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무집착과 무상/무아/고

장백산-1 2013. 6. 13. 02:59

 

 

 


집착을 놓아버리는 방법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서는 執着을 버리라, 마음을 놓아라 ,欲望을 놓으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집착을 버리고, 욕망을 놓아버리는 것에서  삶의 幸福이 始作된다고 합니다..

욕망과 집착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放下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重要한 疑問이 하나 들 것입니다.
이렇게 執着이 무엇인지를 찾기는 했고, 그 執着을 놓아버려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執着을 놓아버릴 수 있는가 하는 問題입니다.

방하착하라, 집착을 놓아라, 我相을 놓아라, 慾心을 버려라, 마음을 비워라,
이거야 누구든 다 아는 事實이고, 정말 重要한 것은
도대체 그 어린아이도 다 아는 이 眞理를 어떻게 實踐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합시다.
집착을 비우라, 놓으라고 하는데, 그 집착을 비우고 놓으려면 먼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주 基本的으로 執着을 놓아버리려면 먼저

내가 집착하고 있던 바로 그 집착의 對相이
‘그다지 執着할 만 한 것이 아닌 것’이 되면 可能해 질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執着을 하는 理由는
‘그것이 執着할 만 한 것’, ‘執着할 만큼 좋은 것’
‘執着할 만한 價値가 있는 것’ 이기 때문에 執着하는 것입니다.

 

卽 執着할 만큼 좋은 것이고,
執着했을 때 내게 무언가를 가져다주는 것이며,
執着할 만한 그럴만한 理由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그동안 내가 執着하던 것들이 執着할 만한 價値가 없는 것이라고 證明된다면,
卽 그다지 執着할 必要가 없었다는 것이 證明된다면
아마도 그동안의 執着을 버릴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執着하면 무언가가 나올 줄 알고,
執着하면 엄청난 무언가가 있을 줄 알고,
執着하면 그로인해 나에게 아주 좋은 것이 있을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이 執着할 만큼 매력적인 것이라거나,
執着할 만큼 그렇게 恒常하는 것이라거나,
執着할 만큼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장에 그 執着을 거두어 들일 수 있고, 그 執着을 버릴 수 있을 것이란 말이지요.

 

現在 내가 執着하고 있는 것들이 내가 生覺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말로 과연 執着할 만한 價値가 있는 것들일까요?
이 事實을 한번 깊이 思惟해 보도록 합시다.

 

내가 執着하고 있는 對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집착, 사랑에 대한 집착, 物質에 대한 집착, 生覺에 대한 집착, 宗敎에 대한 집착,

나에 대한 집착, 生命에 대한 집착, 돈과 名譽, 權力, 地位 등에 對한 執着 등 아주 多樣합니다.

그런 것들이 ‘집착할 만한 價値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집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執着의 對相들이  事實은 執着할 만한 것들이 아니라는 事實을 思惟해 보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의 特徵을 한번 살펴봅시다.

 

以上에서  언급했던 執着의 對相들은 어떤 特徵을 가지고 있을까요?
먼저 가장 큰 첫 번째 特徵은
‘그 모든 것들은 變한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諸行無常이라는 것이지요.

사랑도 變하고, 사람도 變하며, 돈도 명예도 권력도 變하고,
생각, 종교, 사상, 재산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變합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들 중에 變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제까지고 우리가 꽉 붙잡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因緣 따라 잠시 내게 왔다가 因緣이 다하면 언젠가는 分明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分明히, 반드시, 絶對로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것, 變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諸行無常이라고 하여 이 世上의 모든 것들은 恒常하지 않고 끊임없이 變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諸行無常은 무엇을 意味할까요?
우리가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生覺했던 바로 그 執着의 對相이 언젠가는 消滅되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執着이란 언제까지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執着하는 것들은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어주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내 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내 곁에서 벗어나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執着의 特性이니까요.

여기에서 바로 아주 重要한 삶의 秘密스런 本質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執着하는 모든 것은 變하며, 그렇기에 우리가 무언가를 執着한다는 것은
곧 괴로움을 同伴할 수밖에 없다는 事實입니다. 執着은 반드시 괴로움을 몰고 옵니다.
이것이야말로 永遠한 眞理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돈을 꿈꾸지만, 돈이란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일 뿐입니다.
지위와 명예와 권력을 꿈꾸지만 언젠가 그것들은 내 품에서 사라져 갑니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과도 언젠가는 永遠한 離別을 고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이 永遠히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랍니다.
잠시 因緣 따라 왔다가 因緣 따라 갈 것이라는 것을  每 瞬間 잊어버리곤 합니다.

 

만약 그런 事實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래서 잠시 因緣 따라 그것을 쓰기는 할지언정  그것에 마음이 얽매여 執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아주 自由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執着하고 있는 對相들의 特性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固定된 實體가 없다’는 점입니다. 諸法無我라고 하지요.

