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세계'의 법칙은 죽은 자와 산자가 만날 수 없다. 그 이전에 산자는 삶과 죽음의 경계인 카론의 강을 넘을 수조차 없다. 단 한번도 깨어지지 않던 저승의 법칙이다. 그러나 엄격한 이 법칙도 죽은 연인을 찾아가는 오르페우스 앞에서는 한갓 모래성일 뿐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르페우스는 초인적인 음악재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카론의 뱃사공은 오르페우스를 저승세계로 데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르페우스의 애절한 연주소리에 순간적으로 방심했다. 죽음의 신 앞에 선 오르페우스는 또 한번 애절한 사랑의 노래를 연주한다. 그 순간 사랑했던 에우리디케가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산자인 오르페우스가 죽은 자인 에우리디케를 품에 안은 것이다. 이로써 저승세계의 第1法則은 瞬息間에 무너졌다. 저승을 넘나드는 사랑 이야기를 그리스神話는 차분히 적고 있다. 문제는 남는다. 그토록 견고하던 저승세계의 법칙이 어떻게 해서 깨진 것인가.
그것은 波動이다. 사람을 포함 모든 物體는 固有의 波動을 갖고 있다. 波動이 같으면 增幅된다. 波動이 一致하는 것을 공명(共鳴)이라 한다. 振幅이 걷잡을 수 없이 增加, 强力한 힘을 발휘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波動이 共鳴을 일으켜 일시에 죽음의 法則을 무너뜨린 것이다.
神話속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말 것인가. 1831년 영국 멘체스터 근교 브로스턴다리가 갑자기 무너졌다. 무거운 物體가 지나가거나 强한 太風이 부는 등 어떤 外壓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리가 녹슬거나 낙후된 것도 아니었다. 當時 狀況을 정리하자면 영국 캘버리부대가 行進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대원의 행진 박자가 다리 固有의 波動과 一致했던 게 原因이었다. 共鳴에 의한 다리붕괴로 기록돼 있다.
共鳴의 힘은 신화의 세계나 현실의 세계 물질과 정신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그 위용을 자랑한다. 특히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共鳴이 주는 힘은 무한하다. 연인(戀人), 도반(道伴), 동료(同僚), 동업자(同業者)간에 波動이 一致하면 못할 일이 없다. 비즈니스 세계를 들여다보자.
日本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꼽히는 혼다그룹의 創業主 '혼다 소이치로'에게는 후지사와 타케오라는 파트너가 있었다. ‘기술의 혼다’와 ‘영업의 후지사와’가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두사람이 일궈낸 波動은 共鳴을 일으켜 엄청난 成果를 일궈냈다. 늦게 출발한 자동차업체인 혼다를 단기간에 세계적인 유력 업체로 떠오르게 했다. HP의 휴렛과 패커드, 맥도널드의 레이 크록과 해리 손번, 디즈니의 이브이워크스와 디즈니, 스탠더드 오일의 록펠러와 모리스 클라크 그리고 헨리 플래글러 등 이인삼각의 사례는 비즈니스 세계 곳곳에 있다. 共鳴이 이끈 위대한 성공사례다. 흔히들 同業은 亡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에 쉽게 현혹되는데 이는 共鳴의 힘을 모르는 소치다.
共鳴은 自身과 波長을 맞추는 것이다. 波長을 맞추면 힘이 增幅된다. 1+1=2가 아니라 1+1=3이나 그 이상이 되는 것이 共鳴이다. 두사람의 힘을 합친 것 이상이다. 共鳴에 의해 운영되는 기업은 경쟁력은 커지고 피해는 최소화된다. 실패는 줄어들고 위험은 분산된다. 성공의 속도는 가속화된다. 산술적 증가가 아니라 기하학적 증가를 넘어 기하급수적 증가로 이어지는 것이다.
'칼 융'이 주장한 '동시성현상'同時性現狀 이라는 것도 공명의 한 부문이다. 同時性은 어떤 事件이 발생할 때 內部와 外部에서 事件에 作用하는 힘이 同時에 發生하는 것이다. 同時性現狀은 注意 깊게 보면 우리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단 絶實히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 限해서다. 渴望이 必要條件이다.
國內 最高의 祝祭로 인정받는 함평 나비축제도 同時性原理로 설명이 가능하다. 전남 함평에만 있는 나비가 아니다.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더욱이 더 남쪽나라인 제주도 등지에 더 많은 종이 더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석형 咸平郡守에게 유채꽃이 필연처럼 다가왔다.
어느 날 개천가에 핀 유채꽃을 보면서 순식간에 한 生覺이 떠올랐다.
"그래 나비다. 都市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나비다."
새로운 祝祭 生覺으로 골머리를 앓던 이 군수의 渴望이 外部에서 나비를 불러 온 것이다. 함평나비축제는 '칼 융의 풍뎅이'로 회자되는 '동시성현상'에 못지않은 大發見이다.
同時性 現狀은 아리스토텔레스 以來로 '因果의 法則'이 확고한 西洋科學으로서는 놀랄만한 方向 轉換이었다.
융은 사실 이 同時性 原理 발표를 주저했다. 동시성 현상은 전통과학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양의 시각에서는 이는 어렵지 않은 思考方式이다. 선(禪) 用語인 ‘줄탁동시'啐啄同時
에서 찾을 수 있다.
