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이제 반야심경의 본론, 즉 부정을 통한 空의 선양을 나타내는 파사분을 끝낼 때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붙잡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라는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는 바로 모든 부정의 논리인 파사분을 전체적으로 덮고 있는 가장 重要한 核心의 內容이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破邪分에서는 一切 現狀界의 存在인 五蘊, 十二處, 十八界를 否定하였고, 이어서 현상계의 照見을 通해 보았던 眞理의 모습인 사성제와 십이연기도 부정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또한, 結局에 가서는 이 모든 否定의 論理의 窮極的 모습인 智慧와 깨달음마저도 否定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없다’ 라고만 하는 것일까? 그 理由가 바로 이 部分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를 說하는 緣由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의 모두가 붙잡을 것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現狀界도 없으며, 眞理의 모습 또한 없고, 깨달음에 이르는 智慧와 깨달음 그 自體도 없다는 것은 一切를 붙잡고 求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르는 말인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 ‘無所得’이라는 것은, 般若心經의 意味上 核心을 이루는 單語입니다. ‘얻을 것이 없는’ 理由는 '一切가 空'이기 때문입니다.
'一切의 諸法이 空'이라는 것이야말로 반야심경에서 說하고자 하는 核心的인 內容인 것입니다. 本來 얻을 것이 없는 無所得인 空의 世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目的이 오직 ‘所得’에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生覺하는 삶의 幸福은 무언가를 얼마나 많이 얻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꾸준한 所得, 얻음의 연장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처럼 딱한 世上의 論理에 철저히 길들여져 왔습니다. 이 世上의 固定觀念, 偏見, 先入見에 사로잡혀 受動的인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現實인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냉정히 生覺을 돌이켜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方向은 과연 어떤 方向인가? 眞理를 追究하는 方向, 眞實을 追究하는 方向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當然한 우리의 소신(所信)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世界, 現實이 가지고 있는 眞實은 과연 무엇인가? 바로 공(空)입니다. 다시 말해, 緣起이며, 無自性이고, 無我입니다.
이러한 眞實에 걸맞는 生活 方式은 無執着이어야 하며, 無分別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般若心經』에서 强調하는 無所得의 삶이며, 無所有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거꾸로 살아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本來로 텅 비어 空이기에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世上에서 끊임없이 부여잡는 生活만을 고집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모든 것을 所有하는 方向으로 生을 이끌어 온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의 方向을 과감히 바꾸어야 할 때에 왔습니다. 眞實을 追求하는 方向으로, 眞理와 '하나'되는 삶의 모습으로 바꾸려는 큰 意識의 大轉換이 必要한 것입니다.
좀 더 自細히 말하면, 우리가 붙잡고 살아온 一切의 物質的, 意識的인 ‘내 것’의 觀念을 과감히 놓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다’하는 物質的인 所有觀念과 ‘내가 옳다’라는 意識的인 固定觀念을 과감히 비워버리는 삶으로의 大轉換인 것입니다.
비우고 놓았을 때 一切를 所有할 수 있으며, 비워버렸을 때 一切가 꽉 차서 ‘마하(摩訶/大)’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한 티끌 속에도 시방(十方)을 머금을 수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道理가 나오는 것입니다. 一切를 놓아버려야 한다는 ‘방하착(放下着)’이야말로 모든 實踐의 核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얻을 것이 없다는 無所得의 精神을 經典에 나타나는 경구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금강경』 제 2 권 제 1 사구계 제 26 법신비상분에,
만일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거나 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금강경』 종결 사구게 제 32 응화비진분에,
一切 하염 있는 法 [유위법(有爲法)]은 꿈・환영・물거품・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같이 觀할지어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 행림보살 찬불게에는,
만약 바른 생각으로 닦아 익혀 밝게 올바른 깨달음을 요달(了達)해 보면, 모양도 없고 분별도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법왕자(法王子)라 하리로다. (若修習正念 明了見正覺 無相無分別 是名法王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는 바로 一切의 모든 存在, 卽, 有爲法은 ‘꿈과 같고, 幻影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라는 말로써 一切의 어떠한 存在에도 執着하여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나아가 부처님, 卽, 涅槃 내지 깨달음에 對해서도 어떠한 相을 지으려 한다면 사도(邪道)를 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卽, 涅槃/부처님/깨달음에 對해서도 執着하여 求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無智亦無得’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습니다.
『금강경』 제 1 권 제 1 사구게 제 5 여리실견분에,
무릇 상이 있는 바는 다 허망함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卽, 一切의 모든 存在를 相이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虛妄한 것이며, 相을 깨고 모든 存在를 있는 그대로 보아 執着하지 않아 求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意味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一切의 모든 事實은 어디에도 어느것도 붙잡을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一切 萬有가 時間, 空間的으로 實際 存在한다는 相을 가지고 있고, 그러다 보니 스스로 지은 相으로 因해 執着을 하고, 分別心을 일으켜 온갖 괴로움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眞情으로 어떠한 것에도 執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空’이 가지는 實踐的 意味입니다.
여기까지가 本論格인 파사분(破邪分)입니다. ‘파사(破邪)’란, 말 그대로 ‘삿된 것을 깬다’는 말로서, 즉, 우리가 固定된 實體가 없는 모든 對相에 對해, 있는 것으로 錯覺하여 그것에 執着하는 삿된 所見을 打破하고자 하는 것을 意味합니다.
그러한 執着을 打破하기 위해 이 破邪分에서는 根本佛敎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敎說을 차례로 하나씩 否定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否定의 論理를 通해 本來 空한 世界를 드러내 주고 있는 部分이 바로 이 破邪分의 核心인 것입니다.
다음 章에 나오는 공능분(功能分)은, 以上에서 說한 『반야심경』의 공능(功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이상에서 설명한 가르침에 依하여 菩薩이 반야바라밀다에 依持했을 때 나타나는 공능(功能), 卽, 利益에 對하여 說하고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