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4-13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唯有道流(유유도류)의 目前現今聽法底人(목전현금청법저인)하야 入火不燒(입화불소)하며 入水不溺(입수불익)하며 入三塗地獄(입삼도지옥)하대 如遊園觀(여유원관)하며 入餓鬼畜生而不受報(입아귀축생이불수보)하나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無嫌底法(무혐저법)일새니라.
儞若愛聖憎凡(이약애성증범)하면 生死海裏沈浮(생사해리침부)하리니 煩惱由心故有(번뇌유심고유)라 無心煩惱何拘(무심번뇌하구)리오 不勞分別取相(불노분별취상)하면 自然得道須臾(자연득도수유)니라 儞擬傍家波波地學得(이의방가파파지학득)하면 於三祇劫中(어삼지겁중)에 終歸生死(종귀생사)하리니 不如無事(불여무사)하야 向叢林中(향총림중)하야 牀角頭交脚坐(상각두교각좌)니라.
‘唯有道流(유유도류)의 目前現今聽法底人(목전현금청법저인)하야 ’, 그 主體性이라고 하는 것, 그게 뭐겠습니까? 그것을 바로 여기서 임제스님은 바로바로 드러내 보여요. 오직 그와 같은 當當한 삶의 主體는 오직 여러분들의 目前(목전) 또 現今(현금), 지금, 지금 目前의 聽法底人(청법저인), 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바로 그 사람 그놈이다 이겁니다.
내가 가끔 말씀드리죠. 지금 말을 듣고 있거나 말을 하고 있는 이놈, 들을 줄 아는 그 事實, 그 能力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여. 비구도 아니고 비구니도 아니여. 그놈에겐 아무런 條件이 필요치가 않아. 남자다 여자다 하는 것을 超越해, 승속을 초월해 있는 것이요. 그러니까 그것을 가만히 우리가 思惟해보면 ‘入火不燒(입화불소)’, 불에 들어가도 그 事實은 타지 않는다는 거야. 이게 지금 비구로서나 비구니로서 듣는 것도 아니에요 이놈 이건. 참 神奇한 存在에요. 듣고 있다고 하는 그놈 그 事實은. 무슨 條件으로 듣고 있어요? 이놈은 아무 條件 없이 本來로 생긴 그 모습 그대로 활발발한 그 當體야.
이 事實 이놈이 우리가 흔히 마음이니 佛性이니 自性이니 法性이니 이런 이름으로 表現을 하는데, 이 사실 이놈이 우리 마음에서 思量으로라도 짐작이 되어져야 그게 自己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설명을 드리는 이유가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이놈 이 事實은 절대 이건 그 무엇도 아니야. 이놈은 무슨 條件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니까 불하고 아무 관계없는 거요. 그놈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入水不溺(입수불익)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를 않는다. 안 그렇겠어요? 이것은 이놈 이 事實은 물이라고 하는 條件도 아니고 불이라고 하는 條件도 아니니까.
‘入三塗地獄(입삼도지옥)하대’, 三塗地獄에 들어가도, ‘如遊園觀(여유원관)하며’, 저기 놀이公園에서 노는 거와 같애. 예를 들어서 잘못해서 法에 걸려가지고 형무소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아무 罪 없이 형무소에 들어갔든지 罪가 있어서 들어갔든지 간에. 몸은 수갑에 채워져서 형무소에 철장문 안에 갇혀 있지만 그놈 當體, 그것은 마음대로 세상을 돌아다니는 거야. 만날 사람 다 만나고 마음대로 세상을 돌아다녀. 그놈 그게 철장에 가둘 수도 없고 수갑에 채워지는 物件도 아니여. 그러니까 그놈은 삼도지옥에 들어가더라도 마치 놀이동산에서 노는 거와 같애.
‘入餓鬼畜生而不受報(입아귀축생이불수보)하나니’, 그 놈은 아귀축생에 들어가더라도 그 果報를 받지를 않나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그놈은 어째서 그와 같으냐. 무엇을 因緣해서 이와 같이 불에 타지도 물에 젖지도 않느냐. ‘無嫌底法(무혐저법)일새니라’, 싫어할 수 없는 法, 싫어함이 없는 法이다. 그놈은 좋다 나쁘다 하는 그런 선악을 떠난 存在이다, 그놈은 善惡등의 分別을 떠난 道理다 하는 말입니다. 그놈 그 事實은 좋다 나쁘다 하는 分別 是非를 超越한 存在다. 그놈 그 當體는 남녀도 초월해 있고 승속도 초월해 있고 동서도 초월해 있고 一切를 超越해있어 그래서 無所不在 全知全能하고. 그래서 生死까지도 超越해 있는 그 자리다.
