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행복으로 이끄는 인연법

장백산-1 2014. 8. 31. 19:07

 

 

 

행복을 여는 因緣法  (혜국스님)             

신해행  2014.04.26. 00:15    cafe.daum.net/mindprajna/5PFW/3079   마음에 해 뜰 무렵    

 

이제껏 살아오면서 혹시 自身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나는 가끔씩 ‘나와 아주 똑같은 사람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生覺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법문을 하거나 의례를 주관해야 되는데 몸이 퉁퉁 붓고 감기가 들었을 때는 참으로 쉬고 싶습니다. 

실로 대중 앞에 서야 하는 사람은 休息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과의 약속, 꼭 해야 할 일등에 쫒겨 무리를 하다보면 몸의 한 쪽이 아파오기 始作합니다.

이 아픔이 무엇입니까? “야, 좀 쉬면서 하라는데 왜 계속 무리를 하는 거야? 
살짝 병을 줄테니 핑계 삼아 쉬어라. 그래야 오래 건강을 유지하지” 이렇게 몸이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病의 警告音을 들으며서도 쉬지 못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바로 그때 나와 목소리가 같고 모양새가 똑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오늘은 내 대신 네가 법문 좀 해라. 나는 쉴란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으면 쉬고 싶은 날,
“나 대신 우리 집에 가서 밥하고 아이들 돌보아 다오.”,
“우리집 보살이 필요로 하는 일들을 두루 도와주고 와라.”고 한다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世上에 똑같이 생긴 몸은 없습니다. 

地球上의 몇 십억 사람 중에 나처럼 생긴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입니다. 

오직 하나뿐인 몸! 이 얼마나 貴重하고 貴한 몸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이 귀중한 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은 몸은 自身을 위해 서럽게 울어줄 수도 없고 저승길로 인도해 줄 수도 없습니다.
화장터로 옮겨져 한 줌의 재가 되거나 땅 속에 묻혀 썩어 갈 뿐입니다. 

그때서야 ‘아하!. 내가 속았구나. 한平生 이 몸뚱이를 主人으로 모시고, 먹여 달라면 먹여주고, 
놀아달라면 놀아주며 살았는데, 끝내는 이렇게 虛無하게 背信을 당했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佛子들에게 자주 들려줍니다.

百年이라 눈 깜짝할 時間이건만 
그동안 얻고 잃고 기뻐하고 슬퍼했던
숫한 일들을 어이 다 헤아리리. 
이보게 잘난이 못난이 貴한이 賤한이
畢竟에는 北邙山의 한 줌 흙이 된다네

지나간 世月을 떠올려 보면 時間이 참 빨리도 흘렀다는 生覺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다가오는 세월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나는 늘 달력을 만들어 나누어 드립니다.
올해 달력을 만든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다시 새 달력을 만들어야 하듯, 
人生은 금방금방 지나가고 時間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人生은 無常하고 時間은 하염없이 빨리 흘러 가는데, 지금 우리는 

이 하나 밖에 없는 貴重한 ‘나’를 어디로 끌고 가야 하는 것일까요? 
먹고, 사교하고, 놀러 다니거나, 연속극 등에 빠져, 살아야 할까요? 
오늘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을 所重히 가꾸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한번 곰곰히 生覺해 보십시오. 

‘나’의 人生이 과연 무엇에 의해 끌려 다니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우리는 이 사바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所重한 나의 몸을 잘 이끌어 가는 方法이 무엇인지를 恒常 生覺해야 합니다. 
늘 몸을 잘 이끌어 가시밭길로 가지 않고 들국화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길을 거닐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자주자주 돌아보면 틀림없이 아름다운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衆生들의 삶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떻게’를 돌아보기는 커녕 익힌 業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남 말하기 좋아하는 病, 조금 힘들면 남을 탓하는 病에 걸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무슨 일만 생기면 바로 누군가를 怨望하거나 슬픔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을만 와도 우울증에 빠져 잠만 잡니다. 잠을 많이 익힌 사람은 法會에 참여해서도 

그 모습이 그대로 나옵니다. 法師가 애써 法門을 하고 있는데도 쭉 퍼져서 자고 있습니다. 

