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가는 대마다 본래 그자리, 이르는 데마다 본래 출발지

장백산-1 2013. 2. 8. 23:47

 

 

 

 

[스크랩] [화엄법문]

 

“가는 데마다 본래 자리, 이르는 데마다 출발지”|오늘의 법문,강설

 

관악
| 조회 22 |추천 0 |2011.12.12. 08:21 http://cafe.daum.net/cnubu/O0vV/216 
“가는 데마다 본래 자리, 이르는 데마다 출발지”

 行行本處 至至發處 

 


종범 스님, 월정사 ‘한암대종사 화엄산림’서 ‘화엄경’ 1~6품 法門


“깨닫고 보면, 한 걸음도 옮긴 적이 없습니다.

 가는 데마다 본래 자리요,

 이르는 데마다 출발지입니다.

그대로 華嚴廣佛 비로자나 부처님의 世界라는 것을 깨달으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華嚴 信仰의 骨髓입니다.”


월정사와 현대불교신문사가 3월 17일부터 총 6주간 공동 주최하는 ‘제2기 한암대종사 수행학림’에서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圓融의 눈으로 보면 깨달음이고, 二元으로 바라보면 分別이 된다”며 이 같이 法門했다.

3월 18일 월정사에서 열린 제2기 한암대종사 화엄산림에서 <화엄경>을 법문하고 있는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 사진=고영배 기자


종범 스님은 17일 수행학림 입제 다음날 월정사 大法輪殿에서 열린 ‘화엄산림’에서

“本來 圓融無碍한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 있지 않지만, 衆生들은 恒常 迷妄의 꿈을 꿔 온갖

苦痛을 스스로 만들어 받고 있다”며 “華嚴經에서 말하는

本來 고요(寂寂)하고 圓融한 法性의 世界를 단박에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특히 煩惱 妄想의 根本的인 原因을 ‘10전’ 비유를 들며, 華嚴의 核心 理致인

‘즉(則)’과 ‘중(中)’ 道理를 바로 알면 단번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1錢을 중시하느냐, 10錢을 강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가 곧 열이다’는 일즉십(一則十)과 ‘열 가운데 하나가 있다’는 십중일(十中一)의 道理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衆生은 自己를 사랑해달라는 欲望에서 삽니다. 그런 執着의 內面을 들여다보면, 自己 하나를 온 宇宙의 中心으로 보는 反面, 相對方은 全切 中에 하나로 봅니다.

‘則’과 ‘中’의 道理가 부딪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華嚴의 圓融에서 보면, 結局 이나 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스님은 또 일반인들을 위한 화엄 신앙법에 대해서도 말했다.
방대한 분량의 <화엄경>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 당부했다.

“新羅 義相 大師의 ‘법성게(法性偈)’와 ‘약찬게(略纂偈)’을 외고 독송하면 됩니다. 80권의 방대한 분량을 읽고 연구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略纂偈는 <화엄경>의 構成이 모두 드러나 있고 法性偈는 오로지 <화엄경>의 核心 內容과 思想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法性偈와 略纂偈를 외면 華嚴의 構成과 內容이 그대로 한 目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在家者들의 華嚴 신앙을 위해서는 日常에서 智慧를 啓發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自己를 觀察하고 들여다보는 觀照가 必要하다”고 助言했다.

 

다음은 종범 스님 法門 全文.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는 <法華經> 신앙이 주류였다. <법화경> 신앙은 석가모니불과 쌍탑(雙塔) 중심의 불탑신앙이 核心을 이룬다. 그래서 석가모니불 혼자 또는 좌우로 보현과 문수보살을 모신다. 탑은 주로 일탑(一塔)의 경우에 석가모니불, 이탑(二塔)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탑이다. 한 곳은 석가모니탑, 다보의 탑인데 대표적인 것이 佛國寺 塔들이다. 보통 탑이 두 개일 경우에는 모두 <法華經>의 신앙을 영향을 받는다. 이것이 雙塔 신앙이다.

