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여는 因緣法 (혜국스님)
이제껏 살아오면서 혹시 自身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실로 대중 앞에 서야 하는 사람은 休息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과의 약속, 꼭 해야 할 일등에 쫒겨 무리를 하다보면 몸의 한 쪽이 아파오기 始作합니다. 이 아픔이 무엇입니까? “야, 좀 쉬면서 하라는데 왜 계속 무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이 病의 警告音을 들으며서도 쉬지 못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오늘은 내 대신 네가 법문 좀 해라. 나는 쉴란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世上에 똑같이 생긴 몸은 없습니다. 地球上의 몇 십억 사람 중에 나처럼 생긴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입니다. 오직 하나뿐인 몸! 이 얼마나 貴重하고 貴한 몸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이 귀중한 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서야 ‘아하!. 내가 속았구나. 한平生 이 몸뚱이를 主人으로 모시고, 먹여 달라면 먹여주고,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佛子들에게 자주 들려줍니다.
人生은 無常하고 時間은 하염없이 빨리 흘러 가는데, 지금 우리는 이 하나 밖에 없는 貴重한 ‘나’를 어디로 끌고 가야 하는 것일까요?
‘나’의 人生이 과연 무엇에 의해 끌려 다니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우리는 이 사바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所重한 나의 몸을 잘 이끌어 가는 方法이 무엇인지를 恒常 生覺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자주자주 돌아보면 틀림없이 아름다운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衆生들의 삶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떻게’를 돌아보기는 커녕 익힌 業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남 말하기 좋아하는 病, 조금 힘들면 남을 탓하는 病에 걸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그대로 나옵니다. 法師가 애써 法門을 하고 있는데도 쭉 퍼져서 자고 있습니다.
이처럼 잠을 많이 익힌 사람은 잠자는 쪽으로 스스로를 이끌고, 화을 자주 내는 사람은 성내는 쪽으로 스스로를 이끕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關心이 온통 남한테로 기울고, 辱 잘하는 사람은 問題 解決에 앞서 辱부터 하고, 술을 많이 익힌 사람은 每事를 술로 해결하려 하며, 담배를 익힌 사람은 어떤 일이 생기면 담배부터 찾습니다. 이처럼 그저 自己가 平所에 익힌 習慣/業習대로 스스로를 이끌게 되는데, 이 익힌 것을 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問題는, 처음 그 業을 만든 것은 나인데, 나중에는 그 業이 나를 끌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베풀어야 하는데, 그 妙法이 바로 十二因緣법, 곧 十二緣起法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緣起를 보는 者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者는 緣起를 본다”고 分明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나는 무엇입니까? 바로 참된 부처입니다. 緣起를 分明히 보면 참된 부처를 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緣起는 인연소기(因緣所起)를 줄인 말입니다.
十二因緣法의 基礎는 因果法과 因緣法입니다. 因果法은 다 알고 있듯이, 어떠한 일에는 반드시 原因이 있고, 그 原因에 依하여 結果가 생긴다는 平凡한 眞理입니다.
因緣法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도 생겨난다(此生故彼生)’는 緣生法과, 構成되어 있습니다.緣生法에서 보면 人間의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생겨 나는지를 12段階로 分析하고 있습니다. 우(憂 : 걱정), 비(悲 : 슬픔), 고(苦 : 괴로움), 뇌(惱 : 번뇌)가 있게 되느니라. 順觀이라 하고 流轉門이라고 합니다. 그럼 모든 괴로움(苦痛)을 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根本이 되는 無明을 滅해야 합니다. 老死가 멸하면 生이 滅하고, 生이 滅하면 有가 滅하며,
이렇게 流轉門을 따라 괴로움 쪽으로 흐르는 因緣은 緣起法에 依해 變化해가는 過程의 連續일 뿐이므로 諸行無常이요, 變化해 가는 過程의 連續 그 속에서는 어느 것 하나 獨立되고 固定된 實體가 없으니 諸法無我이며, 還滅門을 좇아 나아가면 마침내 涅槃寂靜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중생이라면 누구할 것 없이 살아가면서 견디기 힘든 일을 겪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때, 부처님을 믿는 우리 불자들은 苦痛 속에서 몸부림치지 말고 이렇게 生覺해야 합니다. “이러한 苦痛스런 일들이 왜 생겼는가? 잘 살펴보니 緣起法에 依해 생겨난 것이구나. 내 無明心으로 因해 지은 業 때문에 생겨난 것이구나. 이러한 苦難은 나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方法도 달라지고, 괴로움의 깊이나 크기도 상당히 달라집니다. 부처님 당시의 이야기를 한편 하겠습니다. 성군의 정치를 펼쳐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末年은 비참했습니다. 올리고 돌아오는 부왕을 죽이고 王이 되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부왕인 빔바사라王을 감옥에 가두어 죽지 않을 정도의 물과 곡기만을 조금씩 들여 보내며 탈진하기를 기다렸습니다.
두해가 지나고 3년이 거의 다 차게 되자 석가모니부처님을 向한 怨望의 마음이 솟아 올랐습니다. “저는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수없이 供養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祈禱를 빠트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結果가 이렇단 말입니까?” 그때 부처님께서는 天耳通으로 빈바사라왕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저렇게 죽으면 왕은 無間地獄에 떨어지리라.’ 부처님께서는 곧 神通力으로 빈바사라왕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王의 過去를 想起 시켰습니다.