 

이처럼 잠을 많이 익힌 사람은 잠자는 쪽으로 스스로를 이끌고, 화을 자주 내는 사람은 성내는 쪽으로 

스스로를 이끕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關心이 온통 남한테로 기울고, 
남 탓하고 남을 怨望하는 삶은 自己 反省을 모르며, 非觀的인 사람은 점점 더 우울증 속으로 빠져듭니다.

辱 잘하는 사람은 問題 解決에 앞서 辱부터 하고, 술을 많이 익힌 사람은 每事를 술로 해결하려 하며, 

담배를 익힌 사람은 어떤 일이 생기면 담배부터 찾습니다. 

이처럼 그저 自己가 平所에 익힌 習慣/業習대로 스스로를 이끌게 되는데, 이 익힌 것을 이라고 합니다.
人生은 내가 지어 놓은 業/行爲/身口意 三業에 依해, 지금까지 내가 익혀 놓은 習慣/業習에 依해 이끌려 집니다. 
오랫동안 習慣的으로 익힌 自身의 業, 곧 훈습된 自身의 業力에 이끌려 살게 됩니다.

 

그런데 問題는, 처음 그 業을 만든 것은 나인데, 나중에는 그 業이 나를 끌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實로 잘살고자 하면 바로 이때 運命을 開拓해야 합니다. 業을 다스리고 바꾸는 運命 開拓의 妙法을 

베풀어야 하는데, 그 妙法이 바로 十二因緣법, 곧 十二緣起法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緣起를 보는 者는 를 보고, 를 보는 者는 緣起를 본다”고 分明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는 무엇입니까? 바로 참된 부처입니다. 緣起를 分明히 보면 참된 부처를 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緣起는 인연소기(因)를 줄인 말입니다. 
이 世上 모든 것이 ‘인(因)과 연(緣)이 和合하여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곧, 緣起法에 依해서 내 삶의 根本이 무엇인지, 나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展開 될 것인지, 
나와 이 世上의 關係, 모든 生命의 根源 등을 알 수 있게 됩니다.

 

十二因緣法의 基礎는 因果法과 因緣法입니다. 因果法은 다 알고 있듯이, 

어떠한 일에는 반드시 原因이 있고, 그 原因에 依하여 結果가 생긴다는 平凡한 眞理입니다. 
착한 因을 심으면(緣) 착한 果報가 따르고, 惡한 因을 심으면(緣) 惡한 果報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因緣法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도 생겨난다(此生故彼生)’는 緣生法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此滅故彼滅)’는  緣滅法으로 

構成되어 있습니다.緣生法에서 보면 人間의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생겨 나는지를 12段階로 分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2緣起法으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無明을 因緣하여 행(行 : 마음의 動搖/行業)이 생기고,
 行을 인연하여 식(識 : 識別能力)이 생기며,
 識을 인연하여 명색(名色 : 精神과 肉體, 色聲香味觸法)이 생긴다.
 名色을 인연하여 육입(六入 :眼耳鼻舌身意 여섯 感覺器管)이 생기고,
 六入을 인연하여 촉(觸 : 닿음)이 생기며,
 觸을 인연하여 수(受 : 느낌)가 생긴다.
 受를 인연하여 애(愛 : 애착)가 생기고,
 愛를 인연하여 취(取 : 취함)가 있으며,
 取를 인연하여 유(有 : 존재/有業)가 생긴다.
 有를 인연하여 생(生 : 태어남)이 있고,
 生을 因緣하여 노(老 : 늙음), 病, 사(死 : 죽음), 

 우(憂 : 걱정), 비(悲 : 슬픔), 고(苦 : 괴로움), 뇌(惱 : 번뇌)가 있게 되느니라.

