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장백산-1 2013. 4. 21. 21:50

 

 

좋은 인연들이 함께하는 정념수행도량 옥련암입니다


▲화엄경(華嚴經)

大乘佛敎 初期의 經典이다. 석가모니의 성도(成道)의 깨달음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낸 最高의 經典으로 손꼽히고 있다. 原題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우리나라 華嚴宗의 根本經典이다. 불교전문강원의 대교과(大敎科)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역본(漢譯本)은 권수에 따라 세가지가 전한다. 北印度 出身인 中國 동진(東晋)때 승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의 "60華嚴", 唐나라때 승려 실차난타(實叉難陀)의 "80話嚴", 반야(般若)의 "40華嚴"이 그것이다. 여기서 "40華嚴"은 "60華嚴"이나 "80華嚴"의 입법계품(入法界品)으로 완역본이 아니다. 東亞世亞에서는 "60華嚴"이 가장 널리 유포되어 있다. 華嚴經은 부처가 되기 위한 修行과 華嚴처럼 피어나는 因果應報에 대해 說明하고 있다. 그리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敎主로 한다. 4世紀쯤 만들어진 것으로 推定되고 있다.

"60華嚴"은 7처(處·설법장소) 8회(會·설법횟수) 34품(品·장)으로 構成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이 經을 바탕으로 6세기에 현수종(賢首宗)이란 華嚴宗이 創宗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元曉와 義相이 이 經典을 硏究, 華嚴宗을 開創했다. 法華經과 더불어 韓國 佛敎의 2大 經典이다.

(현대불교 미디어센터)


華嚴經 (上) / 김호성<동국대 교수>

“하나가 全切요 全切가 하나”

한걸음에 如來의 地位 들어간다
相則論理로 頓悟 體係있게 說明

禪불교는 日常言語의 論理와는 다른 論理를 갖고 있다. 非論理의 論理이다. 중국의 한 禪師는 노래했다. “회주(懷州)의 소가 벼를 먹었는데 익주(益州)의 말이 배부르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여기서는 空間의 觀念도, 自他의 觀念도 모두 무너진다. 좀더 쉬운 말로 하면, “한 걸음에 如來의 地位에 들어간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저 높은 부처님의 境地를, 敢히 衆生이 한 걸음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한 걸음에 如來의 地位에 들어간다”는 말은 禪佛敎의 基本立場을 天命한 것이다. 중생과 부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어떠한 間極도 무너뜨린다. 이것이 어떻게 可能하단 말인가? 이에 對해서는 두가지 次元의 理解가 可能하다. 첫째는 論理的 次元이며, 둘째는 哲學的 次元이다.

우선 論理的 次元을 살펴보자.

한 걸음에 곧바로 如來의 자리에 들어가는 者는 衆生이다. 따라서 이 引用句 속에는 如來와 衆生의 存在가 같이 가정(假定)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兩者는 一致한다는 意味이다. “중생이 곧 부처다.” 이는 禪불교가 내세우는 깃발이면서 同時에 華嚴이 내세운 깃발이기도 하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命題에서 衆生을 하나(一)로 본다면 부처는 무량(無量)이라 해야 할 것이다.

衆生이 부처라는 것은 곧 하나가 無量이라는 말이다.

이같은 論理를 <華嚴經>에서는 “하나 가운데 無量을 알고 無量 가운데 하나를 안다”라고도 말하고, 또 “하나는 能히 無量이 되고 無量은 能히 하나가 된다”고도 말한다. 前者는 包含관계이고, 後者는 동치(同値)관계이다. A와 B가 서로를 包含하고 있다(相入)는 것은 A와 B가 같다(相卽)는 말이다. 이러한 論理를 ‘相卽의 論理’라고 부르는데, 그렇게만 말하는 까닭은 相卽이라는 槪念 속에 이미 相入의 뜻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하나가 全切이고 全切가 하나”라는 말은 相卽의 論理를 總論的으로 말한 것인데, 이러한 論理는 다시 空間·時間·成佛과 關聯하여 各論的으로 展開된다. 空間的으로는 하나의 티끌이 十方世界에 包含될 뿐만 아니라 “하나의 티끌 속에 十方世界가 다 包含된다”고 말하며, 時間的으로는 “一念이 無量劫이며 無量劫이 곧 一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空間論이나 時間論보다 더 重要한 것은 成佛論이다. 空間論과 時間論 역시 “初發心이 곧 깨달음”이라 말하는 성불론(成佛論)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要請되기 때문이다.

