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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 인문학적인 해석

장백산-1 2014. 9. 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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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rda | 2014.09.02. 01:15    http://cafe.daum.net/truenature/KIMF/5272 

   

 

한형조(韓國學中央硏究院 哲學科 敎授)

色卽是空의 現代 物理學的 解釋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어디에나 있다. 고즈넉한 산사이든, 번잡한 도심이든, 『반야심경』은 장엄하고

유장하게 울린다. 반야심경은 아주 짧고 강렬하며 반복적이어서 귀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법이 없다.
독송이 시작되고 나서 곧 우리는 예의 그 신비한 어구와 맞닥뜨린다.

사리자(舍利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

나는 오랫동안 색(色)과 공(空)의 倂置와 反復으로 이어가는 이 暗號같은 구절의 의미가 궁금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속 시원히 풀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 모를 한문 주석을 들이대거나, 자기식의 해석을 독단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 그나마 한적(漢籍)들은 먼지에 덮여갔고, 話頭가 佛敎의 中心에 서면서, 이 뜻을 알려는 意志 또한 희미하게 시들해져 간 듯해 안타깝다.

그러던 차, '色卽是空'이 급기야 섹스 코메디 영화의 제목으로까지 등장했다. 제작자는 틀림없이, 이 말을

"섹스[色]는 허망[空]하다"로 패러디해서 읽었을 것이다. 영화 안에는 동물적 섹스를 넘어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는 젊은이들의 몸짓이 코믹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묻는다. "그런데, 원래는 色卽是空이 무슨 뜻이었더라···?" 최근에 이 구절의 의미는 상식으로는 알 수 없고, 亞原子世界에 대한 現代物理學의 成果만이 解決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나왔다. 이 傾向은 廣範圍하게 受容되고 있어, 特別한 注意가 필요하다. 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불교가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事物의 實相을 수천 년 전에 이미 깨우쳤다. 그들은 事物의 最少 單位인 原子 內部가, 단단히 채워져 있지 않고, 빈~ 방처럼 虛空이라는 것을 알았다. 原子 內部는 빈~ 방 안에 떠도는 먼지들의 신비한

引力에 의해 固體처럼 堅固해 보일 뿐이다! 그렇다. 색(色), 즉 '物質'로 보이는 것들은 實際로는 '비어있다(空).'

붓다는 이 소식을 오랜 수행을 통해 깨달았던 것이다.

드디어 千古의 秘密이 풀렸는가? 그들은 물질[色]과 비물질[空] 사이의 境界가 모호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이 알리고자 한 世上의 秘密이라고 傳한다. 그들에 따르면 『般若心經』의 名句,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이렇게 解釋된다.

物質은 非物質이고, 非物質은 곧 物質이다. 物質은 非物質과 다르지 않고, 非物質은 物質과 다르지 않다.

나는 이 解釋이 根本的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고 生覺한다. 기원전의 붓다들이 거대한 실험 장비들을 동원해야 볼 수 있는 亞原子 世界를 洞察했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불교는 물리적 대상을 다루는 과학이 아니라, 心理的 現實에 대한 洞察과 助言이라고 生覺하기 때문이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그럼 이 수수께끼처럼 뒤채는 색(色)과 공(空)의 辯證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消息을 알리고자 하는가.

태조 이성계와 무학 사이에 오간 농담

태조 이성계와 왕사 무학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딱딱한 신하들과의 격식과 공식사무에 지루해 하던 절대권력자 이성계가

친구인 무학대사에게 이를테면 '야자타임'을 제안했다.


"대사, 우리끼린데 너무 딱딱하게 하지 말고, 오늘은 농이나 한번 합시다."
"좋지요."  "누구부터 할까요?"  "전하부터 하시지요."
"그러지요. 그럼 나부터 시작합니다.

대사의 상판은 꼭 돼지처럼 생겼소이다."
"그런가요? 전하의 용안은 부처님 같으십니다."

농담을 하자는데, 무학이 정색으로 자신을 찬양하자, 이성계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허, 대사. 농담하는 시간이라니깐."
"전하,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옵니다."

이성계는 이 한 방에 껄껄 웃고 말았다고 한다. 이것은 그러나 농담이 아니고, 人間의 根本 眞實을 보여주고 있는

진담 중의 진담이다. 역시 우리가 보는 世上은 自己의 그림자(幻影)일 뿐이다. 卍海? 한용운은 「님의 침묵」 序文에서 이렇게 읊었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우리가 보는 世界는 내 안의 欲望과 關心이 投映(project)된 '이미지[相]'일 뿐이다. 그런데 問題는 사람들이 이 事實을 모른다는 데 있다. 늘 그놈의 '무

無智[無明]'가 탈이다. 우리 모두는 程度의 差異는 있지만, 自己가 보는 世上이 客觀的이라고 錯覺하며 산다. 그래서 언제나 "너는 틀렸고, 내가 옳다"고 우긴다.