우리가 어떤 것에 執着하는 理由는 그것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높은 명예나 지위에 執着하고 있다면
내가 그 地位에 오르는 瞬間, 우리는 나와 그 地位를 同一視하곤 합니다.
나의 正體性이 바로 그 地位가 된다고 錯覺합니다.
그리고 그 地位라는 正體性이 나를 높여준다고, 나에게 많은 것을 안겨준다고 錯覺을 하게 됩니다.
我上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거기에 執着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執着하고, 그 執着하는 것을 얻었을 때  우리는 그 執着의 對相과 '나'를 同一視하고,
그 同一視가 나를 어떤 存在로써 正體性을 심어주며, 그것이야말로 나의 어떤 實體性이라고 生覺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나 自身의 어떤 實體性’을 經驗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나'라는 어떤 實體的인 것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은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執着하는 對相이 '나'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나 ’ 라고 錯覺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社長이나 國會議員이 되었다고 生覺해 봅시다.
그 때 우리 안에는 ‘사장’이요, ‘국회의원’이라는 自己正體性이 생겨나고, '나'와 ‘사장’을 同一視하며,
'나'의 實體性이 ‘사장’ 혹은 ‘국회의원’이라고 錯覺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그럴싸한 職業을 가진 사람이며, 내가 어떤 位置에 오른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同一視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장이라는, 국회의원이라는, 선생님이라는, 성직자라는, 부자라는 그 이름에 어떤 實體性은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이름일 뿐이고, 하나의 象徵일 뿐입니다. 그저 그렇게 이름붙이기로 約束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약속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나'는 그저 '나'일 뿐입니다.

聖職者라고 하더라도 성직자라는 이름 속에 聖스러움이나, 神과의 連結性이나, 깨달음 등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성직자는 스스로 성직자라는 事實을 잊습니다.

참된 聖職이라는 것은  그 성직자라는 이름 속에, 修行者라는 이름 속에

그 어떤 實體的인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生覺行動이라는 즉, 業, 行爲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行爲가 바르지 않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승복을 입고 있고, 사제복을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알맹이는 聖스럽지 못합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執着하고 있는 對相의 두 번째 特性은 그 어떤 것도 ‘固定된 實體’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對相에 집착하는 理由는 그것이 어떤 固定된 것이어야 하고, 實體的인 것이어야 하며,
그로 因해 우리에게 實質的인 어떤 것을 안겨주어야 합니다.

固定된 實體가 없는 對相이라면 그야말로 아지랑이같고, 幻影 같으며, 신기루 같아서
겉만 그렇게 보일 뿐 實際로는 그렇지 않는 것인데 그런것에 執着할 理由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執着하는 理由는 그것에 어떤 實體가 있다고 生覺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執着하는 그 모든 對相들에는 固定된 實體가 없습니다.

이 世上 그 어떤 것도 實體的인 것으로써 恒常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끊임없이 永遠히 變化하는 것이며,

그 어떤 實體도 없이 다만  因緣 따라 잠시 그렇게 보였을 뿐인 것입니다.

因緣 따라 社長도 되었다가, 因緣 따라 國會議員도 되었다가, 狀況 따라 아버지도 되고,

아들도 되고, 이웃사촌도 되고, 끊임없이 役割을 바꾸면서 變해갈 뿐
어떤 한 가지 이름으로  어떤 한 가지 職業이나 모습으로 딱 定해져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實體化시키기 좋아하는 宗敎나 文化에서는 例를 들어 聖職者가 되는 瞬間
그 사람에게는 絶對不變의 그 어떤 實體的인 聖職者로써의 무언가가 附與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佛敎에서는 그 어떤것도 實體化시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諸法無我입니다.

스님도 수행자의 길을 걷다가 換俗하여 在家者가 된다면 그 사람은 재가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번 스님은 永遠한 스님이 되야할 必要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職位도, 어떤 것들도 固定不變한 實體的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 번째의 事實, 卽 諸法無我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가 執着할만한 對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實體的이라야 執着을 할 것인데, 꿈 같고, 幻影 같고, 아지랑이 같고, 신기루 같다면
누가 그런것에 목숨걸고 執着을 하려 하겠습니까.

事實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려고 애써왔고, 가지려고 애써왔으며, 목숨걸고 지켜왔던 그 모든 執着의 對相들은
이러한 諸行無常과 諸法無我라는 두 가지 屬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三法印의 가르침에서 보면 諸行無常과 諸法無我인 모든 것들은 一切皆苦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恒常 하지 않고, 끊임없이 變하며, 固定된 實體도 없이
다만 因緣 따라 잠시 꿈처럼, 幻影처럼 나왔을 뿐이라면 그것들에 執着할 아무 理由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無常과 無我인 對相에 對해 執着을 함으로써 고(苦),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三法印이라는 가르침의 核心입니다.