종범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는 월정사 수행학림 참가자들.

사진=고영배 기자



그런데 처음에는 부처님을 모셔도 삼존불이 아니고, 두 분만 모신 경우가 있다. 이것이 <법화경> 신앙이다. 태안 마애삼존불의 경우가 그렇다. 양쪽에 부처님이 크게 모셔져 있고, 한 가운데에는 작은 보살상이 있다. 일반 불교미술학자들은 보살을 주불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나는 불교학논문집에 발표하기를, 태안 마애삼존불의 가운데의 조그마한 보살은 주불이 아니고, 공양하는 보살상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품’에서 “무진보살이 관세음보살에게 보배 구슬을 공양 올렸는데, 관세음보살이 공양 받고 반으로 나눈다. 하나는 석가모니불에게, 또 하나는 다보여래부처님에게 올린다”고 했다.
 
 
태안 마애불의 왼쪽 부처님은 구슬을 갖고, 가운데 보살상이 구슬을 갖고 있는데, 오른쪽 부처상에서는 구슬이 없다. 한쪽 부처님을 공양을 올리고, 나머지 부처님한테는 공양을 못 올린 것이다. 단지 조형상 예배를 올리는 보살상을 가운데에 표현됐을 뿐이다.
 
이는 보살이 오른쪽 부처님에게 공양하려고 있는 것이다. 근거는 <법화경> 관세음보살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랬더니 불교미술학회에서 처음 주장된 내용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동조도 반대도 없다. <법화경>에는 아미타불과 미륵보살이 많이 나온다.

그러다 800년이 넘어가면서 비로자나불이 보편화된다.

9세기를 분기점으로 <法華經> 신앙에서 <華嚴經> 신앙으로 轉換된다.

 
 
法華신앙과 華嚴 신앙의 근본적인 差異는 같은 석가모니불이라 해도,

法華신앙에서는 석가모니불은 어디까지나 사바세계에 있는 교주이다. 영산회상의 부처님이다.

 
하지만 華嚴 신앙에서는 100億 化身의 부처님이 석가모니불이다. 法華신앙에서는

사바세계의 교주이자 영축회상의 교주지만, 華嚴에서는 1000억 化身으로서의 석가모니불이다.

華嚴 신앙의 대표적인 것이 五大山 신앙이다.

가령 지장신앙은 밀교신앙이 되고, 아미타는 정토신앙, 관세음은 법화신앙,

아라한은 초기소승불교다. 종파불교 또는 初期佛敎의 眼目에서 보면 그렇다.

그런데 華嚴 신앙에서는 관세음보살도 비로자나불의 化身이고, 아미타불도 비로자나불의 化身으로서 아미타불이다. 아라한도 그렇다. 모든 것이 석가의 化現이다. 그 석가는 비로자나불의 석가다. 이렇게 된다. 그래서 華嚴 신앙을 理解해야 韓國佛敎의 特性을 理解할 수 있다.

이를 강조하고 싶다.

 

형태는 아미타불인데, 정토종 신앙의 아미타불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의 100億 化身 가운데에 한

아미타불이다. 형태는 아라한인데, 초기불교의 16아라한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의 化身으로서

아라한이다.

 

전형적인 모습이 오대산 신앙이다. 중대는 비로자나불을, 미타, 동쪽은 관음, 남쪽은 지장, 북쪽은 아라한이라고 했다. 이 華嚴 신앙에서 석가모니불이 단순히 영축산에 계신 부처님이 아니고,

1000百億 化身 석가모니불, 圓滿報身 노사나불, 淸淨法身 비로자나불 이 三佛이 圓融하다 해서

華嚴 신앙이다. 三佛이 圓融하다는 것은 비로자나불로서 부처님으로 본다는 것이다.

<화엄경> 강설을 하고 있는 종범 스님. 사진=고영배 기자


그래서 석가모니불(化身佛), 노사나불(報身佛), 비로자나불(法身佛)이 法身 報身 化身佛이다.

