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찾아서!!!

동이족인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인디오의 수난사

장백산-1 2013. 8. 13. 01:07

 

아메리카 원주민 수난사

 

[원로 목사의 증언]


중국과 인도제도에 무진장 있을 황금과 향료를 찾아 떠난 콜럼버스의 배가 1492년 산살바도르 라는 카리브해안에 닿은 것은 역사적인 대실수였다. 이 대실수를 미국 사람들은 위대한 신대륙 발견으로 둔갑시켜 10월 12일을 국경일로까지 정하여 기리지만, 콜럼버스의 발견 이전(B.C.-Before Columbus)부터 이 땅에 살아 온 원주민들에겐 학살로 점철되는 피의 시대 개막을 알리는 오욕의 국치일인 셈이다.


콜럼버스가 인도로 착각하고 인디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원주민들은, 인도인과는 생김새가 다른 붉은 피부, 불거진 광대뼈, 굵고 검은 머리털을 가진 몽골계 후예로 알려진, 아시아에서 베링해의 얼음을 타고 넘어 와 이미 3만년 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는 토착 주인들이다. 당시 북미에선 800만에서 1천만 명으로 추정되는 원주민들이, 농경지에 정착하여 사는 부족도 있긴 하였지만 대부분은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들소와 함께 이동하는 유목생활을 하였다. 비록 문명과 화력은 유럽보다 뒤지지만 자연과 더불어 목가적 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탐욕스러운 유럽인들의 침입은 엄청난 재앙의 시작이었다. 


콜럼버스가 원주민 장신구까지 싹쓸이 한 황금보화약탈과 환금작물인 담배 소식이 퍼지면서 유럽 열강들의 신대륙 식민지사업을 놓고 벌린 각축은 땅 따먹기 였다. 아즈택과 잉카문명을 무너뜨리며 중남미를 먼저 선점한 에스파냐인은 황금약탈과 기독교 개종이라는 명목으로 300만명 이상을 도륙하였지만 남아있는 인디오들이 페루나 볼리비아에서 원주민 대통령이 선출될 정도의 숫자를 남겨 두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인 보다 1세기나 늦은 1607년부터 북미대륙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한 영국계 최초 정착민들은 기독교 전파가 아닌 광산채굴과 탐사라는 상업성 목적으로 여왕의 특허장을 들고 온 사람들이다. 이때 디즈니월드의 만화영화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포카혼타스라는 열한 살짜리 인디언 추장 딸이 스미스라는 백인선장을 구출하는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생겼다. 그녀는 17살에 존 롤프라는 백인과 결혼하여 영국으로 이주, 레베카 라는 세례명으로 개명하여 사회적 명사로 생활하다 천연두로 사망한다. 인디언중에서 아마 그녀만이 백인들에게 착하고 아름다운 인디언으로 사랑 받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그 이후 1620년 플리머쓰에 도착한 필그림(Pilgrims)들이라 불리는 제2의 정착민들도 41명만 이교도로 불렸던 청교도(Puritans)들이고 나머지는 신대륙에서 일확천금을 노렸던 이방인들이었다. 런던 상인들에게 돈을 꾸어서 까지 온 초기 정착민들은 처음에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터를 잡게 되었다. 초기정착을 위하여 원주민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농사법 전수와 식량지원을 받던 개척민들도 다른 이주민들이 바닷게처럼 계속 밀려오며 숫자가 우세하여 지자 원래 이주 목적인 황금과 땅에 대한 탐욕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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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땅은 하늘과 같이 무한한 것이어서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땅에 대한 소유개념이 없던 원주민들은 초기 이주민들의 땅을 소유해야겠다는 이상한 관습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모두가 나눠 써야 할 땅이었기에 그들의 정착을 도왔다. 1624년 네델란드인들이 24불어치의 냄비와 낚시바늘, 유리구슬 등 잡동사니로 인디안 추장을 꼬드겨 지금의 맨하탄을 빼앗은 사기극은 애교로 볼 수도 있다. 그 후 백인들의 욕심은 그때까지 처녀림 같았던 산천에 문명이라는 산불을 지르고 갖은 악랄한 수법을 동원하여 인디언을 수 만년 살아 온 그들의 터전에서 몰아내기 시작한다. 포카혼타스의 아버지인 포와탄 추장도 자기가 살려 준 스미스선장에게 항의한다. 


