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三界唯心 萬法唯識

장백산-1 2014. 6. 23. 01:20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4-12 三界唯心(삼계유심) 


道流(도류)야 眞佛無形(진불무형)이요 眞法無相(진법무상)이라 儞祗麼幻化上頭(이지마환화상두)에 

作模作樣(작모작양)하야 設求得者(설구득자)나 皆是野狐精魅(개시야호정매)요 並不是眞佛(병불시

진불)이니 是外道見解(시외도견해)니라. 夫如眞學道人(부여진학도인)은 並不取佛(병불취불)하며

不取菩薩羅漢(불취보살나한)하며 不取三界殊勝(불취삼계수승)하고 逈然獨脫(형연독탈)하야 不與

物拘(불여물구)니라. 


乾坤倒覆(건곤도복)하야도 我更不疑(아갱불의)하며 十方諸佛現前(시방제불현전)하야도 無一念心喜

(무일념심희)하고 三塗地獄頓現(삼도지옥돈현)하야도 無一念心怖(무일념심포)하나니 縁何如此(연하

여차)오 我見諸法空相(아견제법공상)일새 變即有(변즉유)하고 不變即無(불변즉무)니라. 三界唯心

(삼계유심)이요 萬法唯識(만법유식)이니 所以(소이)로 夢幻空花(몽환공화)를 何勞把捉(하로파착)

하니라. 


‘道流(도류)야 眞佛無形(진불무형)이요’, 참다운 부처는 形象이 없고‘眞法無相(진법무상)이라’, 眞法은 

相이 없다. ‘儞祗麼幻化上頭(이지마환화상두)에’, 그대들이 祗麼幻化上頭에, 有形하고 有相한 어떤 佛, 

그그런 부처를 生覺하는 거죠. 그래서 ‘作模作樣(작모작양)하야’, 生滅心인 生覺 妄想 分別로 부처를 

이런 모양으로도 짓고 저런 모양으로도 지어서 ‘設求得者(설구득자)나’, 그렇게 해서 부처를 모양이나 

形像으로 설사 구해서 얻는다 해도 ‘皆是野狐精魅(개시야호정매)다’, 이건 여우의 靈魂이다 이 말이여. 

여우라고만 해도 이상한 동물인데 거기다 여우가 죽은 鬼神이라면 그건 더 이상하죠. 여우가 죽어서 

鬼神이 된 狀態를 野狐精魅라고 그러거든요. 그와 같이 부처를 形이나 相으로 求하면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그런 입장으로 흘러가버린다 이겁니다. 眞正한 부처는 形象이 없고 참다운 法은 어떤 形相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形象이나 形相에서 眞佛이나 眞法을  찾으려고 한다면 거기 形 相에서 설사 

진불이나 진법을 구해서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 形과 相에서 求한 佛이나 法 그것은 全部 죽은 여우 

鬼神을 뒤집어 쓴 거와 같은 그런 입장이다라는 말입니다. 


‘並不是眞佛(병불시진불)이니’, 아울러 이런 佛이나 法은 참부처(眞佛)이 아님으로. 形象, 外形으로 

모양을 쫓아가는 거는 眞佛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是外道見解(시외도견해)니라’, 형상 외형으로 

부처를 구하는 것은 이것은 外道들의 見解다. 외도들의 소견이다. 定常的인 眞理를 깨달은 사람으로

서의 所見은 지극히 平凡하고 아주 定常的이고 順理的인 소견이죠. 


‘夫如眞學道人(부여진학도인)은’, 예컨대 참다운 道를 공부하는 사람은 ‘並不取佛(병불취불)하며’,  

아울러 부처(佛)라는 相도 取하지 아니하며 ‘不取菩薩羅漢(불취보살나한)이라’, 보살이나 아라한

이라는 相도 取하지 아니하고, ‘不取三界殊勝(불취삼계수승)하고’, 三界가 殊勝하다는 相도 取하지 

아니하고, 三界에서 殊勝한 어떤 相도 取하지 아니하고. ‘逈然獨脫(형연독탈)하야 不與物拘(불여

물구)니라’, 멀리 홀로 벗어나가지고서 事物로 더불어 拘束받지 않는다. 不與物拘, 事物로 더불어 

拘碍받지 않는다. 어디에도 끄달리지 않는 隨處作主, 主人公  참나는, 어떤 狀況 속에서도 내가 

主人으로서 當當히 살아가는 참나, 본래면목, 진짜 나 입니다. 


