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참는 마음과 낮추는 마음

장백산-1 2012. 6. 17. 14:16

 

인욕(忍辱)과 하심(下心)

꿈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 하는
幸福과 不幸은 實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現狀입니다.
이것을 分明히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능히 불행을 제어할 수 있고,
늘 복되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작은 행복에도 크게 感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幸福과 不幸의 實體가 무엇인지를 分明히 알지 못하는 迷惑한 衆生이
행복과 깨달음을 얻으려면 그에 合當한 行이 뒤따라야 합니다.
곧 힘들고 불행한 현실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忍辱行의 實踐이 꼭 必要합니다.
하여, 우리 불자들이 생활 속에서 수행하고 실천할 수 있는
忍辱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평생을 살다 보면
나의 뜻에 맞지 않는 逆境에 부딪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얼굴을 보기조차 싫은 미운 사람과도 만나야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많이 생기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거역할 때도 자주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원통한 일도 생깁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분노를 느끼고 슬픔과 배신감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때로는 시기심과 질투심을 느끼기도 하고, 증오가 커지면 살심을 품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때가 고비입니다. 辱됨을 참는 忍辱으로 잘 넘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라.
부처님께서 辱하신다면
배울 일이요 깨우쳐 볼 일이다
님께서 주시는 것이면
때림이나 꾸지람도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忍辱을 배웠노라.

이 두가지 육바라밀의 인욕송을 새기면서라도 辱됨을 참아야 합니다.
[선가귀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害롭게 하거든
마땅히 마음을 거두어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라
한번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온갖 障碍의 門이 한꺼번에 열리나니

有人來害 (유인래해)
當自攝心 (당자섭심)
勿生瞋恨 (물생진한)
一念瞋心起 (일념진심기)
百萬障門開 (백만장문개)

三毒 중의 하나인 瞋心이 무엇입니까? 바로 毒氣입니다.
사람이 짜증을 내거나 성을 내게 되면 속에서 毒氣가 일어나고,
그 毒氣가 온몸의 內臟으로 퍼지게 됩니다.
심하면 손발과 얼굴과 온몸이 붓는 경우도 있고 종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結局 그 毒氣에 누가 傷하고 누가 죽게 됩니까?
실로 우리가 성을 내게 되면 바로 그 瞬間에 칼처럼 날카로운 氣運이 튀어나와
남을 찌르고 나 自身도 찌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칼산지옥이 생겨나는 原因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성내는 마음(진심:瞋心)을 일으킬 때 온갖 障碍의 門이 한꺼번에 열린다’고
하신 까닭은, 한 生覺 성내는 마음이 울컥 치밀어 오를 때 온갖 災殃이
瞬息間에 덮쳐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부디 마음 단속을 잘하라는 뜻입니다.

 
또 옛 말씀에 “애써 닦고 기른 공덕림(功德林)을 瞋心의 불이 다 태운다”고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애써 쌓은 功德을 한 瞬間에 다 태워 없애 버리는 것은 瞋心입니다.
백일기도. 천일 기도 등을 통하여 아무리 열심히 닦고 기른 功德일지라도,
분노의 불길을 끄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없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고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찾아와 나의 自尊心과 感情을 건드리는
辱된 일들을 잘 받아 들이고 소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忍辱을 잘 하면 잘 할수록 삶이 平和로워지고 幸福해지기 때문입니다.
人生을 살다 보면 별별 일(事)들을 다 겪게 됩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나에게 찾아드는 것은 까닭 없이 찾아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고, 찾아 오게끔 되어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그 일이 나에게 찾아드는 것이요, 내가 당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因果의 法則입니다. 이 因緣의 法則을 잘 새겨,
감정이 솟구쳐 오르고 화가 치밀어 오를 때에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설 줄 알아야 합니다.
참고 넘어서면 감정이 식은 다음에 후회 없는 평온이 찾아들고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이런 까닭으로 불교에서는 마음을 물과 같이 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甘露水를 불러 일으켜 성냄의 불을 잠재우고
나아가 萬物을 살릴 수 있다면, 이것이 행복을 얻는 길이요 불자의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참을 줄 모르면 卍行 중 어떠한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卍行, 곧 幸福과 解脫을 얻는 方法은 萬 가지도 더 되지만,
참을 줄 모르면 그 중 어느 하나도 이룰 수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행복을 바라고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忍辱行을 익혀야 합니다.
忍辱은 능히 우리를 보호하는 갑옷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 忍辱의 갑옷을 입고 행복의 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갑시다.
忍辱할 줄 아는 자는 試鍊이 두렵지 않습니다.
참을줄 알면 成功할 수 있고 幸福해질 수 있습니다.
참을줄 아는 자만이 解脫의 고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은 어떠한 狀況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몽창국사(1225~1351)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忍辱을 되돌아 봅시다.
어느날 몽창국사께서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탔을 때,
잔뜩 술에 취한 사무라이 한 명이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승객들에게 난폭하게 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비척거릴 때마다 배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으므로,
사공을 비롯한 승객 모두가 크게 불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겁에 질려 어느 누구도 말리러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몽창국사가 사무라이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여보시오, 잠시만 앉아 있으시구려. 배가 너무 심하게 흔들려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다오.”
국사께서 점잖게 타일렀으나 사무라이는 벌컥 화를 내었습니다. “뭐야, 이 중놈은!”
그는 가지고 있던 쇠 부채로 몽창국사의 이마를 내리쳤고,
국사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국사를 시봉하던 두 승려는
사무라이를 처단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두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습니다.
두 승려는 무사 출신으로, 검술이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기에
그 사무라이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몽창국사는 두 승려를 말리며 말했습니다.
“이런 일로 너희의 마음이 움직인단 말이냐? 우리는 불도를 닦는 불제자이다.
그렇다면 뭔가 일반사람과는 다른 면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마음이 움직이면 곧 그르게 되느니라.
때리고 맞고 하는 이 모든 일이 한 바탕의 꿈을 꾸는 것뿐이니..”
이 일로 두 제자는 忍辱行이 무엇인지를 깊이있게 새기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국사의 이마에 상처까지 남겼던 사무라이는 술에서 깨어난 다음
잘못을 빌고 국사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면서,
‘과연 내가 몽창국사와 같은 경우를 당하였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한 번 生覺해 보십시오.

