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지관(摩訶止觀)과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마하지관은 천태지의선사가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詩敎)를
다 모아서 한 체계로 묶어 제일 지혜가 수승한 사람한테 제시한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마하지관은 어렵다고 해서
사람들이 잘 보려고 하지 않지만 마하지관 수행법과 보리방편문
수행법은 비슷비슷 합니다.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여실히 밝힌 法門입니다.
그 연원(淵源)은 제2의 석가라고 하는 용수보살에게 올라갑니다.
금타대화상이 깊은 선정(禪定), 즉 三昧에 들어 있는 중에
過去의 용수성자로부터 感應을 받아 傳受받은 現代에
가장 알맞은 고도한 수행법이 바로 보리방편문입니다.
道人들이 깊은 禪定에 들면 過去와 現在와 未來를 모두 보게 됩니다.
지금 세상으로 말하자면 최첨단 受信器로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電波가 와서 닿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도인들이 삼매에 들면
몇 천 년 전이든 몇 만 년 뒤의 일이든 時空에 구애받지 않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事實 이러한 可能性은 모두가 갖추고 있습니다
‘분명히 부처님은 모두를 다 알고 모두를 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믿어야 진실한 불교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原來 우리 人間性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마하지관(摩訶止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하라는 것은 인도말로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그치다’는 뜻의 지(止)는 散亂한 마음을 딱 그치게 하여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말입니다. 본다는 뜻의 관(觀)은
우리의 本性을 비추어 본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무명(無明)에 가려
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本性을 부처님 말씀에 따라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마하지관은 20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중국의 천태지의스님이 낸 것입니다.
佛性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낳지 않고 죽지 않고 永生하는 것입니다.
佛性 가운데는 物質的인 質料는 아무것도 없고 또 佛性은 時間成과
空間性을 超越해서 存在합니다. 그리고 一切 存在의 모든 可能性을
갖춘 하나의 光明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했으니
우리 중생이야 그저 부처님 말씀을 따라서 믿고 비춰 봅니다.
마음공부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같이 닦는 것입니다.
불교는 아주 어렵거니와 관련된 이론과 체계도 많습니다.
참선공부는 인류 문화사 가운데 가장 고도한 수행법이기도 합니다.
그런 어렵고 고차원적인 수행법을 단 몇 시간 동안 이해하고
윤곽을 잡으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현대는 다행히 과학이 발달한 시대라 물리학적인
지식을 동원시키면 중생의 意識으로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갑니다.
항상 학교에서 배운 물리학적인 지식을 상기하면 좋습니다.
불교 공부를 하다보면 物理學과 數學이 哲學을 工夫할 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원래 수학을 못해서
철학 서적을 읽다보면 막혀서 이따금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소양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현대는 이론과 실험 과학의 체계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지금 시대는 물리학을 모르면 아주 불편합니다.
지금 物理學을 보면 一切 物質이 破壞된 後에는 에너지라는
光明만이 남는다는 것을 證明하고 있습니다. 전자(電子)라는 것을
極小化 시키면 광량자(光量子), 즉 광입자(光粒子)가 됩니다.
電子라는 아주 微細한 알맹이를 分解해보면 結局은 하나의 광자(光子)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광명체(光明體)입니다. 현대 물리학으로 봐도 宇宙에는 지금 이러한 光子가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온 宇宙가 佛性이고 光明이고 부처님뿐이라고 하신 말씀을
현대 물리학으로 비추어 본다 하더라도 맞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根源的인 것은 하나의 生命의 聖域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하지관은 우리의 산란한 마음, 좋다 궂다 分別하는 마음이
虛妄한 것들이므로 이 虛妄한 것을 우리가 否定하지 않으면
참다운 것이 못 나온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렇기에 부처님경전 가운데서 量的으로 가장 비중이 많은 것이
공(空)사상, 제법공(諸法空)입니다. 이른바 金剛經 道理를
부처님이 22年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도 虛妄하고, 꿈(夢)이요,
허깨비(幻)라는 것을 또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싫증이 나는 것인데 이 所重한 내 몸뚱이가
虛妄한 存在라는 말을 듣는 것이 무엇이 좋겠습니까?
그래도 그렇게라도 返復해서 말하지 않으면 衆生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니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현대 물리학의 元素 理論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 몸뚱이는 이와 같이 생긴 대로 固有하게 있다고 生覺을 합니다.
단 한瞬間도 이 몸뚱이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衆生들은 그런 事實을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通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 衆生들이 보고 있는
현상계(現象界)가 虛妄하고 메아리요, 그림자(影)라는 것을
22年間 줄기차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하여
本來 한 物件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天地 宇宙가
物質로 꽉 차 있는데 한 物件도 없다고 합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이것도 역시 物理學을 아는 분들은 그냥 理解가 됩니다.
物質은 에너지의 波動일 뿐입니다. 個別的으로 固定된 物質도 아니고
質料도 없습니다. 空間性도 없는 에너지의 振動,
卽 波動이 우리 눈에는 物質化 해서 보이는 것뿐입니다.
횃불을 동그랗게 빙빙 동리면 우리 눈에는 불 동그라미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불 동그라미는 實際로 있는 것이 아니라 視覺의 殘像에 依한
錯覺 때문에 그와 같이 가짜로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細胞들이 合해서 모여 있으니까 사람 몸뚱이로 보이는 것이지
細胞도 역시 보다 微細한 것들에 의해 波動만 있는 것이기에
實際로는 空間性이 없다는 말입니다.