하나가 있는 곳에 셋이 다 있고(執一含三), 셋이 있는데 곳에 하나가 있는데(會三歸一),

이것이 ‘삼불원융(三佛圓融) 華嚴信仰’이다. 이 신앙이 깊게 들어가면 ‘십신(十信)’이 된다.

그래서 華嚴信仰을 ‘三佛圓融十信信仰’ 이라고 한다.

 
 
三佛이 圓融하고 十信이 無碍한 신앙 構造가 모든 意識에 基本을 이루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다.

그래서 아라한을 불상으로 모시는 것은 비로자나불의 化身으로서 아라한이고, 밀교신앙의 약사여래불도 비로자나불의 化身으로서 약사여래불이다.

이것이 三佛圓融, 十信無碍란 華嚴 신앙의 根本이 된다.

 
이런 신앙의 기반을 깔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이고, 華嚴 신앙을 조명하지 않고는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공부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화엄경> 또는 <화엄부>라고 한다. 이는 80권 60권 40권 등 권수별로 부를 때는

<화엄경>, 이를 합쳐 부를 때는 <화엄부>라 한다. 보통 80권 <화엄경>을 갖고 공부를 한다.

화엄학의 대가였던 중국 청량 징관선사가 편찬한 <신역화엄경칠처구회송석장(新譯華嚴經七處九會頌釋章)>에 따르면, 華嚴경의 방대함과 기본 골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화엄경은 권수가 80권이고, 게송만 4만5천개다.
7곳에서 9회의 법회를 열었고, 각 품과 장은 39이다.
차경팔십권(此經八十卷) 사만오천게(四萬五千偈)
칠처구회설(七處九會說) 삼십구품장(三十九品章)’

 
그럼, 일곱의 곳과 아홉 번의 法會를 연 곳은 어디인가? 처음 법회 연 곳은 보리수 밑이고, 2회는 보광전, 이후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타화천에서 법회를 봉행했으며, 7ㆍ8회는 다시 보광전에서 설법했다. 마지막은 印度 紀元精寺에서 했다. 초회보리장(初會菩提場) 이회보광전(二會普光殿) 삼회도리천(三會忉利天) 사회야마천(四會夜摩天) 오회도솔천(五會兜率天) 육회타화천(六會他化天) 칠팔중보광(七八重普光) 구회급고독(九會給孤獨) 등이 <화엄경>의 주요 구성 목차다.

 
흔히 7처를 말할 때는 지상 3처, 천상 7처라고 한다. 또 품수는 초회보리장 6품, 2회보광전 6품, 3회 도리천 6품, 4회 야마천 4품, 5회 도솔천 3품, 6회타화천 1품, 7회 보광전 11품, 8회 보광전 1품, 9회 급고독 1품 등이다. 이를 ‘7처 39품’이란 숫자가 나온다.

이후, 대중들을 위한 華嚴 신앙이 나온다. 이것이 義相 大師의 ‘법성게(法性偈)’와 ‘약찬게(略纂偈)’다. 80권의 방대한 분량을 읽고 연구한다는 것이 어려워 주로 약찬게를 외고 법성게를 독송한다. 가장 손쉬운 화엄경 공부다.

먼저 약찬게는 <화엄경>의 構成이 드러나 있다. 약찬의 ‘纂’은 ‘엮을 纂’ 이다. 품수와 등장 인물과 품수의 이름 등의 중요한 정보와 항목을 묶여 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思想이 없다.
 
 
反面 義相 스님의 法性偈를 보면, <화엄경>의 構成에 대한 말은 一切 없고 오로지 그 內容과 思想이 담겨있다. <화엄경>에서 설명하는 宇宙와 깨달음을 圖標로 構成한 것이 法性偈다. 그래서

法性偈를 ‘반시(盤詩)’라고 한다. 圖標와 그림이 함께 간다. 法性을 노래한 뜻이다.

