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氣가 萬物을 하나로 連結한다

장백산-1 2013. 7. 21. 20:22

 

 

 

氣가 萬物을 連結한다

방건웅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Contents
氣의 개념
氣에 대한 현대과학적 해석
뉴 패러다임의 선봉장

韓國人들의 言語習慣 중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 특히 서양문화권 사람들이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 중의 하나가 氣일 것이다. 우리는 말을 배우면서부터 氣라는 단어를 익혀왔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 뜻을 몰라도 心情的으로 누구에게나 그 뜻이 通한다. 또한 文化的 傳統을 살펴보아도 氣를 빼고는 그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氣는 韓國 文化를 特徵짓는 單語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事實上 氣는 무척이나 오랜 세월 동안 쓰여온 단어이기 때문에 氣를 현대과학적으로 해석하려 든다는 것은 앞뒤가 바뀐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마도 현대과학이 등장하는 過程에서 서양이 아니라 동양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면 에너지가 아니라 라는 낱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재로서는 현대과학이 우주를 좀더 설득력 있게 그리고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명료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를 수단으로 하여 氣를 이해하고자 시도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적 개념을 앞세워 氣를 이해하려고 하면 現代科學의 틀 안에 氣의 槪念이 固着될 憂慮가 있다. 이 글에서는 우선 氣 자체에 대한 개념을 간략하게 먼저 살펴보고 나서 이에 附合하는 개념을 현대과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하는 方向으로 接近하겠다. 이를 통하여 양쪽의 개념이 좀더 쉽게 이해가 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된다면 학문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氣의 개념

최근 들어 중국에서 氣가 다시 주목을 끌게 된 배경 중에는 1980년대에 개혁개방이 이루어진 이후 대중적으로 氣功의 붐이 확산된 데에도 있지만 傳統文化에 대한 대토론이 벌어졌을 때 周易과 氣功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된 데에도 있으며 이 현상은 周易熱과 氣功熱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이들은 중국 의학의 氣이론과 현대과학의 물질론은 서로 궤를 달리하는 세계관이고 이들을 融合하는 방도를 찾아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고 했다. 중국의 현황을 보면 哲學的 관점에서의 氣개념보다도 實際的인 實體로서의 氣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특히 의학적 응용방안으로서의 氣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퍼지고 있는 氣 수련에 대한 열기도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의미보다는 氣의 實際的인 側面에서의 實用性에 集中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東洋哲學에서의 氣는 歷史가 오랜 만큼 그 槪念도 폭넓게 쓰여왔다. 사실상 동양철학에서 氣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를 철학적 용어로 이해하고 있다. 동양철학에서 氣라는 용어가 쓰인 예를 살펴보면 워낙 그 범위가 넓어서 엄밀하게 그 뜻을 定義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철학의 속성상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 의미도 많이 바뀌어왔다.

 

 

중국에서의 흐름을 보면 秦 이전에는 生命力을 의미하는 것으로 널리 쓰였고 그 다음으로 陰陽의 氣, 天地의 氣처럼 自然的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쓰였으며 世上 萬物을 이루는 基本 質料와 五行의 氣라고 하는 개념도 있었다. 진한시대에는 음양과 오행의 이론이 전개되면서 元氣의 개념이 등장한다. 송, 명, 청대의 元氣에는 超越者的인 개념이 있었으나 그 以後로 이것은 스스로 內在해 있는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는 自然哲學的인 氣로 바뀌어갔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보면 조선조의 이퇴계와 이율곡, 그리고 서화담 간의 理氣一元論과 理氣二元論에 대한 논쟁은 유명하며 이것은 노장사상에서 연유한다. 性理學에서는 氣에 대한 논의가 道德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氣의 개념이 철학적 사변적 방향으로 흐른다. 形而象은 理의 세계이고 形而下의 세계는 氣의 세계로 보며 氣의 세계는 헤아릴 수 있는 세계라고 했다. 人間의 道德問題를 다루면서 발달된 氣 개념을 自然問題에도 投射하려 한 것이 性理學의 特徵이다. 성리학자들이 도덕적 개념의 氣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을 連結하려 했다면 조선 후기의 최한기는 氣學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自然의 氣를 中心으로 인간과 자연을 綜合하려 시도했다. 최한기는 세계는 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서 倫理와 物理는 다른 것으로서 倫理問題에서 출발한 理 개념을 물리적 세계로까지 확장하는 성리학의 논리를 비판했다. 특히 物質과 空間을 分離하지 않고[虛卽氣] 全切와 部分을 連續的으로 보는[形卽氣] 세계관에도 注目할 필요가 있다. 또한 최한기는 理在氣中이라 하여 氣가 理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이 내용은 新科學적 입장에서 본 세계관과 매우 類似한 面이 있다.