‘儞若愛聖憎凡(이약애성증범)하면’, 그대들이 만약에 성인을 사랑하고 범부를 미워할 것 같으면 ‘生死海裏浮沈(생사해리부침)하리니’, 생사의 바다 속에서 가라앉았다 떴다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성인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固定된 實體가 없는 그 이름일 뿐이고 범부라고 하는 것도 固定된 實體가 없는 그 이름일 뿐이에요. 그놈은 범부도 성인도 아니여. 그저 사람이 있을 뿐인데 사람에게 우리가 이름을 지어 붙여놓고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生滅하는 마음인 生覺 妄想이 생긴 거죠. 우리의 意識이 固定된 實體가 없는 그런 말이나 이름 槪念 觀念 象徵들인 相을 쫓아다니다 보면 끊임없이 生滅心인 生覺놀음에 놀아나고 있는 거죠.
生死海裏(생사해리)에 浮沈(부침)하리니, ‘煩惱由心故有(번뇌유심고유)라’, 生滅心인 煩惱라는 生覺 妄想은 마음을 말미암은 까닭으로 있다. 우리 마음/意識이 범부니 성인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生滅心 分別心인 生覺 妄想에 끄달리지 아니함은 그야말로 마음에 動搖가 없다는 不動心의 뜻이고, 가라앉았다 떴다하는 生覺 妄想은 그야말로 生滅心이라.
‘無心煩惱何拘(무심번뇌하구)리오’, 生滅心 分別心인 煩惱 妄想인 生覺은 全部 마음을 말미암아 있는데 만약에 마음이 없다면 煩惱가 어찌 拘束하리오. ‘不勞分別取相(불노분별취상)하면’, 수고로이 分別心 生滅心에서 相을 取하지 아니하면 ‘自然得道須臾(자연득도수유)니라’, 自然히 道를 얻음이 須臾之間 잠깐 사이에 될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 意識은 對相 境界를 分別해서 取相, 相을 取하는데 그것을 分別해서 相을 取하지 않기가 너무 어렵죠. 우리 意識이 그거만 안한다면 지금 이 瞬間 現在 이 자리에서 그냥 現實 對相 境界가 다 道가 된다 그런 말입니다.
‘儞擬傍家波波地學得(이의방가파파지학득)하면’, 그대들이 傍家(방가), 옆집에다 自己 自身을 놔두고, 이 말입니다. 自己 自身을 옆집에 놔두고 波波地學得(파파지학득)이라, 아주 바쁘게 배워서 道를 얻으려고 한다면 ‘於三祇劫中(어삼지겁중)에’, 삼아승지겁 가운데서도 ‘終歸生死(종귀생사)하리니’, 三千 아승지겁이 지나면서 닦는다 하더라도 마침내 虛事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즉,生死로 돌아가서 輪廻하고 말 것이다. 죽고 살고 하는 이런 虛妄한 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랬습니다.
이 傍家(방가), 이게 重要한 거죠. 自己 自身인 나 말고 나 이외의 다른 옆집, 그 옆집이 經典이 됐든지 그 외 어떤 現象이 됐든지 간에 나 아닌 다른 옆집에 참나를 놔두면, 우리 意識이 내라고 하는 主體性인 主人公을 내버려두고 달리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工夫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삼아승지겁 동안 공부하고 닦는다 하더라도 마침내 生死 輪廻로 돌아가고 만다.
‘不如無事(불여무사)하야’, 生死 輪廻하는 것은 일 없음만 같지 않으니, 不如無事해서, ‘向叢林中(향총림중)하야’, 叢林을 向해 가지고서 ‘牀角頭交脚坐(상각두교각좌)니아’, 선상 위에, 牀角頭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는 선상 위에 앉아서 공부하니까 선상 위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세상을 지내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 말입니다. 叢林에 들어가서 無心하게 坐禪하고 있는 모양을 이야기하는 거죠. 生死 輪廻하는 것은 叢林에 들어가서 다리 꼬고 坐禪하는 그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참 바른 所見을 드러내는 立場에 있어서는 아주 뛰어난 가르침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