‘호의적이고 평화롭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왜 구태여 무력으로 뺏으려는 거요? 당신들에게 식량을 지원해준 우리를 왜 파멸시키려는 거요?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대체 뭐란 말이요?’ 
미타쿠예 오야신이라는 인디언은 땅을 뺏으러 온 백인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 판단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는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린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대지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인간이 오히려 대지에게 속해 있다.’ 


한 추장은 조지 워싱톤 대통령에게 말했다. 


‘나는 내가 태어 난 대지를 사랑한다. 그 위에 자란 나무들과 풀들을 사랑한다. 그것들이 있기에 우리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다. 난 선물을 받으려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아직 젊고, 원하는걸 내 땅에서 사냥해 아이들과 여자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 나는 우리를 제발 가만 내버려 두라고 부탁하려 온 것이다. 그게 우리에게 오래가는 행복을 마련해 주는 최상의 방법이다.’ 


수1700년대 후반부터 100여년간 미 연방정부와 인디언간에 371건의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백인들의 변절로 모두 휴지조각이 되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짐승으로 볼 거냐 인간으로 볼 거냐를 심각하게 논의하였지만 결국은 인간으로 보되 제거 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 라는 인식이 팽배하여 어린이와 부녀자까지 포함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며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장식용으로 사고 팔며 인디언의 해골을 거리에 매달기도 하고 심지어는 수집용으로 주지사의 사무실에 진열되기도 하였다. 


한 인디언 토벌대장은 ‘올해 인디언을 많이 죽일수록 내년에 죽일 인디언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병사들을 격려할 정도인 인디언 말살정책은 남북전쟁 후 1868년 통과되어 노예였던 흑인까지도 포함한 만민 평등권을 부여한 개정헌법 제 14조에서 인디언은 제외시켰다. 1883년 미 대법원은 인디언은 미국 땅에서 태어났어도 이방인이라고 판결하였다. 19세기 말까지 미 연방군은 수많은 병력과 비용을 투입하여 인디언 소탕전을 끊임없이 벌였다. 그 결과 인디언의 수는 백인의 100분의 1도 안되는 30만정도로 급감했다. 유럽인들의 페스트나 장티푸스 같은 질병에 대한 면역체가 없던 토착민들이라 이러한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수 세기동안 우수한 화력으로 들소 사냥하듯 총질한 백인들의 집요한 인디언 소멸작전이 없이는 100살 넘겨 살던 장수족들의 인구 격감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천연두균을 묻힌 담요를 나눠 주는 생화학전을 포함하여 한밤중에 쳐들어가 모닥불을 지피듯 인디언 텐트에 불을 지르고, 튀어나오는 인디언들을 동물 사냥하듯 죽인 것은 연방군 병사들이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야만스러운 인디언과 싸우는 낭만과 모험이 가득한 카우보이들은 대부분 백인들이 만들어 낸 영웅들이다. 실제로 소몰이꾼인 카우보이라는 직업이 1867년부터 1887년까지 20여년동안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 이후 개량 교배종 소와 철조망의 출현으로 소를 몰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간간히 산발적으로 벌어졌던 카우보이와 인디언간의 교전으로 미미한 희생자도 생기긴 하였지만 군인들의 추악한 집단학살을 위장하기 위하여 용감무쌍한 정의의 사도 같은 영웅상을 만드는 것이 시대적인 요청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몰이 카우보이들에게 있지도 않았던 낭만과 모험이 신화같이 미국인들의 정신세계로 전승되면서 인디언은 더욱 야만스러운 인종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리틀 빅혼 전사인 한 추장의 말은 일제 강점기의 안중근 의사나 이봉창 의사를 연상케 한다. ‘만일 당신에게 더 없이 귀중한 나라, 당신 국민들이 언제나 속해 있던 나라가 있다면…..그런데 다른 민족이 찾아와 그 나라를 무력으로 빼앗으려 한다면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싸워야지요’ 


자기 땅을 지키려는 인디언들의 용맹성은 역설적이지만 오만 잡다한 배경과 목적을 가진 백인들을 단결시키는데 공헌을 하였다. 백인들은 서로간의 증오심을 버리고 공동의 적인 인디언을 소탕하기 위하여 뭉쳤다. 
아무리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 하지만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전범들은 죄과를 물어 처형하는데 무자비한 인디언학살의 주역인 앤드류 잭슨은 대통령을 두 번씩이나 하고 윈필드 스캇 같은 장군은 조지아 주립공원의 이름으로 헌정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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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과 다름없이 들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인디언들은 1890년 ‘운디드니’에서 최후의 학살이 끝난 30년 후인 191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생률이 사망률을 앞지르는 회생력을 보였다. 