 

理와 氣의 개념에 대해 보다 더 根源的인 내용을 《三一神誥》에서 찾아볼 수 있다. 《三一神誥》에서는 氣와

一氣를 區分하고 있는데 宇宙 萬物은 一氣에서 일어나며 그 作用은 性/心, 命/氣, 精/身의 셋으로 나누어져 이루어진다고 했다. 一氣는 본디 비었으면서[虛] 極性이 없는 것인데 여기에서 兩極으로 갈라지면서 萬物이 나온다고 함으로써 宇宙의 根源인 氣를 物質的 槪念의 質料가 아니라 波動的 槪念으로 파악하고 있다. 모든 物質은 無極의 에너지場이 陰陽으로 나뉘어 출렁이면서 波濤칠 때 나타나는 現狀으로 보는 것이다. 波動에너지의 作用에 依해 드러나게 되는 心, 氣, 身은 각기 理, 氣, 機에 該當한다고 보며 이것은 宇宙의 運行을 理와 氣만으로 설명하는 性理學보다도 더 合理的이다. 비유하여 설명한다면 컴퓨터가 움직이려면 소프트웨어[理], 하드웨어[機], 그리고 전기 에너지[氣]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몸[身]이라는 하드웨어가 있고 여기에 마음[心]이라는 소프트웨어와 생기[氣]라는 생명에너지가 同時에 같이 있어야 살아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살아 움직이는 宇宙 萬物에도 氣가 가득 차 있다고(充滿性) 보게 된다.

 

 

또한 氣에는 淸濁이 있는데 맑으면 오래 살고 탁하면 일찍 죽으며, 따라서 氣는 生死門이라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氣가 生命을 유지하는 動力源이라는 개념을 유추할 수 있으며 同時에 淸濁이라고 하는 의 槪念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과학에서 에너지에는 量의 개념만이 있는 것으로 認識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내용이다. 또한 心, 氣, 身은 不可分의 關係에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作動하는 컴퓨터에서 이들 셋을 나누어 生覺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氣에는 마음의 情報가 恒常 같이 실려 다닌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氣에 실린 情報를 制御하면 氣의 흐름에 影響을 줄 수도 있다.

 

위의 內容을 整理하면 氣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氣는 宇宙 萬物을 構成하는 根源이며 波動과 같은 屬性이 있다.

둘째, 氣에는 量만이 아니라 質의 개념이 있어 情報 傳達이 이루어진다.

셋째, 氣는 大氣에 充滿해 있으며 萬物을 連結하는 媒介體이다.

이들 屬性에 該當하는 槪念을 現代科學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인가 檢討하여 보자.

 


氣에 對한 現代科學的 解釋

 

 

●宇宙 萬物의 根源

 

현대과학의 발전사를 보면 20세기는 가히 혁명적인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과학의 기초가 된 뉴턴 역학에서는 세계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이 이론에 따라 宇宙를 構成하는 基本質料인 素粒子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 전개되어왔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빛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빛이 粒子와 波動의 兩 特性을 同時에 나타낸다는 기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를 物質論的 世界觀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물리학자들은 노력 끝에 量子力學을 展開하게 된다.

 

뉴턴 역학에서는 빈 空間이 있고 空間 안에 基本粒子가 있다고 假定했는데 量子力學에서는 空間이 에너지의 바다이며 그 自體가 뭉쳐서 粒子가 나타난다고 하는 이론이 제안되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空間이 하나의

에너지場이며 無數히 많은 粒子와 反粒子들이 生成되었다가 消滅되고 있으며 이를 零点 에너지 / Zero point energy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설명을 뒷받침하는 실험결과로서 水素原子 스펙트럼의 遷移/Lamb shift, 그리고

카시미르 힘/Casimir force을 들고 있다. 그야말로 一氣의 개념과 附合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데이비드 은 이에서 더 나아가 宇宙는 홀로그램과 같은 映像이며 이를 物質的 實體로 보는 것은 人間의 感覺器管에서 일어나는 錯覺이라는 革命的인 主張을 提起하고 있다. 이쯤 되면 氣가 아니라 佛敎에서 말하는 色卽是空의 槪念이 그대로 展開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모든 事物은 다만 에너지가 波動치고 있는 것이어서 空한 것이다 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實際로 미국의 IBM에서는 입체 팩스를 개발하고 있다. 한곳에 있는 物體를 실타래 풀어내듯이 어떻게 꼬여 있는지 情報를 알아낸 다음에 이를 傳送하면 받은 쪽에서는 空間에 가득한 에너지를 실타래 情報에 따라 엮어낸다고 하는 내용이다. 결국 宇宙는 하나의 氣運일 뿐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物質을 이러한 槪念에 따라 설명한다면

空間에 가득 찬 에너지[一氣]가  量子情報에 따라 뭉쳐서 搖動치고 있는 것이다.