 
 
法性偈는 순전히 華嚴의 內容만 말한 것이다. 약찬게는 그 構成을 말한다.

그래서 法性偈와 略纂偈를 외면 華嚴의 構成과 內容이 그대로 한 目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7언 30송 210자’도 된 法性偈의 구절을 살펴본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法性은 원융해 둘이 없고, 諸法은 움직임이 없서 寂滅相이다.
이름도 모양도 끊어져서 모두 없으니, 증득한 지혜로만 알 수 있다.’

그럼, 法性이 무엇인가? 온 宇宙 法界의 本性이다. 法性은 圓融해서 둘이 없다.

圓融은 始作이 바로 끝이고 끝이 곧 始作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圓融이다. 그래서 眞理에는 둘이 없다.

 
그런데 生覺에는 둘이 있다. 그래서 法性과 生覺이 들어맞으면 되는데, 맞지 않아 苦痛을 당한다. 人間의 모든 苦痛은 둘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 ‘어제는 그랬는데 오늘은 왜 그럴까?’

幸福과 不幸, 참과 거짓, 있고 없음 등으로 둘로 나눠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둘이 아니다. 圓融이다. 圓融性으로 보면 깨달음이고, 二元性으로 보면 分別이다. 分別은 둘로 갈라보게 한다. 모든 苦痛과 對立은 둘에서 오는 것이다. 둘로 나눠보면, 서로 對立할 수밖에 없다. 圓融에서 보면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이 된다. 그래서 좋은 것을 執着할 것도 못 되고, 나쁜 것을 싫어할 것도 못 된다.

이것이 法性圓融無二相이다.

 
그래서 諸法은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本來 고요하다.  

이런데 法性의 世界를 어떻게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그릴 수가 있는가?

人間은 智慧와 生覺이 있는데, 生覺은 恒常 둘로 보게 하는 屬性을 갖고 있다. 生覺이 곧 둘이다. 그런데 智慧로 보면, 本來 고요함과 圓融을 볼 수 있다. 이는 智慧로 느껴지는 世界다.

法性은 이름도 모양도 모두 없으니 證得한 智慧로만 말 할 수 있다.

 

 

問題는 ‘智慧와 生覺’이다.

智慧로 돌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生覺에 매이면 모든 고통이 생긴다.

人間에게 가장 重要한 것은 知識과 才能이 아니다.

 

 

요즘은 知識的 카리스마를 要求한다. 그런데 知識과 才能만으로 絶對 幸福할 수 없다.

그럼 어떤 사람이 幸福한가? 自己感情을 調節할 수 있는 사람이 幸福하다.

幸福과 不幸은 ‘自己感情을 스스로 다스리고 統制할 수 있는 能力이 얼마나 되는가’에 있다.

매우 重要한 問題다. 작은 感情을 다스리지 못해 모든 일을 한 瞬間에 亡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 感情의 性格은 무엇인가? 自己를 사랑하는 것이다.

 

 10개를 보는 觀点이 있다. 1전을 중시하느냐 10전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全切로 보면 10전도 1전에 依해 생긴다. 問題는 1 또는 10 어디에다 中心을 두느냐다.

 

 

이것이 ‘즉(則)’과 ‘중(中)’이다.

則은 일즉십(一則十), ‘하나가 곧 열이다’는 觀点이고,

中은 십중일(十中一), ‘열 가운데 하나가 있다’는 觀点이다.

같은 하나인데, 이 하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가 곧 열이라는 것과, 하나는 全切 중에 하나일 뿐이란 觀点이다.

 

 

그런데 感情은 自己를 사랑하는 努力이기에, 自己 나 하나를 모두 宇宙로 보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사람도 宇宙도 없다는 生覺이다.

反面 다른 사람을 볼 때는 그 사람들을 全切 中에 하나로 본다. 이것이 서로 부딪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과 다른 이가 나를 보는 데에서 엄청난 差異가 있다.

