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명상이란 의식이 담고있는 내용물을 비워버리는 것이다

장백산-1 2012. 1. 17. 19:10

 

[스크랩] 명상(冥想)이란 의식이 담고 있는 내용물을 비워 내는 것이다 - 크리슈나무르티|크리슈나무르티
신성합일(평화) | | 조회 11 |추천 0 | 2011.10.14. 19:09 http://cafe.daum.net/Hope21C/mqwe/6

 

<명상이란 의식이 담고 있는

내용물을 비워 내는 것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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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상(冥想)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명상의 방법이나 수행, 또는 어떤 특정한 체계에 따른 명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보다는 冥想 그 自體가 重要한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명상의 의미와 필요성과 중요성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는 동양적인 유형의 명상 속에 포함된 모든 특별한 것들을 비롯한 모든 제도와 방법과 구루를 내던져도 무방하다.


 혼자의 힘으로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심리학자들이나 철학자들, 구루들의 이론과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전체적인 본성과 움직임을 깊이 탐구하고 자신이 정말로 무엇인가를 보는 것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구조에 일대 변형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근본적이고 깊이 있게 그러한 변형내지 대치를 가져올 때 그 변형은 그 사람의 意識  全體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며, 실체적인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현재의 세계와 혼란, 불확실성, 불행 및 수많은 종교와 민족의 분열, 그리고 민족 등과 같은 대의명분을 걸고 이루어지는 수많은 전쟁과 군비증강, 전쟁 준비를 위한 막대한 경비 지출 등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근본적인 변형을 가져오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自由가 있어야 하며, 이 自由는 그 사람의 意識이 담고있는 모든 內容物로부터 벗어나는 그러한 自由이다. 이러한 自由가 필요한 理由는 意識의 內容物이란 思考에 의해서 結合된 모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意識의 內容으로부터의 自由, 분노와 야만성으로부터의 自由, 허영과 교만으로부터의 自由, 그리하여 結局 自身을 붙들고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얻어지는 自由가 곧 冥想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바로 그 행위야말로 변형의 시작인 것이다. 명상은 모든 투쟁과 갈등을 內部的으로, 그리고 그 結果로 外部的으로도 終結 시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事實上 內部나 外部와 같은 區別은 存在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밀물과 썰물이 있게 마련인 바다와 같은 것이다.

 

 자신이 과연 실제로 무엇인가를 밝혀가는 과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관찰자(자아)는 과연 자신이 관찰하는 것과 다른 것인가?

나는 분노하고 있고, 탐욕스러우며, 난폭하다.

그런데 그러한 내가 분노, 탐욕, 폭력 자체인 관찰되는 대상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말 다른 것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내가 분노를 터뜨렸을 때, 분노한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분노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분노는 바로 나이며, 따라서 관찰자는 곧 피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구분이 완전히 배제된다. 관찰자는 곧 피관찰자이며, 그리하여 갈등은 이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명상은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모든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갈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즉 심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관찰자는 관찰되는 대상과 다르지 않다. 분노가 있을 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히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사고가 ‘나’를 만들어 내면, "나는 화가 나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분노와 화를 내서는 안 되는 ‘나’가 존재한다. 바로 그러한 구분이 갈등을 초래한다. 관찰자와 피관찰자 사이에 아무런 구분도 존재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오직 분노만이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분노가 계속 되는가? 아니면 분노가 완전히 종식 되는가? 분노가 발생하여 아무런 관찰자나 구분도 없을 때 그 분노는 활활 타오르다가 사라지게 된다. 마치 피고 지고 시들어 버리는 한 송이 꽃처럼. 그러나 그 분노와 싸우고 있거나, 저항하거나, 합리화하려고 하는 한 그것은 분노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관찰자가 곧 관찰되는 대상일 때, 분노는 활짝 피어 절정에 달했다가 저절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는 이제 그 어떠한 심리적 갈등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行動에 의해서 살아간다. 그것은 특정한 동기에 따르거나, 이상에 따르거나, 아니면 전통과 관습에 따른 것이다. 명상 상태에 들어가 있는 마음은 행동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인생에 있어서 주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갈등이며, 그 갈등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강박적 행동이 일어난다. 갈등을 종결 시켜서 강박적 행동을 끝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사람은 건전하고 건강하며, 신념이나 공포 같은 것에 얽매여 있지 않은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어떻게 行動할 것인가? 즉 어떠한 원리에 따라서, 어떠한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행동할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記憶으로부터 行動한다. 記憶은 일정한 類形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習慣化 되고 만다. 사람들은 즐겁게 기억된 것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로 마음억었던 理想에 따라 행동한다. 行動에는 多樣한 類形이 있으며, 그 各各은 모두 不完全하며 分裂되어 있다. 그 어떤 것도 神性하지 않다. “나는 사업가이며, 가정에 가면 자녀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업 상의 문제라면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오직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유명한 화가일 수도 있다. “비록 뛰어난 재능을 갖춘 화가지만 내 삶은 허울 뿐이다. 탐욕스럽고 사악하며, 돈과 지위와 인정과 명성만을 바랄 뿐이다.”

 

 사람의 갖가지 行動들은 제각기 나뉘어져 있다.

단편적인 행동이 존재할 때 그 행동은 필연적으로 심리적인 갈등을 가져오게 된다.