 
나아가 지금의 내 마음이 어떤 일에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를 뒤돌아 보고,
어떻게 忍辱을 해야 하는지를 정립해 보기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忍辱을 잘 할수 있는가?
忍辱行을 잘 實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下心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불자들을 대할 때마다 늘 下心하는 姿勢를 먼저 强調합니다.
나를 낮추는 下心은 스스로를 비워 스스로를 便安하게 만들어 줄뿐 아니라
남들도 便安하게 해주는 일이요, 부처님께서 가신 길을 한 걸음씩 좇아가는
요긴한 수행법입니다.

 

[금강경]에서는 “相이 없으면 부처요, 相이 있으면 중생이다.”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은 늘 相에 얽매입니다. 특히 ‘나라는 相인 아상(我相)’에 얽매입니다.
그야말로 아상이 강하기 때문에 하심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我相이 强하면 남을 돌아볼 줄 모릅니다. 我相이 强하면 나 中心으로 살 뿐
남을 配慮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無視하는 것에 대해 不快하게 生覺하거나
火를 내기에 앞서 내가 남을 無視하는 일은 없는지를 늘 점검하고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我相을 꺾는 下心을 지켜가야 합니다. 요즘 政治版이나 世上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뒤에서나 면전에서나 ‘이놈. 저놈’하며 함부로 험담을 퍼붓는 일이 多般事입니다.
왜 남을 무시하고 험담을 퍼붓는 것일까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 보다는 내가 잘났다’는 것입니다. 言語爆力을 쓰는 이와 같은 現狀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옛 어른의 말씀에,
“道가 높은 자는 마음을 더욱 겸손하게 쓰고, 벼슬이 높아질수록 恒常 뜻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福이란 두 손을 모아 비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自身을 낮추고 남을 尊重하는 사람에게로 向하는 것입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깔아뭉갤수록 我相은 점점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我相은 理解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잘났다. 나는 많이 안다.
나는 부자이다. 나는 높은 지위에 있다. 나는 너보다 낫다’고 하는
日常의 生覺들이 바로 我相입니다. 곧 너에 대한 나의 相對的인 優越感이 我相입니다.

따라서 我相의 山을 무너뜨리는 方法은 簡單합니다. 나의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저는 不足한 存在입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容恕해 주십시오.”이렇게 하면
我相은 무너집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수행법인 懺悔의 절을 통하여
我相의 山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단 일배를 하더라도 精誠으로 하는 절은
그만큼 價値있는 절이 됩니다. 살아 계시는 부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면 진짜 절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精誠과 恭敬의 마음으로 절을 하게 되면 我相의 山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절을 하다 보면 이 世上에 尊貴하지 않은 者가 없고 버릴 者도 없으며,
고맙지 않은 對相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마음을 담아 어떤 자세로 하느냐’에 따라,
단 한번의 절이 일만배의 절보다 더 가치 있는 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남보다 優越하다는 倨慢한 生覺과 相對를 無視하는 마음에서는 慈悲가 싹틀 수 없습니다.
自己를 낮추고 모든 人類와 宇宙 萬物에게 感謝하는 마음으로 하는 절은
그대로 수행의 절이 됩니다. 절은 自身을 限없이 낮추는 하심(下心)의 表現입니다.
재가 불자들이라면 물론 절에 계신 스님들처럼 용맹정진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매일 108배 등의 참회를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날 문득 향상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마침내는 一切 萬物을 平等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大慈悲心을 增得할 수 있게 됩니다.