이렇듯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인디언들에게 미 의회가 1924년 미국 시민권을 주며 유화적인 손길을 내민 것은 세계 1차 대전에서 총알받이로 싸워 준 알량한 대가였다. 시민권이란 법적지위를 얻었어도 많은 주에선 인디언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았고 인종차별적 착취는 여전했다. 그간 인디언 레져베이션이라고 불리는 허울좋은 인디언보호구역안에 몰아 넣은 생존 인디언들의 참상은 정부보고서 조차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죽음의 수용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많은 인디언부족이 인디언만의 자치정부 자율권을 요구하며 그간 체결한 조약의 이행을 연방정부에 촉구하였다. 이에 아이젠하워 정부는 종료정책(Termination)이라는 법령을 만들어 부족해체 작업을 시행하면서 아예 인디언에 대한 지원정책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다 1980년 인구조사에서 150만명으로 가장 빠른 인구증가세를 보였지만 여전히 최하 빈민층으로 남아있는 인디언에게 미 의회는 1988년 카지노운영권을 허용하는 선심성 실수를 한다. 그 후 카지노로 번 수 백억불의 흑자 돈으로 각 정당에 거액 정치자금을 대주며 정치적 목소리를 키우는 한편 장학금으로 똑똑한 인디언을 양성하여 조상들의 명예와 영토회복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간 젊은 인디언들은 미 연방정부와 조상들이 체결한 조약들을 연구검토하며 일부 땅의 반환과 주 정부와 동등한 자치정부 수립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흑인 민권운동보다도 더욱 확실한 명분과 결속력으로 사회 이슈화 될 전망이다.

 

 

미국의 역사는 땅뺏기 역사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땅뺏기 시합인 아메리칸 훗볼이라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에게 선조들의 유전인자와 피는 계승되고 있다.

 
그 땅뺏기의 역사는 백인들의 개척사지만 뒤집으면 가슴 저릿한 인디언의 멸망사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들의 함성에 패자들의 진혼곡은 묻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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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스모키 산-체로키 원주민 수난사 
체로키 부족은 스모키 산을 중심으로 남쪽의 조지아와 앨라배마를 비롯하여 테네시, 캔터키, W.버지니아, 버지니아, 싸우스와 노쓰 캐롤라이나 등 지금의 8개 주에 해당하는 광대한 땅에서 1만년이 넘도록 농경과 수렵으로 살아왔다. 비록 유럽 문명에 비해 미개하였지만 자연과 더불어 순수한 영혼을 지닌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었다. 


체로키 부족은 이웃 부족들과 가끔 분쟁이 있기는 하였지만 남미대륙의 잉카나 아즈택 같은 전제국가를 건설하여 산 사람들을 신의 제물로 바치던 원시인은 아니었다. ‘Fire’ the center of life 라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성인이면 모두가 돌아가면서 의견을 말하여 적절한 합의를 도출하여 부락운영에 반영하는 민주적인 회의방식은 미국 건국당시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으로 채택되어 운용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숲이나 강이나 하늘 땅을 지배하는 ‘위대한 정령’을 믿으며 주변의 모든 미물까지도 사람과 동격으로 의인화擬人化 할 정도로 자연 친화적인 삶을 영위하였다. 현대의 문명속도에 정신이 황폐하여진 많은 지식인들이 새삼스레 인디언의 정신을 본받으려는 것은 그들의 영혼이 그 만큼 순수하였다는 뜻일 게다. <사진의 뒷배경-인디언들이 살던 비옥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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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키부족이 처음 유럽인들을 만난 것은 콜럼버스상륙이후 50년이 지난 1540년, 황금을 찾아 훌로리다를 거쳐 조지아에 들어 온 헤르난데즈 디 쏘토 라는 스페인 사람이 이끄는 무리들이었다. 헤르난데즈 디 쏘토는 300명도 채 안 되는 병력으로 잉카제국을 무너뜨리고 9피트 천장까지 가득찬 황금전리품에 재미를 본 적이 있어 더 많은 황금을 찾아 북미 대륙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만나는 체로키 부족은 너무나 가진 것이 없어 빼앗을 물건이 없었다. 가는 곳 마다 황금의 유무를 살폈지만 페루 잉카제국에서 한 몫 잡았던 황금항아리나 황금으로 만든 잔, 황금상자는 북미 대륙엔 없었다. 결국 훌로리다, 조지아, 테네시, 앨라바마를 헤매다 죽었고 시체는 미시시피강에 던져졌다. 