『반야심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

人間이 사는 世上은, 이렇게 서로 다른 自我의 利害關係가 衝突하는 마당이며, 그들이 만든 그림자로서의 이미지들이 뒤섞여 어지러운 混沌이다. 불교는 이들 서로 다른 自我의 利害關係를 計算으로 調整하거나, 엇갈리는 世界相의 衝突을 討論으로 標準化하려 하지 않는다. 불교의 解法은 根本的이고 래디칼하다. "人類는 數千萬年동안 내려온 그 오랜 習性을 고쳐야 한다." 그 核心은 '自我의 偏派的 活動'을 制禦하고, 나아가 '이미지로서의 世界'를 깨부수는 데 있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쉽겠는가. 自己 欲望의 推動力은 强力하고, 自己 防禦의 메카니즘 또한 隱密해서, 웬만해서는 이 暴風을 거스를 수 없다. 뿐인가? 그 活動은 거의 無意識的으로 作動하기에, 스스로에게는 感知조차 되지 않는다. 불교의 독특한 '智慧[般若]'는 이 메카니즘을 鮮明히 理解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理解가 곧 解放이다." 현대 심리학에서처럼 불교는 隱蔽된 心理的 動機와 無意識的 活動을 透明하게 바라보기 始作하면서, 오랜 輪廻의 질곡을 벗어나 그리도 그리던 解放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그 眞實을 깨달은 者의 탄성, 혹은 눈물이다.

 

『반야심경』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대강 초벌로 번역하면 이렇다. "觀自在菩薩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제,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洞察하시고, 一切의 苦痛과 災難으로부터 벗어나셨다." 관자재보살은 이름 그대로, "이제는 자유롭게[自在] 사물을 볼[觀] 수 있게 된" 사람을 뜻한다. 自由롭게 보기는 정말 어렵다. 그것은 物質을 透過하여, 혹은 場所의 制約을 넘어 事物을 볼 수 있는 神通力을 意味하는 것이 아니라, 自身의 監獄으로부터 벗어나 事物을 볼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自我의 重力으로 휘어진 世界

다시 말하지만, 世界의 그림은 自我들의 重力에 의해 휘어져 있다. 심하면 거친 유리에 비친 映像처럼 뒤틀어져 있기도 하고, 또는 깨진 유리조각에 비친 風境처럼 손쓸 수 없이 뒤죽박죽이기도 하다. 색(色)이란 바로 그렇게 '自我의

投映으로서 드러난 世界'를 가리킨다. 공(空)이란, 그 이미지와 幻想으로서의 世界가 主觀的 偏見과 利害關係의 産物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實在하지 않는다. 즉, "色은 곧 空"이다.

이 主觀性을 떠나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다. 平生 한번도 이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 大部分이다.

우리네 人生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事實을 自覺하고 사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대로, 이

사태를 自覺하고 나면, 그는 變하기 始作한다. 그것도 根本的으로···.

自身의 存在가 世界를 汚染시키고 있다는 自覺에 宇宙萬物에 미안해하고, 그것을 純化시켜가는 것이 불교의 길이다. 그 훈련이 깊어가면서, 그리고 마침내 오랜 無意識的 習性까지 淨化되기 始作하면서 世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찐득한 欲望의 世界는 事物의 透明한 連繼로 나타나기 始作하고, 마침내 自我에 의한 오염과 굴절이 전혀 없는, 人類의 集團的 幻想과 偏見으로부터 解放된 眞正한 世界, 있는 그대로 卽, 진여(眞如)의 世界가 나타난다. 이 世界를 『반야심경』은 空卽是色이라고 불렀다. '自我의 흔적을 지운[空] 눈에 드러난 세계[色]'는 어떤 모습일까.

평등(平等), 혹은 뜰 앞의 잣나무

그 여여(如如)한 世界는 바로 코앞에 역력히 있기에 누구나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世界만큼 아득히 먼 것도 없다. 왜냐 하면 우리는 無始以來의 무명(無明), 卽 自己關心의 色眼鏡을 벗어던지기가 거의 不可能하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가 불교 전체를 수놓고 있는 逆說의 眞源地이다. 불도(佛道)는 너무 쉬우면서도, 또 너무나 어렵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발뒤꿈치 한번 돌리면 환하게 열리는 소식이지만, 그러나 億劫을 뼈를 깎고 피를 태워도 여전히 아득한 이 消息을 어찌 하오리까. 自我의 粘着을 떠나 自由롭게 바로 본 世界는 어떤 모습일까. 禪家의 비유를 빌리면

'뜰 앞의 잣나무'는 과연 어떤 얼굴로 우리에게 드러날까.