이렇게 늙고 병들어 죽는 등의 괴로움이 생기는 까닭을 無明부터 차례로 觀하는 것을 

順觀이라 하고 流轉門이라고 합니다. 그럼 모든 괴로움(苦痛)을 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根本이 되는 無明을 滅해야 합니다. 老死가 멸하면 生이 滅하고, 生이 滅하면 有가 滅하며, 
有가 滅하면 取가 滅하고, 나아가  無明이 滅하게 된다고 觀해야 합니다. 
이렇게 觀하는 것을 역관(逆觀)이라 하고 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流轉門을 따라 괴로움 쪽으로 흐르는 因緣은 緣起法에 依해 變化해가는 過程의 連續일 뿐이므로 

諸行無常이요, 變化해 가는 過程의 連續 그 속에서는 어느 것 하나 獨立되고 固定된 實體가 없으니 諸法無我이며, 

還滅門을 좇아 나아가면 마침내 涅槃寂靜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부처님 不變의 法門인 諸行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의 三法印이 十二因緣法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중생이라면 누구할 것 없이 살아가면서 견디기 힘든 일을 겪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때, 

부처님을 믿는 우리 불자들은 苦痛 속에서 몸부림치지 말고 이렇게 生覺해야 합니다.

“이러한 苦痛스런 일들이 왜 생겼는가? 잘 살펴보니 緣起法에 依해 생겨난 것이구나.

내 無明心으로 因해 지은 業 때문에 생겨난 것이구나. 이러한 苦難은 나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지금 그 業의 흐름을 바꾸면 能히 모든 苦痛을 녹일 수 있다.” 이렇게 生覺이 바뀌면 苦難을 받아들이는 

方法도 달라지고, 괴로움의 깊이나 크기도 상당히 달라집니다. 부처님 당시의 이야기를 한편 하겠습니다.

中印度 마갈타국의 빈비사라王은 석가모니불께 歸依 하여 불교 교단에 큰 힘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성군의 정치를 펼쳐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末年은 비참했습니다.
아들 아사세 태자의 반란 때문이었습니다. 아사세 태자는 영축산의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돌아오는 부왕을 죽이고 王이 되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부왕인 빔바사라王을 

감옥에 가두어 죽지 않을 정도의 물과 곡기만을 조금씩 들여 보내며 탈진하기를 기다렸습니다.


빈비사라왕은 감옥 속에서 信心으로 苦痛의 나날을 넘겼습니다. 그러나 한달 두달, 한해 

두해가 지나고 3년이 거의 다 차게 되자 석가모니부처님을 向한 怨望의 마음이 솟아 올랐습니다.

“저는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수없이 供養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祈禱를 빠트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結果가 이렇단 말입니까?”

그때 부처님께서는 天耳通으로 빈바사라왕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저렇게 죽으면 왕은 無間地獄에 떨어지리라.’ 부처님께서는 곧 神通力으로 

빈바사라왕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王의 過去를 想起 시켰습니다.

 

“王이시여, 지금부터 이십여年 前에 사람을 한 명 죽이지 않았습니까?”
“아, 어떻게 그것을? 부처님이시여. 죽였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제 나이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아들이 없었습니다. 답답했던 저는 占星家를 불러 물었고, 
점성가는 비부라山에 있는 늙은 修行者가 3년 뒤에 죽어 다음 생에 저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欲心이 發動한 저는 그 3년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곧 비부라山으로 달려가 수행자에게 부탁했습니다. 

‘선인이시여, 당신은 나와 父子의 因緣이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저는 아들을 빨리 얻고 싶습니다. 

나이도 많이 드셨으니, 곧 바꾸어 태어남이 어떠하올지요?’ ‘나는 아직 3년을 더 살 수 있소. 3년 뒤에 봅시다.’

 

씁쓸한 感情을 안고 宮으로 돌아온 저는 제 欲心에 맞추어 生覺을 整理했습니다.
‘어차피 나의 아들이 될 사람이면 3년을 더 사나 지금 죽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차라리 지금 죽여 王宮에서 便安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으리라.’ 
저는 믿을만한 臣下를 시켜 그 修行者를 죽였고, 그 臣下는 地下 監獄에 가두었으며,
그후 마침내 아사세가 태어났습니다. 아! 제가 그 業報를 받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사세 태자는 장성할 때까지 밝은 정치를 펼치는 부왕을 무척이나 尊敬하고 따랐씁니다. 