가장 微細한 原子를 놓고 生覺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原子는 原子核을 中心으로 주위에 電子들이 돌고 있습니다.
어떠한 存在나 모두가 다 原子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우리가 分析해 놓고 보면 原子란 核을 中心으로 삼아 電子들이 돌고 있는 것입니다.
核 주위로 電子가 몇개나 도는 가에 따라 酸素, 水素, 質素라는 差異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原子核과 그 주위를 도는 電子와의 사이는 텅~ 비어있습니다.
原子核과 電子 사이는 마치 太陽과 地球와의 사이같이 텅~ 비어있습니다.
태양과 지구와의 사이가 텅~비어있는 것처럼, 모든 物質의 根源이 되는 原子 自體의 속은 텅~ 비어 있다는 事實입니다.
물론 原子와 다른 原子 사이도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런 텅~비어 있는 것들이 모여서 우리 몸도 構成하고 物質도 構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 몸을 가리켜서 공취(空聚)라고 했습니다.
텅~ 빈 하나의 무더기라는 말입니다. 텅~ 빈 공(空)이 모여서 우리의 細胞를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物質이 根本이 되는 原子는 텅~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原子核이란 무엇인가? 核도 에너지가 振動해서 돌고 있는 波動에 불과합니다.
電子 역시 에너지의 波動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物質化돼서 物質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根本에서 보면 에너지뿐입니다.
중생이 되고 무엇이 되고 했다 하더라도 根本 本質에서 볼 때는 모두가 에너지인 부처뿐입니다.
우리 몸이라는 것은 이렇게 텅~ 빈 것인데 그 事實 하나를
중생이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부처님께서 22年 동안이나
반야(般若) 공(空) 思想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자상(壽者相)이 없다고 했습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상(相)이란 結局 현상(現像)입니다.
잘났고 못났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개도 있고 소도 있고…그런 것이 모두 相인데,
金剛經에서는 相이 있다는 것을 쳐부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相이 없으면 불(佛)이요, 도(道)요, 성자(聖者)요,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相이 있으면 범부(凡夫)고, 중생(衆生)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相이 없으면 성자고 부처요, 相이 있으면 범부요 중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조(觀照)를 할 때 初期에는 태양도 보라하고,
간혹 서산(西山)에 뉘엿뉘엿 지는 황혼도 보라하고, 영롱한 물도 보라 했습니다.
장엄한 태양을 보면 마음이 텅 비어 오고, 영롱한 물을 자주 보면
혼탁한 마음이 맑아옵니다. 初期에는 눈에 보이는 相對的인 것과
因緣을 짓게 해서 우리 마음을 觀照해서 統一시키는 法을 썼습니다.
初期 불경에도 그러한 법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조금 올라가면
법당에 있는 거룩하신 부처님을 애쓰고 봅니다. 마리아상을 보고,
부처님 상을 보고 그러면 우리 마음이 그만큼 모아집니다.
初期에는 이렇게 形象을 보고 관조하는 법이 있었지만,
形象은 虛妄한 것이고 참다운 實相은 貌樣이 없습니다.
가장 고도한 形象은 모양이 없는 純粹한 生命에너지입니다.
이렇게 순수한 生命을 認定할 정도가 되면 그때는 이관(理觀)이라,
마음의 原理를 보게 합니다.
마하지관에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지(止)고,
마음을 어떤 境界에다 놓고 비추어 보는 것은 관(觀)입니다.
가장 위대하기 때문에 마하지관이라 합니다. 따라서 그 때는
에누리가 없이 佛性 그 자리에 마음을 딱 붙여 버립니다.
마하지관은 천태지의선사가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詩敎)를 다 모아서
한 體係로 묶어 第一 智慧가 수승한 사람한테 제시한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마하지관은 어렵다고 해서 사람들이 잘 보려고 하지 않지만
마하지관 수행법과 보리방편문 수행법은 비슷비슷합니다.
마하지관은 마음을 공(空), 가(假), 중(中)으로 봅니다.
空은 우리가 보는 모든 認識이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렸다시피 衆生의 認識은 實存을 보지 못합니다.
물自體를 못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은
물自體가 아니고 結局 모두가 事實이 아닌 거짓, 즉 가(假)입니다.
모든 것이 다 텅~비었다는 것이 空이고, 따라서 모두가 거짓이라는 假입니다.
그러나 텅~ 비었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空이 아닙니다.
그 空 中에는 무엇인가 一切 存在가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可能性을 다 包含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중(中)입니다. 中은 空과 假를 다 包含하고 있습니다.
空도 아니고 假도 아니고, 空도 아니고 色도 아니고,
그와 같이 다 通하기 때문에 중도(中道)입니다.
이것이 천태지관에서 보는 시각입니다.
보리방편문은 마하지관과 약간 비슷합니다만,
천태지의선사의 공가중(空假中)은 佛性을 論理化시켜서 보았기 때문에
生命的인 力動性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리방편문은
生命을 화석화(化石化)시키지 않고 生命 그대로를 工夫하는 方法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하지관보다는 보리방편문이 더 우수하다고 봅니다.
- 청화 스님 / 마음자리로 돌아가는가르침 -에서
-가장 행복한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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