 

 

그런데 사람은 다른 사람보고 나를 나와 같이 사랑해달라는 要求를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그 理由는 사랑받고자 하는 努力 때문이다.

싸움도 사랑해달라는 要求다. 相對方을 괴롭히는 것도 自己를 사랑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방법이 틀렸다. 고함치는 것도 나를 사랑해달라는 것이다. 폭력 행사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왜 사랑을 요구하는가? 自己가 보면, 自己가 모든 것이다. 一卽十이다. 이 세상에 自己

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은 왜 나를 나처럼 봐주지 않는가. 卽 十中二의 視角이 부딪치는 것이다.

人間은 基本的 本能的으로 自己한테 關心을 가져달라고, 사랑해달라고 그런 欲求를 갖고 있다.

이것이 感情이다. 感情은 둘로 보는데서 온다. 나와 나 아닌 것, 卽 本來 고요하다는 法性은

圓融하다는 智慧가 없는 것이다. 나와 나 아닌 것, 삶과 죽음 등으로 둘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

 

 

 

나와 나 아닌 것이 보여 지니, 철저히 나를 保護하려고 하고, 그래서 모든 이에게 關心을 갖게 하기 위해서 火내고 苦痛을 받는다. ‘왜 火내는지도 모른다’는 말도 ‘모두 나를 왜 사랑해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이치다. 마음의 根本을 알아야 한다.

 

人間은 모두 自己 사랑을 위해 表現한다는 것은, 理解하고 감싸주면, 그대로 그 마음이 녹아든다는 意味이다. 자기주장, 자기 의견, 자기표현은 옳지 않다. 問題는 사랑받을 짓을 모른다는 것이다.

衆生의 輪回 世界가 이렇다.

보령 성주사지 만해무념 국사 화상 비문에 “이 몸에는 主人도 스승도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럼 몸의 주인(身主)은 무엇인가? 마음이다. 그럼 마음의 스승(心師)은 무엇인가? 몸이다.

몸이 공경하면 마음이 따라서 공경하고, 몸이 근면하면 마음도 따라서 부지런해진다는 이치다.

 

 

마음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화엄과 연관된 수행가풍이다.

마음의 主人을 重視하고, 몸의 스승을 輕視하는 家風이 있는데, 한암 스님의 가풍은 그렇지 않다. 몸을 마음의 스승으로 봤다. 그래서 전쟁 통에서도 좌정하신 한암 스님의 수행이었다.

마음은 몸의 主人이자, 몸은 마음의 스승이란 말을 깨치면,

삶과 죽음의 境界도 간단히 解決된다고 본다.
法性揭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智慧의 無盡寶로 온 世界를 아름답게 莊嚴한다.
實際의 眞實한 중도상(本寂床과 圓融性)에 앉으면

예로부터 움직임이 없어 이름 그대로 부처이다.’

陀羅尼는 없는 것이 없이 다 있다는 뜻이다. 卽, 智慧다. 총지(總智)가 다라니다. 보배로 말하면, 쓰고 또 써도 줄지 않는 智慧보배라는 것이다. 智慧로써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일으키면 無盡보다도 얼마든지 사랑을 만들고 줄 수 있는데, 그것을 몰라서 自己도 남도 괴롭히는 것이다.

 

 

智慧로써 알고 보면, 恒常 圓融無碍한 中道床에 앉아 있다.

本來 圓融無碍한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 있지 않다.

다만 꿈을 꿔 온갖 苦痛을 받는 것이다. 꿈꾸는 사람이 苦痛에서 벗어나려면, 꿈을 깨면 된다.

그것 꿈을 깨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닫고 보면, 한 걸음도 옮긴 것이 없다. 그대로 부처다.

이것이 華嚴의 骨髓다.

이를 義相 스님이 法性偈를 설명한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권상1에서

‘행행본처 지지발처(行行本處 至至發處)’라 했다.

‘가는 데마다 本來 자리요, 이르는 데마다 出發地’라는 뜻이다.