 


●情報傳達體

 

氣는 에너지의 槪念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强弱이라는 量의 개념만이 아니라 質의 개념도 있다고 했다. 現代科學에서는 아직도 理解되지 못하고 있는 內容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샤우버거는 自然을 直接 觀察하면서 平生을 보냈는데, 그는 宇宙에서 作動하는 에너지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밝혀내었다. 그 하나는 엔트로피가 增加하는

遠心性의 에너지이고 다른 하나는 엔트로피가 減小하는 球心性의 에너지이다. 이것은 곧 에너지에 質이 있다고 하는 것과 다름아니며 韓醫學에서 말하는 生氣와 邪氣의 槪念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遠心性의 에너지를 活用하는 側面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結果的으로 環境破壞를 避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샤우버거는 20세기 전반기에 이미 예언한 바 있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球心性의 에너지를 活用하는 技術의 開發에 눈떠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氣는 단순한 動力源으로서만이 아니라 情報傳達體로서의 役割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情報의 傳達은 生化學的 反應을 일으킬 수 없을 程度로 微弱한 에너지 狀態로 이루어지며 區美에서는이를 微弱 에너지subtle energy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현대과학에서는 이미 生體가 매우 微弱한 에너지場을 利用하여 必要한 情報를 주고받는다는 것까지 밝힌 바 있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生體光子/bio-photon이다. DNA조차 이를 이용하여 情報를 주고받으며 이 미약 정보에 따라서 세포가 죽기도 한다는 실험결과도 보고된 바 있다. 앞으로는 수술이나 항암제에 의존하지 않고도 微弱 情報를 利用하여 인체의 癌細胞를 죽이는 방법이 개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약 정보의 전달 기구에 대해서는 최근 러시아에서 발표되고 있는 廻轉場/ torsion field 槪念에 注目할 필요가 있다. 매우 微弱하지만 情報가 실려 있어 시간이 지나면서 增幅되어 결과적으로 에너지의 흐름과 특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遠心性과 球心性의 에너지 特性을 가름하는 것도 廻轉場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廻轉場이 氣, 혹은 프라나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萬物의 連結고리

 

氣의 개념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萬物은 氣로 連結되어 있어 서로 影響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영국의 셸드레이크가 주장하는 形態形成場의 개념에서 共鳴을 일으키는 媒個體로서 氣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生態界에 대한 연구에서 종종 보고되는 自體調節機能도 氣를 通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기상제어에 대한 실험에서 보면 고깔모양의 기하학적 형상을 이용하여 비가 오게 하는 실험이 진행된 바 있다. 이것도 大氣中에 가득 차서 萬物을 連結하는 氣 에너지를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結局  萬物은 一氣에서 일어난 存在이면서 氣에 依해 서로 連結되어 있다고 보는 이 관점은 新科學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한다. 世界는 物質論的 世界觀에서 말하는 것처럼 分離되어 있는 存在들의 單純組合體가 아니라 뗄 수 없는 하나의 有機體와 같다는 世界觀이 氣의 개념에 이미 具現되어 있었던 것이다. 物質論的 세계관에서는

세계를 정적인 존재로 보았으나 신과학에서는 동적인 존재로 보는데 그 動力源이 氣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된다면 氣學的 世界觀이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뉴 패러다임의 先峰長

氣에 대한 현대과학적 해석에서 가장 타당한 接近은 에너지 개념일 것이다. 事實上 에너지의 屬性은 잘 알려져 있으며 이를 活用하는 데 큰 不便은 없으나 逆說的이게도 에너지 自體가 과연 무엇인가/physical reality에 對해서는 物理學界에서도 아직 明快하게 定義가 내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氣의 槪念을 통해 에너지의 物理的 實體가 명료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氣는 波動的 特性이 있으며 따라서 物質처럼 주거나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電波와 같아서 感應하거나 못하거나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電波를 受信하듯이 氣에 感應하면 氣에 실린 情報의 內容을 알 수 있게 되어 反應이 일어나게 된다. 氣功士가 다른 사람들에게, 혹은 物體에 影響을 일으킬 수 있는 것도 波動 周波數의 共鳴에 依한 現狀으로 추정된다.

 

기공사가 생체나 물질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바인데 최근에는 미국의 재료관련 학술잡지(Mat. Res. Innovat.)에 논문이 발표될 정도에 이르고 있다. 氣(Ki)라는 낱말을 키워드로 하는 논문이 醫學界 학술지에서만 보였으나 이제는 非生명體를 다루는 材料學術誌에도 실릴 정도로 그 연구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腦 科學에서도 이미 뇌에 대한 하드웨어적인 접근의 限界를 인식하고 意識 自體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분야로 떠오르고 있으며 이 분야는 意識科學/consciousness science으로 불리고 있다. 意識[心]을 연구하려면 氣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氣에 대한 연구는 必然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急激한 變化의 흐름을 볼 때 氣를 구시대적인 유물로 보거나 혹은 수련문화에서나 다루는 것이지 어찌 이것이 科學의 對相이 되겠는가 하고 放置하다가는 어느 날 뒤통수를 치게 될지 모를 일이다. 21세기에는 과학기술사에서 唯物論的 世界觀을 벗어나는 革命的인 進步가 이루어질 것으로 豫見되고 있다. 우리의 氣哲學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展開하는 데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잘 연구하여 과학화하면 선진국들보다 앞서 새로운 科學技術文明을 創出할 수 있는 機會를 포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다.


 

가져온 곳 : 
카페 >생활 · 운동 자연치유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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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현수|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