衆生이 한 걸음에 如來의 地位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면 禪佛敎는 애시당초 成立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돈오(頓悟)는 禪불교의 生命이다. 그같은 頓悟를 可能케 하는 論理的 根據가 바로 <華嚴經>의 ‘相卽의 論理’이다. 論理的으로 볼 때, 禪불교의 頓悟는 相卽의 論理 위에서 建立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와 無量의 同一함을 證明할 수 있는 것일까? 부처와 중생이 同一視될 수 있는 것은 부처도 부처가 아니고 중생도 중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가 부처가 아니며,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는 것은 自己正體性의 否定, 自己同一性의 否定에 다름 아니다. 부처가 부처가 아니라는 것은 부처가 空이라는 말이며,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는 것은 중생이 空이라는 메시지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라는 것은 空과 空의 同一性을 意味한다. 空은 空이다(0=0). 이러한 同語返復은 當然히 참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空의 論理는 禪불교에 깊은 營響을 미친 <金剛經>과 같은 般若附 經典에서 널리 說해지고 있음은 注知하는 바이다. 結論的으로 말해서, 論理的인 次元에서 볼 때 禪불교의 頓悟는 가까이는 <華嚴經>의 相卽의 論理가 있었기에 可能했으며, 다시 相卽의 論理는 般若附 經典에서 說해지는 空의 論理가 있었기에 可能한 것이다. 이런 側面에서 “般若 → 華嚴 → 禪佛敎”로 이어지는 思想史의 係譜를 그릴 수 있게 된다.


華嚴經 ( 中) / 김호성<동국대 교수>

“自性이 淸淨하면 깨달음 온다”
- 禪과 華嚴 '하나' 되는 ‘性起思想’제시-

禪불교의 모토는 衆生이 곧 부처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直指人心)거나 性稟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見性成佛)라고 쓰여진 禪불교의 깃발은 그같은 소식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 論理的 次元의 理解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데, 이제 哲學的 意味를 살펴보기로 하자. 禪家에서 말하는 “곧바로 如來의 地位에 들어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可能한 것일까? 人間을 바라보는 禪불교의 觀點이 따스하기 때문이다. 人間이란 어떤 存在인가? 罪도 많고, 業도 많은 存在인가? 아니면 聖스러운 存在인가? 이 問題에 대한 對答에 따라서 宗敎가 달라지고, 한 宗敎 안에서도 宗派가 달라진다. 人間觀에 따라서 修行法(救援論, 修證論)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唯識佛敎가 煩惱의 存在로부터 人間을 바라보고 修行체계를 세우고 있다면, 禪佛敎는 ‘人間은 부처다’ 라고 規定하면서 그 나름의 修行體係를 세워간다. 佛敎 안에서는 禪佛敎 外에도 代表的으로 <華嚴經>에서 人間은 淸淨하다고 말한다. 唯識佛敎가 人間을 겉으로부터 보고 있으므로 상종(相宗)이라 불린다면, 華嚴佛敎는 人間을 속으로부터 觀察하기에 성종(性宗)이라 이름된다. 이른바, 六祖慧能이 “마음자리에는 本來 허물이 없고, 本來 어지러움도 없으며, 本來 어리석음도 없다”고 말하였을 때에도 人間을 저 깊은 속에서부터 바라보았기에 可能한 선언이었다. 돈오(頓悟)의 입장이다. 이렇게 볼 때, 本來 性稟이 淸淨하다는 것은 禪에서 말하는 頓悟의 可能性이고, 前提條件인 셈이다. 아니, 自性의 淸淨이 곧 깨달음이고 禪이다.

<華嚴經>에서 이렇게 自性淸淨을 말하고 있지 않다면, 頓悟를 주장하는 禪佛敎의 입지(立地)는 없을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선불교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는 것이 <華嚴經>의 성기(性起)思想이다. 性起라는 술어는 60권본 <화엄경>의 寶王如來性起品에서 유래한다. “어떠한 衆生도 그 몸에 如來의 智慧가 完全히 들어가 있지 않은 衆生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想念에 執着하기 때문에 如來智를 깨닫지 못한다. 想念에 執着하는 것을 떠나면, 일체지(一切智)·무사지(無師智)는 執着이 없으므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性起思想을 나타내기 위해서 ‘性起品’은 여러 가지 비유를 들고 있는데, 그 중의 백미는 미진경권유(微塵經卷喩)이다.

“예를들어, 불자여 三千大千世界의 크기 만큼 큰 經典이 있다고 하자. (----) 眞實로 저 큰 經典이 하나의 극미(極微)의 먼지 속에 들어가 있다고 하자. 저 하나의 極微의 먼지 속에 저 큰 經典이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이, 다른 모든 極微의 먼지 속에도 그만큼의 큰 經典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

물론, <화엄경>의 性起思想은 그 基礎에 如來藏思想이 놓여있음은 事實이다. 그러나 如來藏이 可能態를 나타내고 있다면 性起는 現實態를 말한다. 如來藏이 잉태의 瞬間을 말하는 것이라면, 性起는 出産의 瞬間에 焦點을 맞춘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먼지라 하였던 것이 事實은 알고보니까 經典이었던 것처럼, 모든 人間은 곧 부처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화엄은 현실을 긍정하며, 현실이 곧 절대라고 본다. 선종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마조스님이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이며, ‘일체가 곧 진리’(一切皆眞)라 말하였던 데에는 이같은 性起思想이 그 배경에 놓여있었음을 알 수 있다.

