말이다. 왜 韓國의 선사들이 거리낌 없이 無碍行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 보다 自身의 이야기를 하고, 부처님 보다 佛性을 경배하고 오로지 마음에 對해서만 이야기 할까.
선사들이 말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마음 萬能主義
韓國佛敎에서 선사들은 例外 없이 마음에 대하여 한 마디씩 한다. 법문에서 업과 마음을 빼 놓으면 법문이 성립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불교에서 있어서 마음은 약방의 감초이자 만병통치약과 같다. 좋지 않게 이야기 하면 업타령과 마음타령을 하다 보면 주어진 법문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런 마음은 恒常 ‘一切唯心造’로서의 마음이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또한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 萬能主義는 두가지 마음으로 분류 된다. 하나는 佛性과 같은 純粹하고 原來 부터 있었던 存在 그 自體로서의 마음이고, 또 하나는 汚染된 마음이다. 原來 하나이었던 마음이 汚染됨에 따라 世世生生 輪回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한 生覺 일으키면 煩惱이고 妄念이라고 말한다.
煩惱와 妄念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恒狀 三昧에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現實은 눈을 뜨는 瞬間
形象을 取하게 되고 온 갖 煩惱 妄念이 떠 오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무념(無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現實을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說得力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한 生覺을 일으키는 것일까.
한 生覺을 일으킨다거나 마음을 쉰다거나 하는 것은 마음이 내 것이라고 生覺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生覺하기 때문에 ‘마음 萬能主義’가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진짜 내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마음은 내 것일까
삶을 살아 가면서 三昧에 들지 않는 한 여섯가지 感覺器管은 恒常 여섯가지 感覺 對相에 부딪치게
되어 있다. 그 過程에서 마음이 생겨 나는 것이다. 마음은 결코 저절로 생겨 나지 않는다.
또 生覺을 일부러 만들어 마음을 일으킬 수도 없다.
마음은 반드시 對相이 있어야 發生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初期佛敎의 觀点이다.
따라서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마음 萬能主義를 主張하는 마하야나와 크게 다르다.
그렇다면 마음 萬能主義는 왜 생겨난 것일까?
그 것은 이 世上과 自我가 永遠하다는 상견(常見)에 바탕에 둔다고 볼 수 있다.
常見이 일어나는 原因은 自我가 있다는 生覺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내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진짜 그럴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永遠한 自我가 있다면 몸이 病들지도 않을 것이고,
肉身에게 이렇게 되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22 칸다, 상윳따 니까야 59, 마하왁가 1편)
부처님이 설한 5부 니까야 中에 가장 고층(高層)에 속한다는 상윳따니까야에 나와 있는 말이다.
만일 永遠한 自我가 있다면 내몸과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불면증에 걸려 잠이 오지 않을 때 몸과 마음이 내 것이라면 잠이 와야 할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이 몸이 진정 내것 이라면 죽음도 극복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行爲를 하기 위한 意圖 마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境遇가 있다.
도둑놈이 도둑질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둑질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몸과 마음이 自身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것일까.
‘條件 發生’으로 본다. 도둑질을 하는 것도 ‘蓄積된 性向’에 起因한다.
지은 業대로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自身의 지은 潛在性向과 蓄積된 性向등의 條件이 맞았을 때
한 生覺이 일어나 行動에 옮기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몸도 내 것이 아니고, 느낌도 내것이 아니고, 知覺, 形成, 意識도 내것이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즉, 色受想行識이 내 것이 아니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感動的인 法門은
오늘 날 韓國佛敎에는 두 가지 불교가 공존하고 있다. 기존의 마하야나와 최근 도입된 初期佛敎이다. 그런데 그 가르침의 內容을 보면 너무 相反된 것이라 불자들은 커다란 混亂을 느낀다.
한 편에서는 法身常住와 悉有佛性, 상(常), 락(樂), 아(我)를 이야기 하고,
또 한 편에서는 無常, 苦, 無我와 涅槃을 이야기 한다.
한 편에서는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마음 萬能主義’를 이야기하고, 또 한 편에서는 그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고 一時的인 條件에 따라 發生하는 마음으로 보고
마음집중과 마음챙김, 알아차림을 강조 한다. 이런 혼란은 시간이 지나면 수습 될 것으로 본다.
불자들이 많이 알고, 많이 깨우치게 되었을 때 自然스럽게 받아들이는 쪽이 主流를 차지 하게 될
것이다.
禪師들의 法門은 그다지 感動을 주지 못 한다. 법문을 들음으로 因하여 마음의 變化를 일으켜 이
世上을 새롭게 보는 眼目이 생길 정도의 법문이라기 보다 하나의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에 가깝다. “한 生覺 일어나면 煩惱고 妄想이다”라거나 “당신과 내안의 神性한 빛, 거룩한 佛性 앞에 경배 올립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 것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 印度佛敎의 論理와 부처님의 根本 가르침을 理解 하지 못한 데서 發生된 것으로 보여진다. 代表的으로 “옛 부처님 나기 前에 의젓한 동그라미, 석가도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傳하랴”라는 直指心經의 文句는 부처님이 동그라미를 선사들 보다 몰라서 만들어진 문구라기 보다, 오히려 선사들이 부처님의 根本 가르침을 몰라서 나온 문구로 보여 진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을 接하면 마음이 革命的으로 바뀔 수 있다.
初期佛敎 經典에서도 “무엇이든지 生긴 것은 모두 消滅한다”와 같은 부처님의 法門을 듣고,
“티끌 없는 眞理의 눈이 열렸다”든가 하는 場面을 많이 보게 된다.
또 無常하고 수시로 變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認識하며
無常, 苦, 無我의 洞察智가 열렸을 때 “더 以上 執着하지 않게 되어 欲望과 解脫하게 되었다”라는 初期經典의 文句를 많이 接한다. 그럴 경우 初期佛敎 經典에서 다음과 같은 ‘정형구’를 볼 수 있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 하지 않는다.”
이 것은 存在에 對한 渴愛와 非存在에 對한 渴愛를 극복한 것이다. 이 世上과 自我는 永遠한 것이라는 存在에 對한 渴愛가 남아 있다면 永遠에 對한 執着을 할 것이고, 反面에 非存在에 대한 渴愛는
죽으면 끝이라는 斷滅에 對한 執着을 할 것이다. 이 모두가 自我를 基盤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무더기의 모임으로 보고 단지 나라는 것이 五蘊의 ‘相互作用’ 내지 ‘條件 發生’으로 본다면 常見과 斷見에 執着할 必要가 없다. 단지 있는 現象을 있는 그대로 보면 되기 때문이다. 現象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여실지견(如實之見, Yathā-bhūta-ñāna)’이라 한다.
그러나 大乘에서 말하는 ‘여실(如實)’은 初期佛敎와 다르다. 大乘에서 말하는 如實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여여(如如), 진여(眞如)와 같은 것이어서 “眞實로 있는 그대로이다”라는 뜻이다. 이 如實은 ‘諸法實相’과 같은 것이고, 結局 ‘法性’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現象을 存在 그 自體로 보기 때문에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初期佛敎에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形成된 모든 것들은 變하기 때문에 무상(無常)하고 슬프고(苦) 실체가 없는 것(無我)이라는 것을 洞察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보았을 때 모든 苦痛에서 解放될 수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바로 이런 法門이 感動스런 法門이 아닐까.
201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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