이러한 三法印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執着해야 할 對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卽, 三法印이기 때문에, 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이기 때문에 執着할 아무런 理由가 없다는 말입니다.

無常과 無我를 思惟함으로써 내가 지금까지 執着해 왔던 바로 그 對相이
事實은 ‘執着할 만한 것’이 아님이 證明된다면,
‘執着할 만한 價値가 있는 것’이 아님이 證明된다면
自然스럽게 우리의 執着은 놓여질 것입니다.

 

내가 執着하던 모든 對相들을 찾아 보았다면, 이제 그 하나 하나의 執着 目錄을 살펴보면서
낱낱이 그것들의 無常性과 無我性을 思惟해 보시기 바랍니다.
無常과 無我를 思惟하게 되면 저절로 그것에 執着하는 것은 곧 괴로움이라는 것이 證明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것이 事實은 執着할 만한 것이 아니었음이 證明되면
저절로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들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그동안의 執着과 我執과 欲望들을 비워버리게 됩니다.

어느 程度 理解가 되었으리라 生覺됩니다.

그러나 물론 바로 놓아지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내 삶을 놓고 우리는 思惟와 觀察을 始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 라는 存在, '내'가 만드는 삶을 있는 그대로 觀察할 때 그 觀察의 結果 우리는 無常과 無我를 깨닫게 됩니다.

마음觀察은 以上에서 설명한 三法印의 가르침을 그저 머릿속으로만 理解하고 있던 것을 넘어서서
온 存在로 體驗하도록 이끌어 주고, 온 存在로 깨닫도록 이끌어 주는 修行法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른 마음觀察을 위해 절수행이라는 方便을 빌어 몸도 마음도 觀察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觀察과 修行을 通해 無常性과 無我性를 바로 보고 깨닫게 되고
그것은 곧 우리를 放下着으로 이끌며 放下着은 곧 괴로움으로부터의 解放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또 묻습니다.
왜 놓아야 하는지는 잘 알겠는데,
具體的으로 놓는 方法, 비우는 方法 좀 알려달라고 말이지요.
놓아버리고 싶은데 어떻게 놓아버려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執着을 놓을 때는 어떻게 놓습니까?

그것은 마치 무언가를 決心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例를 들어 내일부터 아침에 運動을 해야겠다고  新年을 맞이하여 決心을 했다고 生覺해 봅시다.
그 決心이 굳지 않은 사람이라면 하루 이틀 정도 實踐하다가도

作心三日이라고  몇 일 안가 금방 抛棄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決心이 굳은 사람이라면 한두달이 아니라, 일년이라도 아니 평생이라도
그 決心이 섬과 同時에 바로 實踐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決心을 하는데는 어떤 方法이 있습니까?
그냥 하는 것이지요.
다만 그 決心을 굳히게 된 어떤 理由가 있다면 그 決心이 아주 단단히 굳어지고 그랬을 때

抛棄하지 않을 수 있는 意志力이 생길 것입니다.

그 決心은 例를 들어  당장에 내 몸에 病이 들었다거나, 그래서 運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거나,
혹은 가까운 사람이 運動을 안 하다보니 갑자기 病에 나서 힘들어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거나,
혹은 내가 運動을 안 하다보니 몸이 힘들어지는 것이 느껴진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내 스스로 運動의 效果에 대해 思惟해 본 結果
運動이 정말 重要하다고 굳게 믿어졌다면 아마도 훨씬 決心을 굳히기 수월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執着을 놓아버리려고 한다면
거기에 ‘놓아버리는’ 어떤 方法이 定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그냥 놓아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놓아버리는데 무슨 特別한 方法이 必要하겠어요.

決心하는데 어떤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決心을 하게 된 動機나 事由, 經驗과 觀察이 必要한 것처럼
放下着하고, 執着을 놓아버리는데도 놓아버리는 特別한 方法이 必要한 것이 아니라,
놓아버려야만 하는 理由, 思由, 觀察이 必要한 것입니다.

 

執着을 왜 놓아버려야 하는가 하는 理由,
執着의 特性과 屬性이 무엇인가하는 思由,
도대체 내가 執着하는 이것은 무엇인가하는 바른 觀察 등이
우리를 곧바로 ‘놓아버림’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억지로 놓는 것은 놓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理解와 바른 思惟 바른 觀察을 通한 바른 깨달음만이
바른 놓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放下着을 話頭로 삼고, 왜 執着을 버려야 하는지, 執着을 버려야 하는 理由가 무엇인지,
내가 執着하는 그 對相이 과연 執着할 만한 것인지, 執着할 價値가 있는 것인지,
執着 對相의 特性이 무엇인지, 그 對相이 無常, 無我의 特性이 있기는 한 것인지를
깊이 깊이 思惟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思惟를 通해 저절로 放下着이 體驗되어지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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