이 탐욕적인 여행도 위대한 탐험으로 둔갑 되어 조지아 주립공원에 그의 이름이 헌정되었다. 당시 체로키인들은 황금을 갖고 있지않아 스페인 병사들의 공격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들과 만난 대부분의 체로키인들이 체내 면역성이 없는 유럽질병으로 죽었다. 이후 1600년대 초부터 들어 오기 시작한 영국인들과의 관계도 이 황금 때문에 모진 시련의 역사가 반복 된다. 초기 북미 이주자들도 황금을 원했지만 땅 속에 묻혀 있어 찾지를 못했다. 대신 환금換金 작물인 담배 재배를 위하여 체로키 땅을 빼앗기 시작한다. 


100년간 유럽 열강들이 벌인 식민지 전쟁에서 토착 주민인 체로키 부족의 운명은 총부리로 겨누어지는 애꿎은 들소 같은 신세가 된다. 특히 7년간 지속된 후렌치/인디언 전쟁은 프랑스와 인디언의 싸움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간의 싸움에 인디언이 프랑스와 손잡았기 때문에 영국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체로키인 쪽에서 보면 프랑스나 영국이 똑 같은 침략자이지만 프랑스인이 비버가죽 값을 더 쳐 주고, 계속 당하기만 했던 영국인에게 복수할 기회라 여겨 프랑스 편을 들어 싸웠는데 프랑스의 패배로 오히려 영국인의 보복대상이 되어 참혹한 살육을 당한다. 영국인들과 교역하던 사슴가죽이 때론 인디언머리가죽이 되기도 하고 생포되면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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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유리하고도 그럴듯한 변명과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 그 당시 개척민들은 동물간에 약육강식이 자연의 섭리이듯 하나님의 선민인 월등한 인간이 황무지의 미개하고 열등한 인간들을 체로 치듯 거르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신의 섭리로 생각하였다. 


이런 의식을 고상하게 한 차원 높여, 유럽인들이 이 땅을 평정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신의 뜻을 유럽인 후예들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 불렀다. 이러한 협잡배 같은 사상이 인종적 편견을 만들어 순진무구 하게 맑았던 생명을, 인디언의 종자를 말리는 작업을 죄의식 없이 처리하게 된다. 들판의 소떼처럼 쫓기던 체로키인들은 1800년대엔 조지아, 앨러배마, 테네시로 거주지역이 좁아지다가, 1900년 초 무렵엔 체로키 땅의 90퍼센트를 빼앗기게 된다.<사진-1818년에 지었다는 개척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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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도 체로키 부족은 유럽 침략자들의 문명을 받아들여 자체적으로 도로와 학교, 교회 등을 건설하며 체로키 라는 독립국을 세워 대의제 정부 조직을 갖춘 개화된 문명인이 되고 있었다. 

그 당시 동남부에 살던 5개 부족 중에서 가장 문명적이고 진보성향을 지녔던 체로키인들은 백인들과 숱하게 맺은 동맹과 조약이 그들의 기만과 협잡으로 번번히 깨졌지만 최소한의 땅과 부족의 명맥을 위하여 백인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심지어 체로키 추장들이나 지도층은 백인여자를 아내로 맞아 인종개량을 시도하기 까지 하였다. 그러나 서부의 골드러쉬 보다 20년 빠르게 주지아주의 달로네가 개울가에서 사금덩어리가 발견되면서부터 백인들의 눈이 뒤집히고 상대적으로 체로키부족의 운명은 나락으로 치닫게 되었다.