그러나 前生의 怨結은 어찔 할 수 없는 法. 장성한 태자의 마음에는 부왕에 대한 알 수 없는 殺心이 

일어나기 始作했고, 어느 날 王宮의 地下 監獄에 들어갔다가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를 발견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냐? 어찌 감옥 속에서 다시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냐?”
‘저희는 모르옵니다. 오래 전부터 이 감옥에 있었으나, 혀가 잘린 듯 말을 하지 못합니다.’
아사세 태자는 이미 반 짐승처럼 되어버린 죄수에게 갇힌 까닭을 물었지요. 

그러자 죄수는 약 20여년 前에 大王의 命을 받아 自身이 修行者를 죽였고, 그 事實이 

밖에 傳해질 것을 우려하여 혀를 잘라 지하 감옥에 가둔일 등을 글로 써서 알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前生의 일을 알게 된 태자는 참을 수없는 噴怒에 휩싸여 부왕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사세태자는 王을 금방 죽이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빼앗은 빚만 갚고자 했다면 바로 죽였을 것인데, 

남은 생명 3년에 대한 빚이 있기 때문에 감옥 속에서 3년 동안을 굶주리며 괴로워하는 苦痛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빈비사라王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뉘우쳤습니다.
“世上을 怨望하고 부처님을 怨望하였더니, 내가 지은 罪業를 내가 받고 있었구나. 
내가 지어놓은 罪業만큼을 받고 있었구나. 부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아들을 빨리 얻을 欲心으로 修行者를 죽였습니다. 이 모든 罪業를 眞心으로 懺悔하오니, 

부처님이시여 길을 열어 주옵소서”

 

그때 부처님께서는 神通力으로 十方世界의 佛國土를 王에게 보여주셨고, 王은 西方 極樂淨土를 擇하였으며, 

마침내 숨을 거둔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과 慈悲力에 依持하여 極樂淨土에 往生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主人公인 빈비사라왕의 비극적인 業報는 無明心인 欲心때문에 생겨난 그릇된 業/行爲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곧 十二因緣의 流轉門을 따라 흘러갔기 때문에 苦痛의 果報를 받게 된 것입니다. 

 

왕과 비부라山의 수행자는 前生에, “너와 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되자”고 맹세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왕이 이를 어기고 아들을 갖고자 하는 欲心과 邪見때문에 수행자를 3년前에 죽이게 되자 怨結이 맺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 怨結로 태자가 아버지를 3년 동안 감옥에 가두어 苦痛을 받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因緣法을 몰랐던 빈비사라왕은 모든것이 怨望스럽고 미웠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지은 罪業, 내가 지은 빚을 갚고 가는 것이었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받아야할 이 業報, 지금 받아서 차라리 多幸이다.’ 이렇게 生覺을 바꾼 빈바사라왕은 

便安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었고, 마침내 극락세계로 갔으니, 그야말로 地獄과 極樂이 한 생각 差異였다는 

事實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아들 딸 중에 애먹이는 사람이 있거나, 夫婦 또는 姑婦 간에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이 이야기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갈등이 모두 내 마음이 만들어 놓은 業때문이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구나’라는 生覺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業報, 모든 厄難과 苦痛은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다는 事實을 分明히 알아야 합니다.

이 業이 어디서 왔을까요? 業의 根本자리는 緣起法을 通하여 볼 수 있습니다. 
實로 人生은 생각/마음/의식이라는 백지장에 業(생각/마음/의식, 말, 행동인 三業)이라는 붓이 쓰는대로 끌려 갑니다.
反對로 그 쓴 것을 지워버리고 다시 백지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음工夫요, 道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緣起를 아는 것입니다.


緣起法을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헬렌켈러'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릴 때 눈이 멀게 된 그 헬렌켈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世上은 苦通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苦通을 克復하는 대단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世上은 그 苦痛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이끌어 간다.”

 

부처님께서도 이 世上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셨습니다. 

一切皆苦는 ‘온 世上이 苦痛으로 꽉 차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苦痛은 因緣따라서 생겨난 것이기에 

그 因緣의 原因을 찾으면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緣起法의 核心要点 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四聖諦 法門을 잘 理解하고 八正道를 닦으면 

그 苦痛을 벗어나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八正道는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으로, 

백지장과 같은 마음상태로 돌아가는 여덟가지 바른 道입니다. 