갈등도 없고 실패와 후회와 좌절감도 없는 행동이 있는가?

또한 전체적이고 조화로우며 완전한 행동이 있는가?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행동이 있는가?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모순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것을 意識하게끔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을 완벽하게 意識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만일 내가 상호 모순된 행동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이 나에게 “그것을 意識하라.”고 말한다면, 나는 “도대체 意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대답할 것이다. 選澤을 할 때는 意識한다는 것이 不可能해진다. 다시 말해서 “나는 저러한 특수한 행동이 좋으니까 저것을 계속 지키고 싶다 제발 다른 행동은 피하게 해달라”고 말할 때 알아차림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결코 意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만족스럽고 좋은 보답이 있을 것 같은 特定한 行動을 選澤하고 있는 것이다. 選澤이 있는 곳에서는 결코 完全한 알아차림이란 存在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완전히 의식 했다면 이제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끊어짐도 없는 지속적인 행동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건전한 마음을 갖는 것인데 그 어떠한 형태의 신념이나 도그마 내지 이상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명쾌하고 직접적이고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명상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행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명상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모든 期存의 知識을 던져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탐구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권위로부터 자유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조사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집중? 주의력? 알아차림? 사람이 집중을 할 때 당신의 모든 에너지는 특정한 어떤 것에 맞추어진다. 그리고 중간에 끼여드는 모든 생각들을 거부하고 밀어낸다. 結局 集中 속에는 去否와 抵抗이 存在한다. 그러나 思考를 意識하는 데 있어서는 집중이 존재하지 않는다. 알아차림 속에는 어떤 사고를 좋아할 것인가 따위의 선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알아차림에서 는 關心(주의, attention)이 나타난다. 關心에는 주의를 기울이는 기준이 되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반드시 이해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며, 冥想의 本質이다.

 

集中에는 어떤 관념이나 이미지에 근거한 集中의 中心이 存在한다. 사람들은 집중 속에서 벽을 쌓고 저항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다른 어떠한 것들도 들어올 수 없으며, 따라서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思考의 알아차림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모순이 없으며, 어떤 사고에 대한 저항도 없는 것이다. 그로부터 알아차림이 나타난다. 자신의 사고가 움직이는 모든 형태의 운동에 대한 알아차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알아차림으로부터 關心이 싹튼다. 진정으로 무엇인가에 關心을 기울이고 있을 때, 그 자리에는 이미 나와 같은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關心(주의)을 기울이면서 당신은 모든 복잡한 사고와 공포, 고뇌, 절망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이 기초인 것이다. 사람은 意識 속에 담긴 內容物이 비워지면서 解放이 된다. 그러므로 명상은 의식이 담고있는 내용물을 비워내는 것이다. 모든 알맹이를 비워내는 것이야말로 명상의 의미이자 심도이다. 그리하여 思考는 이제 終言을 고하게 된다.

 

 冥想은 關心(주의)이며 그 關心 속에는 아무런 登錄物도 存在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두뇌는 모든 것, 즉 사용되고있는 무수한 말들과 소음까지도 등록시키고 있다. 마치 녹음 테이프 처럼, 그런데 이제 두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이외의 것을 등록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왜 나는 모욕을 등록해야 하나? 어째서, 왜 나는 아첨을 등록해야 하는가? 그건 전혀 불필요한데도. 왜 나는 상처를 등록해야 하나? 필요도 없는데.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만을 등록시키고 다른 것은 등록 시키지 말라. 명상에는 심리적으로 볼 때 등록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살아가고 사무실에 출근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등의 實踐的인 事實들 以外에는 아무것도 전혀 登錄되어 있지 않다. 그로부터 완전한 침묵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사고가 이미 종식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경우에만 제 기능을 발휘할 따름이다. 시간도 종식되었기 때문에 이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운동이 존재하게 된다. 침묵 속에서.

 

 그때, 宗敎는 全的으로 다른 意味를 갖게 된다. 그 以前에는 宗敎란 思考의 問題였던 것이다. 思考는 수많은 宗敎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각각의 종교는 분열되었으며, 그러한 분열 하나하나마다 또다시 다수의 하위 분열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다른 세계에서 지내고 싶은 욕망과 희망 공포 신념 등을 포함하여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것은 思考의 結果이다.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안전을 찾고자 하거나 희망하거나 두려워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思考의 運動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물질적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宗敎인가? 신성한 것을 찾아내고 성스러운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시켜서 행하는 탐구가 곧 종교인 것이다. 그것은 온갖 시끄러운 온갖 사고로부터의 자유가 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내면의 시간과 사고를 종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가지고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세계 속에서의 지식을 종결시키는 것은 아니다. 신성하고 성스럽고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뇌가 사고를 사고 자체의 적절한 위치에 놓아 두었을 때, 그리고 완전한 침묵이 존재할 때에만 존재가 가능하다. 그처럼 거대한 침묵으로부터 신성한 것의 존재가 자리를 잡게 된다.

 

 沈默은 空間을 要求한다. 그 공간은 의식 전체 구조 속에 존재하고 있다. 사람의 의식 그 자체의 구조 속에는 아무런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공포와 쓸데없는 지껄임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침묵이 존재할 때, 시간을 초월한 공간이 자리잡게 된다. 오직 그때라야만 영원하고 신성한 것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출처 : J. Krishnamurti / "시간도 없는 공간 속에서" 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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