“王이시여, 지금부터 이십여年 前에 사람을 한 명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欲心이 發動한 저는 그 3년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곧 비부라山으로 달려가 수행자에게 부탁했습니다. ‘선인이시여, 당신은 나와 父子의 因緣이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저는 아들을 빨리 얻고 싶습니다. 나이도 많이 드셨으니, 곧 바꾸어 태어남이 어떠하올지요?’ ‘나는 아직 3년을 더 살 수 있소. 3년 뒤에 봅시다.’
씁쓸한 感情을 안고 宮으로 돌아온 저는 제 欲心에 맞추어 生覺을 整理했습니다. 그러나 前生의 怨結은 어찔 할 수 없는 法. 장성한 태자의 마음에는 부왕에 대한 알 수 없는 殺心이 일어나기 始作했고, 어느 날 王宮의 地下 監獄에 들어갔다가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를 발견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냐? 어찌 감옥 속에서 다시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냐?” 그러자 죄수는 약 20여년 前에 大王의 命을 받아 自身이 修行者를 죽였고, 그 事實이 밖에 傳해질 것을 우려하여 혀를 잘라 지하 감옥에 가둔일 등을 글로 써서 알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前生의 일을 알게 된 태자는 참을 수없는 噴怒에 휩싸여 부왕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사세태자는 王을 금방 죽이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빼앗은 빚만 갚고자 했다면 바로 죽였을 것인데, 남은 생명 3년에 대한 빚이 있기 때문에 감옥 속에서 3년 동안을 굶주리며 괴로워하는 苦痛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길을 열어 주옵소서”
그때 부처님께서는 神通力으로 十方世界의 佛國土를 王에게 보여주셨고, 王은 西方 極樂淨土를 擇하였으며, 마침내 숨을 거둔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과 慈悲力에 依持하여 極樂淨土에 往生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主人公인 빈비사라왕의 비극적인 業報는 無明心인 欲心때문에 생겨난 그릇된 業/行爲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곧 十二因緣의 流轉門을 따라 흘러갔기 때문에 苦痛의 果報를 받게 된 것입니다.
왕과 비부라山의 수행자는 前生에, “너와 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되자”고 맹세한 사이였습니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怨結로 태자가 아버지를 3년 동안 감옥에 가두어 苦痛을 받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因緣法을 몰랐던 빈비사라왕은 모든것이 怨望스럽고 미웠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지은 罪業, 내가 지은 빚을 갚고 가는 것이었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받아야할 이 業報, 지금 받아서 차라리 多幸이다.’ 이렇게 生覺을 바꾼 빈바사라왕은 便安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었고, 마침내 극락세계로 갔으니, 그야말로 地獄과 極樂이 한 생각 差異였다는 事實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아들 딸 중에 애먹이는 사람이 있거나, 夫婦 또는 姑婦 간에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이 이야기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갈등이 모두 내 마음이 만들어 놓은 業때문이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구나’라는 生覺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業이 어디서 왔을까요? 業의 根本자리는 緣起法을 通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緣起를 아는 것입니다.
“이 世上은 苦通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苦通을 克復하는 대단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부처님께서도 이 世上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셨습니다. 一切皆苦는 ‘온 世上이 苦痛으로 꽉 차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苦痛은 因緣따라서 생겨난 것이기에 그 因緣의 原因을 찾으면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緣起法의 核心要点 입니다.
그 苦痛을 벗어나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백지장과 같은 마음상태로 돌아가는 여덟가지 바른 道입니다.
백자 도자기를 가리키며 “이건 무엇으로 만들었나요?”하고 물으면 “흙이야”라고 말해 줍니다. 유치원생 아이는 도무지 믿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 아이와 같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因緣法을 通하여 내가 지은 모든 業의 根源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根本자리, 本體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欲望 欲心이 자라고 하면 자고, 먹으라고 하면 먹고 있지 않은가?
熱誠을 다해, 精誠을 바쳐 努力하면 반드시 아름다운 結實을 맺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工夫에 精誠을 쏟는다면, 살아 生前의 幸福은 물론이요. 죽은 다음 염라대왕 앞에서도 當當할 수 있습니다. 염라대왕이 “너는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면
“나는 내 마음을 사랑하는 法을 배웠고, 마음農事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고 緣起法을 익혀 欲望 以前의 根本자리를 찾고, ‘나는 누구인가?’하는 話頭를 들고 마음공부를 하다가 왔다”고 對答하면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核心인 緣起法, 이 緣起法에 立脚하여 生覺하고, 말하고, 行動하면 내 앞에 펼쳐지는 世上이 달라집니다. 어둡던 마음자리가 光明으로 바뀌고, 얽히고 설킨 채 무언가에 束縛되어 살았던 삶이 大自由의 삶으로 바뀌며, 不幸의 濁한 氣運들이 幸福의 에너지로 바뀝니다.
부디 緣起法을 깨닫는 마음工夫, 내가 나를 眞正으로 사랑하는 方法을 익혀, 平和와 幸福을 만끽하는 멋진 人生을 꾸려 가시기를 祝願 드리면서 이달의 法門을 마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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