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지혜의 해가 心天(마음의 하늘)에 솟아오른다

장백산-1 2012. 6. 17. 12:20

 

 

 

지혜의 해(智日)가 心天에 솟아오른다

1

<문>
법정님의 한없는 자비에 가슴벅참을 느끼며 실상을 바로 보려 합니다.
하지만 이 둔한 제자는 죽지 못하고 늘 제그림에 속아 놓쳐버립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께 완전히 귀의할 수 있겠습니까?


<답>
진리(眞理)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은 본래 스스로 圓滿하건만, 사람들이 굴리는

생각이나 말은 그 자체가 치우침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또렷또렷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인데, 따라서 범부의 지견(知見)은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모두가

<그렇고> <그렇지 않음>으로 나뉘지 않습니까? 이제 <그러함>(是)과 <그렇지

않음>(非)을 '하나'로 가지런히 껴잡아서 表現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 이것이

바로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여실상(如實相)인 겁니다. 따라서 圓覺經에 이르길,

「변론(辯論)할 수 있는 것은 원각(圓覺)이 아니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중생심의 진여(眞如)를 깨달아서 '부처'인데, 그런데 진여법성(眞如法性)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이니, 결국 부처는 <구경의 깨달음>(究竟覺)을 증득

하는 이가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걸음걸음마다 구경(究竟) 아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현(先賢)들도 이르기를, 「<있는 그대로>이면 빠르거니와, 조작하면

더디니라」했던 것이니, 요약컨대, 원기인(圓機人)은 그저 生覺에 즉하여 生覺이

없을 뿐이며, 現在에 있어서 生覺生覺에 머묾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현재불

(現在佛)인 겁니다.

 

그저 온갖 반연(攀緣)을 문득 쉬고,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하세요.

그러면 마음의 하늘에 저절로 <지혜의 해>(智日)가 뜰 것입니다.


-현정선원 법정님의 법문-

 

2

 

<문>
정녕 諸行無常, 諸法無我인 체로 지금 그대로 옳습니까?
무엇을 왜 어떻게 해야 할 지 헷갈립니다.

 

<답>
<지음 없는 보광명지>(無作普光明智)는

<神靈한 性品>(靈性)의 <작용 없는 작용>이라, 해와 달의 勢力을 빌리지 않습니다.

요컨대, 저 太陽의 밝음조차도

'靈性'에 依持하지 않으면 결코 스스로는 '밝음'이 될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 世上을 다만 '밝음'과 '어둠' 만으로 녹여내려 해선 아니 됩니다.

 

지혜광명(智慧光明)이 드러나서 무명(無明)이 사라지면, 비록 面前에 산하대지

(山河大地)가 또렷또렷해도 티끌 만한 한 法도 볼 것이 없는 게 곧 제법실상(諸法

實相)입니다. 따라서 미혹하면 '마음'을 가리켜 '物件'이라고 하지만,

깨달으면 이 世上이 온통 '마음'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사대(四大 : 一切萬有의 本質이 四大요)와

오온(五蘊 : 現前하는 心身兩面의 모든 現象의 總稱이 五蘊이다)이

本來  텅~빈 것이어서 무아(無我)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아'란 곧 이 <나>를 포함한 一切存在는 이것이 因緣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자체성(自體性)이 없는 것이어서,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實다움이 없다는 뜻이니,

이것이 바로 인무아(人無我) 법무아(法無我)를 말하는 根據입니다.

結局 이에 이르면 <짓는 때>에 <짓는 자>도 <짓는 바>도 없는 것이니,

사람도 법도 다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는,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낱낱이 다 아닌 것이니,

이러히 現前하는 모든 法을 接하지도 않고, 取하지 않는다면 산하대지(山河

大地)가 다시 어디에 있겠습니까?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것이 嚴然한 眞實

입니다.

 

지금부터 약 100 년 전에 양자물리학자(量子物理學者)들이 순전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일체 만유의 기본질료(基本質料)인 '양자'(量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던 것이니,

이 밝고 맑은 시대를 사는 現代人으로서 더는 疑心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정선원 법정님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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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경님이 올린 법문---무진장/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