‘乾坤倒覆(건곤도복)하야도’,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고  엎어지더라도 ‘我更不疑(아갱불의)하며’, 

참나인 나는 더 이상 거기에 의심이 없으며 ‘十方諸佛現前(시방제불현전)하여도’,  시방제불이 

내 앞에 現前한다 하더라도, 앞에 乾坤이 도복한다고 하는 건 하늘과 땅이 그냥 뒤집어져서. 땅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땅이 되는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거기에 조금도 疑惑이 없고  반대로 

시방제불 즉, 宇宙萬物이 한꺼번에 내 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無一念心喜(무일념심희)하고’, 

生滅心인 한 生覺도 마음에서 기뻐할 게 없어. 시방 제불도 시방 제불이라는 相이고  이름이자 

몫이지 내 몫은 아니다 이거여. 나는 내 人生이 있는데 相으로서의 觀念으로서의 十方諸佛이 

참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 말이야. 그러니까 十方諸佛이 참나 앞에 現前한다 하더라도 기뻐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가르침 입니까. 


‘三塗地獄頓現(삼도지옥돈현)하여도’, 삼도지옥이 한꺼번에 다 내 앞에 불쑥 나타난다 하더라도 

‘無一念心怖(무일념심포)하나니’, 한 생각도 마음에서 조금도 두려워할 바가 없다. 自己 主體性인 

참나 主人公 본래면목이 이렇게 確立이 돼 中心이 딱 잡혀있으면 대단한 겁니다. 


어째서 내 앞에 모든 부처님(諸佛)이 나타나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삼도지옥이 나타나더라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느냐. ‘縁何如此(연하여차)오’, 무엇을 因緣해서 이와 같이 主體性, 참나, 主人公이 ,

確立이 되어 中心이 딱 잡혀 있느냐. ‘我見諸法空相(아견제법공상)일새’, 나는 모든 法 즉, 우주삼라

만상만물이 空하다고 하는 事實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變即有(변즉유)하고 不變即無(불변즉무)니라’, 

주체성 참나 주인공 그것이 變化가 되면 있는 듯이 보인다. 主體性, 참나, 주인공이 變化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는 꿈과 같은 幻像, 幻想, 幻影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 주체성 참나 주인공이 變化하지 

아니하면 텅~비어서 아무것도 없다, 空하여 아무 일도 없다 .  


‘三界唯心(삼계유심)이요 萬法唯識(만법유식)이니’, 불교의 아주 중요한 용어죠. 삼계가 오직 마음(心)

이요, 만법이 오직 識(마음, 의식)이니, ‘所以(소이)로 夢幻空花(몽환공화)를 何勞把捉(하로파착)하니까’, 

信心銘에 있는 이 句節을 아주 잘들 써먹습니다. 신심명이 나온 두로 온갖 조사스님들은 신심명을 인용

하지 않은 이가 없고 또 영가의 증도가가 나온 후로는 또 증도가를 인용하지 않은 조사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신심명과 증도가는 禪詩의 백미로서 빼놓을 수 없는 가르침 입니다. 임제스님도 잘 引用을 하네요. 


夢幻空花(몽환공화)를 何勞把捉(하로파착)하리요, 이 世上이라고 하는 것이  꿈이고 신기루고 물거품

이고  그림자(幻影)이고  虛空에 핀 헛꽃이라, 그런데 그런 실체가 없는 이 세상을 어찌 애써 수고롭게 

붙들려고 하는가. 꿈 속에서 꾸는 꿈인데 어찌 그걸 잡으려고 헛되게 바보처럼 애를 쓰느냐 이 말입니다. 


得失是非 (득실시비)를 一時放却 (일시방각)하라. 이득과 손실, 옳고 그름 으로 區分하고 分別하는 一切

의 分別心, 分別意識, 알음알이(識)을 전부 다 놔버려라. 설사 좀 그른들 좀 옳은들, 좀 손실이 있은들 

이득이 있은들 그런 것에 그렇게 연연하지 마라. 일시방각하라, 다 내버려라. 


이러한 삶은 佛敎가 中國으로 건너와서 道敎와 만나면서 정말 獨特한 그런 佛敎를 다시 탄생시

켰는데 그 佛敎가 소위 禪佛敎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선불교만에 있을 수 있는 그런 내용이에요.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