불교는 그때 世界는 우선, 수많은 契機들이 서로 얽혀 흘러가는 도도한 江, 혹은 춤추는 群舞로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연기(緣起)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事物들이 서로 緣起되어 있다는 것은 事物들 사이에, 그것을 構成하는 要素들 사이에 境界가 없다는 것을 含縮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事件을 構成하는 하나의 '原因' 혹은 '自性(自性)'을 우리는 分離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서로 連續되어 있고, 또한 同時에 總切的이다.

하나의 要素[法]는 다른 要素와 인연(因緣)에 依해 모여 잠정적 사태[行]를 形成했다가, 찰나에 滅하면서 이어진다. 그리하여 宇宙는 찰나에 滅하는 法들의 緣起的 過程(proscess)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거기 그렇게 흘러간다." 이 宇宙的 過程의 認識에서 다음과 같은 重大한 歸結이 導出된다. "우리는 그들 법(法) 사이의 價値의 優劣을 매길 수 없다!" 불교는 이것을 '평등(平等)'이라는 말로 特稱化했다. 平等은 지금은 機會 均等이나 富의 公正한 配分 등과 聯關된 말이지만, 本始 이 말은 불교가 事物들의 絶對的 無差別性을 나타내기 위해 썼던 말이다. 장자는 이 말을

"학의 다리 긴 대로, 참새다리 짧은 대로"라는 경구로 표현하고 있다.

불교는 말한다. "世上은 平等하다." 거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길고 짧음도 없고, 좋아하고 싫어함도 없으며, 명예도 좌절도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수긍하기 쉽지 않겠지만, 삶도 죽음도 없다. 생사(生死), 즉 삶과 죽음의 '區分'은,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꺼리는 人間의 自我가 作動한 것이고, 그 區分은 世界에 대한 不當한 干涉이기 때문이다. 禪師들은 그래서 "여기 생사(生死)는 없다"고 말하길 즐겨 했다. 이 귀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불교는 없다

『반야심경』은 이 자리를 노래한다. 色卽是空이라, "人間이 손대고 덧붙인 모든 흔적은 虛妄하다.

삶과 죽음조차도 그렇다. 삶도 죽음도 없는 판에, 불교는 어디 있겠으며, 사성제(四聖諦) 12연기(緣起)며,

오온(五蘊) 육식(六識)이며, 緣起法이며 華嚴의 理致인들 어디 있겠는가." 무슨 그런 불경스런 망발이 있느냐고?

『반야심경』의 끝자락이 바로 그 섬뜩 아득한 소식을 전해 주고 있다.

사리자야, 우리는 事物과 世界를 두고, 태어난다거나 사라진다고 말할 수 없다. 그곳은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人間的 흔적을 덧붙일 수도 없고, 늘어난다거나 줄어든다는 世俗的 得失도 운위할 수 없다. 自我의 介入이 根源的으로 遮斷되어 있는 곳이기에, 거기 사람과 自然은 區分되지 않으며, 主體와 對相 또한 分離될 수 없고, 바라보는 視線과 거기 잡히는 風境도 둘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人間에게는 原初的 無智가 있다는 것도 생뚱맞고, 그것을 除去해야 한다는 권유도 쓸데 없다. 늙고 죽음의 槪念도 없으니, 그 늙고 죽음을 超越할 수도 없지 않은가. 生老病死가 도무지 없는 판에, 붓다가 超越과 解放의 方法으로 가르친 네 가지 聖스러운 眞理 또한 뜬금없는 소리이다. 記憶하라. 요컨대 깨달음이란 것도 농담이니, 더구나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라는 期待는 더더욱 황당하다는 것을···1)

이것이 불교의 최종적 가르침이다. 『반야심경』은 삶에 대한 執着은 물론, 그것을 넘어서고자 불교에 依持하려는 모든 人間的 試圖까지를 拒折하고 있다. 그래서 말한다. "불교는 없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 佛敎는 虛無主義가 아니다. 相對主義도 아니다. 佛敎는 바로 그렇게 모든 希望과 期待를 버릴 때, 그때 비로소 眞正한 解放, 어느 것에도 制約되지 않은 絶對的 自由와 永遠의 救援을 얻는다고 말한다. 『반야심경』의 피날레는 이 '때 아닌 祝福'을 나지막히, 그러나 힘있게 전해주고 있다.

··· 깨달음도 없고, 그리하여 얻는 것도 없으니, 요컨대 모든 것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이 眞實을 알게 될 때,

마음속의 障碍物이 사라지고, 너는 內的 混亂과 存在의 오랜 不安으로부터 自由로와진다. 그때 世上은

自我의 投映으로서가 아니라 本來의 맨 얼굴로 화장기 없이 드러날 것이니, 보디스바하, 너는 비로소 人類를

옭죄고 있던 個人的  集團的 幻想의 그물로부터 벗어난다. 그곳이 구원[究竟涅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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