智慧로운 사람은 恒常 本來자리 출발지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生覺에 사로잡혀 죽고 살 걱정으로 苦痛을 받는다. 가나 오나 本來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둘로 보는 生覺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집에 있다 해도 꿈을 꾸면, 자기 집인 줄 모른다. 꿈을 깨면 본래 자기 집임을 안다. 교학이든 철학이든 수행이든 <화엄경>은 엄청난 가르침이다.

 

 

오늘 강설한 부분은 <화엄경> 초회 6품에는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 보현삼매품(普賢三昧品)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 비로자나품(毘盧遮那品) 等이다.

 

 

 

그럼 이 부분의 내용은 무엇인가? <화엄경>은 석가모니부처님이 成佛했을 때의 光景을 說明한 것이 特徵이다. 다른 경전에는 이렇지 않다. 초회 6품은 부처님이 성불한 세계를 설명한다.

 

華嚴의 부처님을 어떻게 表現할까? 大方廣佛이고 한다.

 

 

大方廣佛은 부처님의 世界다.

 

元曉 스님 <화엄경서문>에서 “大方廣佛華嚴經은 法界가 끝이 없는 世界다. 法界는 智慧의 世界다. 人間이 지닌 智慧가 곧 佛智慧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佛性이다. 좋은 智慧를 잘 펴 쓰면, 無窮無盡하다. 이를 大方廣”이라고 한다.

 

 

여기서 는 끝이 없고, 方은 법칙이 있고, 廣은 안 통하는 데가 없다는 뜻이다. 體와 用이다.

智慧의 本體와 作用에 對한 것이다. 이를 부처님이 華嚴을 한다고 한다.

 

 

부처님이 온갖 功德의 꽃을 피워 宇宙 法界를 장엄하게 꾸민다.

 

 

 화엄에서 藏嚴佛, 선에서는 自性佛이라 한다.

그래서 화엄경 수행은 普賢行願, 선은 無念修行이다.

 

 

 화엄과 선 수행의 差異点이다.

 

 

화엄수행을 온갖 공덕을 짓고 회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보살은 자기 지은 복을 자기가 탐하지 않는다. 복은 많이 짓되 항상 보시하고 회향하는 것이 화엄수행이다. 회향하지 않으면 자기 사업과 이익 몰두하는 것에 불과하다.

 

無念修行은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수행이다. 執着인 愛憎을 놓는 것이다.

인간에게 비극이 생기는 까닭에 여기에 있다. 我執과 執着을 버리는 것이다.

 

 

問題는 좋고 싫어하는 感情이다. 여기서 輪回한다. 역대 선사들은 눈감고 보지 말고 귀 막고 듣지 말라 했다. 부처님은 무엇을 보든 無常함으로 알기에 執着하지 않는다. 執着하면 苦痛만 있지, 虛妄한 理致를 안다. 이를 살펴 아는 것은 智慧고, 그것을 살피되 執着하지 않는 것이 禪定이다.

 

 

보되 보지 않고 執着하지 않는 것이 無念이다. 그것이 定慧雙修다. 定은 執着하지 않는 것이고, 慧는 보는 대로 아는 것이다. 집착해서 망상을 안 일으키면 무념선정이다. 보되 좋고 싫음의 애증을 안 일으키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대승선정이다. 華嚴이 바로 그렇다. 卍行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우선, 초회 6품의 ‘제1 世主妙嚴品’에서 기막힌 始作을 볼 수 있다.

 

<화엄경>은 ‘시성정각(始成正覺)’, 처음부터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出發 한다. 그 다음은 正覺의 世界를 설명한다. 깨닫고 보니 보이는 세계부터 달라졌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갈제국 아난야 법보리장에서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었다. 그 땅은 견고하여 金鋼으로 됐다. 가장 묘한 보배들과 여러 가지 훌륭한 꽃과 깨끗한 마니로 장엄하게 꾸며졌으므로 온갖 빛깔들이 그지없이 나타났다”고 설하고 있다.