줄탁동시는 안과 밖에서 함께 해야 일이 이뤄진다는 말이다.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것을 줄, 어미닭이 밖에서 쪼는 것을 탁이라 한다. 줄과 탁이 同時에 이뤄져야 닭의 알이 부화가 가능하다는 비유다. 줄탁의 시기를 잘못 그르치면 생명이 계승되지 않는다.
.jpg)
이 電氣 信號는 근육세포 사이에 빠른 확산을 보이며 몸 전체에 리듬 있는
振動을 완성한다. 같은 리듬으로 振動하다가 增幅되어 '하나'로 작동하는 것을
共鳴(resonance)이라 한다. 이러한 공명으로 뉴런들은 거리를 超越해 意思疎通
을 하며 腦의 효율성을 지속적으로 높여왔다.
줄탁동시든 同時性 現狀이든 이는 共鳴의 한 현상이다. 共鳴에너지는 한편으로는 創造에너지로 또 한편으로는 行動에너지로 變換하는 놀라운 能力을 갖고 있다. 위대한 일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공명을 통해 이뤄졌다.
공명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정신과 육체, 신과 인간 등 모든 영역을 넘나든다.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宇宙의 原理이다.
앞서 사람을 包含, 모든 物體는 固有의 波動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波動을 직접 맨눈으로 보는 것은 不可能하다.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이 아니다. 物體의 波動은 機械로 測定이 可能하다지만 사람의 波動은
次元이 다르다. 精神的인 領域에 속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등지에서 이에 도전하는 과학자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려오고 있다.
허나 方向을 轉換하면 人間의 波動은 의외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人間의 波動이 精神領域이라는 점에서 그 사람의 삶에 대한 態度와 우선 價値를 찾아보는 것으로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시대에 걸맞게 所有에 대한 態度를 우선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物質에 굶주린 사람들과 存在에 關心이 있는 사람들의 波動은 확연히 다르다.
多數의 사람들은 物質에 굶주려 있지만 이를 認知하지 못한다. 여기 적절한 일화가 있다.
"아이에게 수박을 주려했거든."
냉장고를 청소하면서 다소 늙은 아주머니가 말을 건넸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젊은 아주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몸이 드러나는 작은 옷을 입은 아이는 연신 냉장고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수박이 썩어 문드러지고 말았네."
막상 수박이 썩고 보니 썩기 前에 수박을 아이에게 주었더라면 하는 生覺이 난 모양이다.
이것은 결코 우화가 아니다. 매일 이런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주변의 이야기다. 사회심리학자 에릭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파악한 이야기이다. 이들은 공명의 意味를 알 리 없을 것이다.
손을 내미는 범위도 그 사람의 波動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혼자 혹은 가족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어울림 속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快樂에 대한 態度, 기쁨과 재미에 대한 認識, 먼저 주는 것과 받는 것의 差異 등에서도 波動의 振幅과 色彩는 확연히 다르다.
波動은 직업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사업가의 파동, 정치가의 파동, 공무원의 파동, 예술가의 파동, 종교인의 파동, 운동선수의 파동이 각기 다르다. 삶의 價値를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 波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맞다. 波動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게 그들 직업의 세계다.
波動이 맞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유능해도 不要不急한 일이 될 것이다. 共鳴이 우러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불요불급한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無知한 것이 그 하나요, 利害關係에 얽매인 것이 그 둘이다. 특히 이해관계에 얽매여 自身과 맞지 않는 사람들을 파트너로 삼는 사람들을 보면 그 끝이 보인다. 虛亡한 끝을 말하는 것이다.
波動은 운명과 같은 것은 아니다.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選擇하는 것이다. 選擇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에 대한 態度를 바꾸는 것으로 波動이 달라진다. 波動이 달라지면 역시 삶의 方向이 달라진다. 結果치도 다를 것이다.
波動에 대한 또 다른 理解는 周波數(헤르츠)이다. 라디오를 들을 때 주파수가 잡히지 않으면 잡음이 인다.
周波數에서 멀어질수록 雜音이 거세진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 나오더라도 짜증이 난다. 거슬리는 마음에 자꾸
라디오를 쳐다보게 된다. 이리저리 채널을 맞춰본다. 그런데도 여전히 깨끗하지 못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시간이 지나면서 라디오가 ‘철전지 원수’가 된다.
반면 周波數가 제대로 잡히면 우리는 便安한 상태가 된다. 자리에 누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듣다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다. 그리고는 라디오를 잊는다. 우리가 공기를 잊듯이.
周波數가 같은 사람들이 만나는 것은 幸福이다. 이들과 함께 있으면 氣分이 고양된다.
날씨가 좋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일을 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위대한 일들이 쏟아질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일도 이들과 함께라면 가능할 것 같다.
인연因緣...........
그러나 주파수가 같은 卽 파동이 一致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맹구우목(盲龜遇木)이란 용어가 있다. 一百年에 한번 물위에 떠오른 눈먼 거북이가 나무의 구멍을 만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좋은 사람과의 因緣이 어려운 것을 比喩한 말이다. 허나 어렵기 때문에 더욱 만나야 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오르페우스처럼 저승세계를 찾아갈 필요는 없다. 現實 世界에서 만나야 한다.
각자의 만남에 대해서는 행운을 빈다. 반드시 만나서 승자의 종을 울려라.
여럿이서 울리는 共鳴은 勝者의 언어요, 혼자만의 波動은 敗者의 언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