 
조지아 정부는 주내 조그만 부락에 살던 체로키인 20여명한테서 받은, 500백만 불에 미시시피강 동부 땅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빌미로 조지아주의 모든 인디언 재산과 땅, 광산채굴권을 몰수하여 제비뽑기 추첨으로 백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체로키인들은 연방대법원에 소송하여 인디언은 주 정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연방의회의 결정에만 따른다는 승소판결을 받았으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앤드류 잭슨(1829-1837재임, 20달러 화폐의 초상화인물)은 ‘그것은 마샬(당시 대법원장)의 결정일 뿐이다, 능력 있으면 법 집행을 해봐라’며 코 웃음을 쳤다. 집행능력이 없는 판결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난한 개척민의 아들로 무자비한 인디언 소탕 전력으로 성가를 올려 대통령이 된 그는 최초의 평민 출신 대통령으로 미국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되었다 하나 인디언들에게는 비수(匕首)로 불릴 정도로 냉혹하였으며 백인들에게도 잭슨대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카리스마를 휘둘렀다. 백인과 인디언은 같이 살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은 의회를 압박하여 인디언 이주법령(Indian Removal Act)을 제정하여서 동부인디언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이주가 아니라 땅을 뺏기 위한 강제 추방이다. 이를 싹쓸이 ‘제거’보다는 인도적이었다고 옹호하는 기록이 있지만 강자의 ‘악어 눈물’ 격이다. 


1837년부터 윈필드 스캇장군이 이끄는 7천명의 기병대 총칼 위협에 정든 집에서 소 돼지처럼 끌려 나온 엄마, 아빠, 아들, 딸들은 말뚝 친 들판에 가두어 졌다가 1938년 10월부터 이듬 해 3월까지 5개월여의 유폐여행을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 추방의 대이동을 조금은 낭만스럽게 눈물의 행로(Trail of Tears)라 부르지만 사실은 혹독한 겨울에 강행한 죽음의 행진이었다. 조상대대의 뼈가 묻힌 삶의 터전인 고향을 떠난 1만 6천 여명의 체로키인들은 테네시와 캔터키를 지나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을 건너 후일 오클라호마로 불리는 곳까지 이르는 행렬과정에서 추위와 피로, 그리고 굶주림으로 4천 여명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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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의 행로’이야기를 조부모부터 들은 인디언 혈통의 작가 포리스트 카터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이라는 자전적 소설에서 그 당시 처절했던 상황을 묘사한 부분이 있어 옮겨 적는다. 


‘고향 산에서 멀어져 가자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체로키의 혼은 죽지도 약해지지도 않았지만 , 어린아이와 노인들과 병자들이 그 까마득한 여행 길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병사들도 행렬을 멈추고 죽은 사람을 묻을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수는 순식간에 몇 백 몇 천으로 불어나, 결국 전체의 삼분의 일이 넘는 체로키들이 행진 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3일에 한번씩 만 매장할 시간을 주겠노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체로키에서 손을 떼고 싶은 게 병사들의 심정이었다. 병사들은 죽은 사람들을 수레에 싣고 가라고 했지만, 체로키들은 시신을 수레에 누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안고 걸었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던 조그만 남자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다시 여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병사들이나 행렬 양 옆에서 서서 자신들이 지나가는 걸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는 일도 없었다. 길가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체로키들은 울지 않았다. 어떤 표정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체로키들은 마차에 타지 않았던 것처럼 울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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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행로’를 피해 산속으로 도망간 사람들과 오클라호마에서 되 돌아 온 사람들을 모아 만든 곳이 지금 스모키산 자락에 있는 인디언 레저베이션 이다. 체로키인은 오클라호마에 30여만명, 스모키 산에 1만 여명이 살고있다. 


스모키 산 입구에 있는 인디언 박물관내 극장 스크린에 나오는 인디언 할머니는 말한다. 
‘얼굴 흰 사람들(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약속을 하였지만 모두가 깨졌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다, 우리 땅을 갖겠다고 약속했고 그들은 우리 땅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