이는 成佛에는 時間과 空間에 制約을 받지 않는다.

 

智慧로써 解決되고 完成된다. 지금 이 瞬間 無量한 業劫의 過去 現在 未來를 보는데 걸림이 없게 하는 것이 智慧라는 것이다. 最高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면, 三世에 들어가 平等하고

몸이 一切 世間에 가득해 없는 데가 없다.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고 우리들의 세계다. 時空은 깨달음으로 해결한다.

時空을 극복하는 불교의 방법이다. 智慧와 깨달음으로 해결한다.

智慧를 얻을 때, 모든 苦痛이 사라진다.

제2 ‘如來現相品’의 핵심은 다음 게송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부처님 몸이 온 법계에 가득하니, 일체중생 앞에 모두 나타나시었다.
인연 따라 가지 않는 데 없지만, 언제나 보리좌에 항상 계신다.’

 

‘불신상현현(佛身常顯現) 법계실충만(法界悉充滿)
항연광대음(恒演廣大音) 보진시방국(普震十方國)

 

 

부처님 몸이 恒常 나타나 法界에 가득히 찼다.
늘 廣大한 音聲을 내어 시방국토를 모두 振動하신다.’

이는 바로 智慧의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다는 意味다.

깨친 마음의 智慧 世界가 못 깨친 生覺의 世界와 다름을 말하고 있다.

어둠과 공포를 만드는 生覺의 世界를 벗어나 智慧로 世界로 나아가야 한다.

어리석은 業力에 빠지면 苦痛 없는 곳에서 苦痛을 만든다.

우리는 <화엄경>을 通해 日常에서 智慧를 啓發하는 努力을 해야 한다.

智慧로 돌아가면 모두 解決된다.

어리석은 感情을 解決하려면, 智慧로 돌아가야 한다. 먼저 學習이 必要하다.

 

두 번째는 관조(觀照), 自己를 觀察하고 들여다보는 것이 必要하다.

오늘날에는 특히 자기 챙기고 돌아보는 노력이 중요하다. 상대방의 怨望을 많이 하고 사는 것이 요즘 세상인데, 마음 챙기는 수행이 더욱 필요하다. 自己 마음을 늘 觀照해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에게 바라는 마음이 自身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바라는 대로 해주질 않아 苦痛스럽고 미운 그 마음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바라는 마음을 늘 들여다보면, 相對方이 밉지 않다. 이것이 觀照다.

 

다음은 수련이다. 마음工夫다. 끊임없이 닦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工夫를 제대로 익히면, 自己 마음을 스스로 觀照할 수 있게 된다. 幸福한 삶을 살게 하는 原動力이 된다.

 

 

*普賢 코멘트---------------------------------------------------


종범 스님의 화엄 법문은 참으로 뛰어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보현행원]의 중요성은.........

 

 

1.<화엄경>은 ‘시성정각(始成正覺)’,
처음부터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출발한다.
그 다음은 정각의 세계를 설명한다.


->화엄은 처음부터 '깨달은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그 수행법인 보현행원도,
처음부터 '부처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보현행자는, 보현행원을 하는 순간
처음부터 '부처'입니다.

 

2."성불에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 말은, 화엄의 세계는 시공이 이미 끊어진 세계라는 걸 의미합니다.

 

3.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불신상현현(佛身常顯現) 법계실충만(法界悉充滿)
항연광대음(恒演廣大音) 보진십방국(普震十方國)

 

 

->굉장히 유명한 화엄경의 게송입니다.
꼭 記憶해 두시기를...*^*^*_()_

 


*아쉬운 점

화엄의 수행으로 말씀하신  지혜의 계발, 관조는
[보현행원]을 하면 [저절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 계발하라, 관조하라, 라고 말씀하시기보다,
[보현행원을 행하라]고 말씀해 주셨으면
보현행원의 전법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아쉬움을 가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