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법성게에서의 ‘法’이란 存在라 할 수 있습니다.
‘性稟은 참모습을 말하는 것이어서 ‘存在의 참모습’
卽, 眞理를 노래한 것이 바로 법성게라 할 수 있습니다.
法의 性稟, 存在의 참모습이란 어떤 것인가를 노래하고 있어요.
다시 한 번 읽어보면 法의 性稟 즉, 法性이란 둥글고 法界에 두루 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고 ,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一切가 끊어졌으니
이것은 깨달음의 智慧로만 알 수 있는 世界라는 것이지요.
또 法의 性稟/存在의 性稟은 極히 微妙하여 스스로의 性稟인 自性을 지키지 않고
宇宙法界의 因緣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
法의 참性稟 , 本來의 性稟은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했는데 ,
오늘 우리가 보는 現實 世界 우리가 보는 存在의 모습은 어떠하냐?
분명 여러 모양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모양이냐?
存在는 因緣 따라서 생겨나기도 하고, 그 因緣이 다하면 사라지기도 합니다.
또 사람들의 行動에는 착하고 나쁜 것이 있고 빠르고 느린 것이 있고,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라 區分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生覺을 봐도 그래요. 옳고 그른 生覺이 있습니다.
또 存在의 모습에는 아름답고 추한 것이 있어요.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고,
神靈스럽거나 神性視 여기는 것이 있는 반면 보거나 만지기만해도
不淨 타는 깨끗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풀에도 약이 되는 것이 있나 하면
독이 되는 것이 있고 , 큰 것 작은 것이 있고, 넓은 것 좁은 것,
늘어나는 것 줄어드는 것이 있어요.
(法性圓融無二相)
우리 意識은 물거품이나 그림자를 보듯이 꿈을 꾸듯이, 幻聽이나 幻覺狀態에 있는 것처럼
世上 事物의 本質을 잘못 보고 있습니다. 存在(法)의 참모습/참性稟에는 어떤 모양이 없습니다.
法의 참 性稟은 둥글고 宇宙法界에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어요.
世上 事物에 대한 모든 是非 分別心은 다 내 마음이 일으키는 生覺일 뿐이지,
存在 自體 卽, 諸法의 性稟 속에는 그런 是非 分別心이 있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 속 生覺인 是非 分別心이 끊어지면 諸法/모든 存在는 바로 그대로 如如하고 淸淨합니다.
本來부터 더럽고 깨끗함이 있어서, 더러운 것 버리고 깨끗한 것을 取해야 淸淨해짐이 아니라,
깨끗하고 더러움이 본래 없는 줄을, 그것이 다 내 마음이 일으킨 生覺일 뿐이라는 事實을 깨달았을 때,
諸法이 淸淨하다는 말입니다. 내 마음이 淸淨하면, 다시 말해 내 마음 속의 生覺과 分別心이 끊어지면
이 世界가 바로 있는 그대로 ‘淸淨佛國土’라는 말입니다.
제법부동본래적. (諸法不動本來寂)
存在의 참모습 卽, 諸法의 본바탕은 움직임이 없고 본래 고요하다.
이 말은 더러워 졌다가 깨끗해지고, 깨끗해 졌다가 더러워지고 하는 것은 단지 내 生覺이 바뀐 것이지,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심심극미묘
不守自性隨緣成 불수자성수연성
眞性이란 참 性稟을 말합니다. 法性/法의 性稟의 다른 表現이지요.
眞理의 性稟은 이와 같이 깊고도 微妙해서, 自性을 지키지 않고 因緣 따라 나타납니다.
眞理는 깊고 그 眞理의 作用이 至極히 微妙해서 우리 意識이 理解하는 次元에서는 想像할 수가 없어요.
自己가 農事를 짓고는 그 收穫을 남에게 주면서 기뻐하는 善知識이나,
自己가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能力이 있는데도 恒常 地獄에 가 있는 地藏菩薩이나,
원효대사 같은 분을 우리의 意識이 理解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사께서는 세상에서 온갖 추앙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버리고,
천대받던 뽕 따는 아낙네와 뺌 잡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춤추고 노래했어요.
한번 붓을 들었다 하면 ‘대승기신론소’나 ‘금강삼매경론’같은 책을 저술 하는 등
어떤 지식인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佛法을 꿰뚫은 존경받는 학승이었음에도
그것을 내려놓고 길거리로 나가 모든 중생과 함께 하며 ‘僧俗’의 모양에 구애받지 않고
불법을 전파했어요. 물이 特定한 自己 形態를 갖고 있지 않기에 그릇의 모양을 따라
물의 모양이 바뀌듯이 원효대사께서는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나투셨는데,
이것을 화작(化作)이라합니다.
‘千手經’에 ‘罪라 하고 業이라 할만한 스스로의 性稟이 없고 그것은 마음 따라 일어난다.’
는 구절이 있습니다. 罪다 業이다 할만한 씨앗(自性)이 없으며, 罪나 業은 어리석은
이 生覺만 사라지면 罪 또한 없어진다는 말이죠.(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是罪亦亡)
不隨自性이란 ‘스스로의 性稟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약이다 독이다, 길다 짧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스스로의 性稟(自性)을 지키지 않는다.
根本佛敎의 ‘我라 할 것이 없다'는 無我는 ‘固定된 實體가 없는 나’와 같고,
大乘佛敎의 ‘我는 비어 있다 (我空)’ 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밥그릇이고 저것은 국그릇이고, 또 저 먼 것은 찬그릇이라고 定해져 있는 게 아니라,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고,
찬을 담으면 찬그릇이 됩니다. 이것이 諸法의 實相입니다.
스스로의 性稟(自性)이 없어서 因緣 따라 이루어지는데(隨緣成), 이 말은 아주 重要합니다.
補藥으로 유명한 人蔘도 本來는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닙니다. 그러나 因緣 따라서
약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효과 없을 때도 있고, 처음은 약효를 나타냈다가도
나중에는 독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먼저 독성을 나타냈다가
나중에 약효를 나타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든 存在(法)은 因緣 따라서 잠시 잠깐 나타나는 것이지 어떤 固定된 實體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 世上 모든 것들이 꿈 같고 물거품 같고 허깨비 같고 그림자 같고, 아침이슬이나 번갯불 같습니다.
증지소지비여경 (證智所知非餘境).
證智란 ‘깨달음의 智慧’를 뜻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觀念을 벗어나야 알 수 있지.
觀念의 울타리에 갇혀서는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요.
같이 工夫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앉아서 졸다가 뱀 꿈을 꿉니다.
“어어 뱀 봐라, 뱀. 저거 쫒아내야지.” 꿈꾸는 사람에게 뱀은 實在하고 있어요.
꿈속에 있을 때는 깨어 있는 사람과는 얘기가 안 됩니다. 그러나 꿈을
깨고 나면 뱀이 없다는 事實을 아는데, 깨지 않았을 때는 뱀이 분명히 있었어요.
實際의 存在(法) 自體에 더러움이나 깨끗함의 性稟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법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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