도(道) ! 이 道에 대한 재미있는 禪問答이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때의 대도인이셨던 조주스님께 한 스님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道란 어떠한 것입니까?”
“道는 도(道), 곧 길이다.”
“그럼 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길? 길은 저 담장 밖에 있지.”
“아니, 누가 그런 길을 물었습니까?”
“그런 너는 무슨 길을 물었느냐?”
“큰 道, 대도(大道)말입니다. 大道.”
“아, 큰 길은 長安으로 通하지.”

結局 質問한 스님은 화가 나서 가버렸지만, 조주스님의 답이 맞는 말입니다. 
길은 담장 밖에 있고, 큰 길은 서울인 장안으로 통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道人들은 허례허식이 붙지 않는 참된 말을 합니다. 이 참된 말이야말로 道人들의 一句 입니다.
조주스님께서 ‘담장 밖에 있다’고 하신 것은 文字 그대로 담장 밖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질문한 스님은 이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참말은 문자와 다릅니다. 참말은 있는 그대로 말해 줍니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 다니는 꼬맹이가 

백자 도자기를 가리키며 “이건 무엇으로 만들었나요?”하고 물으면 “흙이야”라고 말해 줍니다.
흙으로 만들었으니까 ‘흙’이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얀 도자기를 흙이라고 하니 

유치원생 아이는 도무지 믿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 아이와 같습니다.

하얀 도자기의 根本은 흙입니다. 道人의 一句는 本來의 뿌리를 말해 주는 것이지요,
조주스님의 대답은 道의 根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아갈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共通的으로 나아갈 길은 愛着과 無明  以前의 便安한 자리로 가는 길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世上을 살다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생기면 마음이 즐거워 집니다.
그러다가 몸이라도 조금 아파오면 그저 世上이 귀찮아 집니다. 


남들에게 억울한 말을 들으면 속 상하고, 자식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속이 까맣게 탑니다.
만약 여러분이 便安한 자리, 幸福한 世界로 가고싶다면 道를 닦아 삶의 모든 現象이 因緣法이요, 緣起法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因緣法을 通하여 내가 지은 모든 業의 根源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根本자리, 本體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모든 삶은 세상은 내가 지어논 業과 내가 지어놓은 習慣/業習대로 끌려가는 것이다. 
萬物의 靈長이요 가장 貴重한 내가 고작 無明心인 貪心과 瞋心과 癡心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녀서야  되겠는가?  

欲望 欲心이 자라고 하면 자고, 먹으라고 하면 먹고 있지 않은가? 
대체 欲望이 일어나는 根本자리는 무엇인가?’ 이렇게 自身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끊임없이 精進해야 합니다.

 

熱誠을 다해, 精誠을 바쳐 努力하면 반드시 아름다운 結實을 맺을 수 있습니다.
音樂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소리를 위해 音樂家들이 人生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美術. 舞踊 등의 藝術도 다 같습니다. 예술이란 마음을 바친 만큼 感動을 주게 됩니다.
마음工夫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工夫에 精誠을 쏟는다면, 살아 生前의 幸福은 물론이요. 죽은 다음 

염라대왕 앞에서도 當當할 수 있습니다. 염라대왕이 “너는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면

 

“나는 내 마음을 사랑하는 法을 배웠고, 마음農事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고 緣起法을 익혀 欲望 以前의 根本자리를 찾고, 

‘나는 누구인가?’하는 話頭를 들고 마음공부를 하다가 왔다”고 對答하면 됩니다.
그러면 염라대왕이 달려나와 “몰라 뵈었습니다.”할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核心인 緣起法, 이 緣起法에 立脚하여 生覺하고, 말하고, 行動하면

내 앞에 펼쳐지는 世上이 달라집니다. 어둡던 마음자리가 光明으로 바뀌고, 

얽히고 설킨 채 무언가에 束縛되어 살았던 삶이 大自由의 삶으로 바뀌며, 

不幸의 濁한 氣運들이 幸福의 에너지로 바뀝니다.

 

부디 緣起法을 깨닫는 마음工夫, 내가 나를 眞正으로 사랑하는 方法을 익혀, 

平和와 幸福을 만끽하는 멋진 人生을 꾸려 가시기를 祝願 드리면서 이달의 法門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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