性起, 이 자리에서 禪과 華嚴은 만난다,즉 하나가 된다(禪嚴一致). 여러 禪師들이 華嚴을 좋아했던 까닭이 여기 있는데, 韓國禪은 더욱 그같은 傳統을 잘 잇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華嚴經 <下> / 김호성<동국대 교수>

“普賢行 實踐이 華嚴三昧”
-菩提가 無心히 나타난 게 海印三昧-

<華嚴經> 속의 어떤 가르침이 禪불교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일까? 이러한 問題에 대한 解答을 論理的 側面과 哲學的 側面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修行的 側面을 살펴보기로 하자. 華嚴의 修行論은 무엇인가?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적어보자.

<화엄경>에는 數많은 三昧가 提示된다. 三昧야말로 禪과 깊은 關聯을 갖고 있는 것 아닐까. 또 各種各樣의 菩薩行이 强調된다. 大乘經典 중에 그 어떤 경전도 보살행을 說하지 않음이 없지만, 그래도 그 幅과 깊이에 있어서 <華嚴經>만큼 곡진(曲盡)한 經典도 없을 것으로 生覺된다. 적어도 열번씩은 返復되는 强調의 수사학(修辭學)을 생각해 보라. 특히, 그 極的 典範을 우리는 普賢菩薩의 行願 속에서 보고 있지 않은가. 이리하여 앞에서 제기한 質問은 다시 ‘禪과 普賢行의 關係’에 대한 물음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注意할 것은 普賢行 亦是 性起와 脈이 이어져 있다는 事實이다. <화엄경>을 대표하는 이들 두 思想은 다시 海印三昧와 華嚴三昧로 置換해서 生覺해 볼 수 있다. 後代 중국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海印三昧는 총정(總定)으로 평가받아 왔는데, 同時에 그것은 結果로서 얻어지는 선정(果定)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화엄경>에서 ‘海印三昧’가 說해지는 脈絡 中의 하나가 ‘性起品’이라는 점은 修行的 側面에서 論議되는 海印三昧가 事實은 性起와 잇대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性起品’의 한 게송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모든 法이 虛空과 같아서 / 아(我)도 아니며 무아(無我)도 아님을 了達하여 모든 法을 등각(等覺)하는 것이다. / 비유하면 모든 大海에 모든 衆生들의 모습이 두루 나타나므로 / 일체인(一切印)이라 說하는 것이다. / 十方世界 中의 모든 衆生類는 / 無上菩提의 바다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一切印이 곧 海印이다. 다시 이러한 海印三昧는 정혜등지(定慧等持)라고 볼 수 있다. 中國 禪宗의 육조(六祖)가 말한 것처럼, 禪은 바로 定과 慧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같은 點에서, 모든 三昧가 바로 禪의 世界 아님이 없지만, 海印三昧 속에서 우리는 禪的 취의(趣意)를 確然히 確認할 수 있을 것으로 生覺된다. 중국 화엄종의 제4조 징관(澄觀)이 海印三昧를 “菩提가 무심(無心)히 돈현(頓現)함“으로 理解하는 것도 그같은 特性을 把握했기 때문이리라. 이같은 海印三昧에 對하여, 그의 思想이 禪思想과 連結된다고 評價되는 의상(義相)은 <법계도기>에서 2번에 걸쳐서 언급한다.

첫째는 왜 法界圖는 그림에 依持하는가 하는 問題와 結附되어서 論해진다. 그같은 質問에 對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亦是 이 海印三昧에서 우러난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는 海印三昧가 곧 性起임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법계도>의 운문 부분인 法性偈에서 “海印三昧 中에 들어갈 수 있어야 不思議한 行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部分은 바로 利他行을 說하는 脈絡이다.

이를 宗合하면, 海印三昧는 性起로서 華嚴三昧의 普賢行으로 나아가는 前提, 내지 出發點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華嚴의 利他行, 즉 普賢行을 <화엄경>에서는 華嚴三昧로 말하고 있는 바 그 內容에 있어서 저 十牛圖의 열번째 그림 입전수수(入纏垂手)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깨침을 얻은 禪師가 다시 저잣거리로 들어가 衆生을 敎化한다는 十牛圖의 그림은 一般의 先入見과는 달리 禪이 독선(獨善)의 길에서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衆生의 바다를 向해서 나아가는 出發임을 말해준다.

경허(鏡虛)와 같은 禪師들의 無碍行을 普賢行의 實踐으로 理解할 수 있는 것도 그같은 背境이 있기 때문이다. “性起 = 海印三昧” → “普賢行 = 華嚴三昧”의 構造는 “頓悟 → 만행(漸修)”의 構造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華嚴思想의 禪的 取意와 實踐指向性을 ‘화엄선(華嚴禪)’이라 부른다. 未來佛敎의 命運은 禪과 華嚴의 調和, 卽 華嚴禪에 달려있는 것으로 나는 生覺한다.
좋은 인연들이 함께하는 정념수행 기도도량 옥련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