중국 오대산은 무순보살님의 常住道量 입니다. 이 오대산에 있는
대부영추사라는 절에서는 매년 춘3월에 ‘만발공양 무차대회(萬鉢共養 無遮大會)’를 열었습니다.
승려나 속인, 남자 여자, 귀함과 천함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음식을 주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곧 먹는데 平等하여야 법에도 平等하다는 뜻에서
법회의 이름도 ‘만발공양 무차대회’라 하였던 것입니다. 이 무차대회에 한 거지여인이
두 아들과 개 한마리를 데리고 찾아 왔으나 문을 들어 설 수가 없었습니다.
행색이 초라한 데다 개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원주스님을 청하여 물었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만발공양 무차대회 법회가 있는 날입니다.”
“아, 이 거룩한 법회에 나도 공양을 올려야 할텐데...하지만 가진 것이 없으니,
저의 머리카락이라도 부처님께 올리겠습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잘라 원주스님의 들고 있는 쟁반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를 지켜본 대중들은 거지여인을 ‘보살’이라 稱頌하며 절 안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절 안에 들어온 개가 도량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볼일’을 보자,
대중들이 불쾌해 하며 개를 두드려 패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여인은 “볼 일 안보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며 오히려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공양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원주스님께 요구했습니다.
“나는 급한 볼 일이 있어 곧 가야 합니다. 먼저 밥을 주십시요.”
원주스님의 법회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여인과 두아들의 공양상 셋을 내어 왔습니다.
“개도 먹어야 하니 한상 더 주십시오.” 할수없이 한 상을 더 차려주었더니
여인은 또 요구했습니다. “뱃속에 아기가 있으니 한 상 더 주셔야겠습니다.”
感情이 爆發한 원주스님의 벌컥 화를 내었습니다.
“배 안의 것이 무슨 밥을 먹는다는 말인가? 그렇게 탐욕이 많으니 거지가 되었지.”
당돌한 여인의 돌출 행동을 보다 못한 대중들이
“냄새나는 머리카락보다 밥값이 더 들겠다.”며 소리치자,

여인은 “그럼 밥 안 먹고 머리카락을 다시 가져가겠다”며
아들을 시켜 머리카락이 담긴 쟁반을 가져오라 하였습니다.
아들이 머리카락을 가져와 여인의 머리에 대자, 머리카락은 原來대로 돌아갔습니다.
자르기 前의 모습대로 똑같이 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거지여인이 말했습니다.
“이 개를 패고 싶다고 하였는데, 남이 내 개를 패는것은 원치 않는다.
내가 직접 땅에다 팽개칠 터이니 잘 보아라.”
그리고는 개를 땅바닥에 내리 꽂자 개는 靑獅子로 變하였고,
하늘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떴습니다.

또 거지여인은 문수보살로, 두 아들은 하늘동자로 變身하여 청사자 등에 올라 타서

虛空으로 날아오르며 노래했습니다.

중생들이 平等을 배운다지만
境界따라 마음이 물결친다네
마침내는 온 몸을 버려서까지
미워하고 사랑하니 어찌하리오

대중들은 떠나가는 문수보살님을 향해 깊이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쟁반 위에 몇 올 남아 있던 머리카락을 精誠껏 모아 塔을 조성하였으며,
이 인연으로 절이름을 발탑사(髮塔寺)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머리카락 자르기 前에는 ‘거지 여자’였다가 자르고 나니 바로
‘보살’로 부르는 그 마음은 무엇인가? 문수보살께서는 만발공양을 통하여
밥과 떡과 과일만 잘 올렸지, 眞實로 重要한 마음 한자락은 어디에도 없음을 꼬집어
무차대회의 참뜻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分明히 깨달아야 합니다.
바깥의 境界를 좇아서 自己 나름대로의 生覺을 일으킨 다음,
그 生覺에 執着하여 온 몸을 버릴 때까지 매달리며 살아가는 ‘衆生의 마음’을
이제는 내려 놓아야 합니다. 下心을 해야 합니다.
忍辱! 우리는 참을 수 있는 것만 참아서는 안 됩니다.
忍辱이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도 참는 것입니다.
인욕의 갑옷을 입고 어떠한 逆境도 모욕도 능히 참아내어야 합니다.
어떠한 辱됨 속에서도 平常心을 잃지 않을만큼 넓은 마음으로 忍辱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일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懺悔의 절을 통하여 마음을 비우고 下心을 하여야만 眞情한 忍辱을 成就할 수 있습니다.
我相이 무너지고 下心이 잘 되면 모든 存在가 차츰 부처님으로 보이게 됩니다.
下心만 잘 되면 忍辱을 넘어서서 저절로 慈悲로워지고 저절로 幸福이 찾아들게 됩니다.
부디 下心과 忍辱을 通하여 慈悲를 實踐하는 幸福한 불자님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출처 : 법공양 5월호



 


      혜인 큰스님(단양 광덕사 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