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 완릉록 21-2 상견외도(常見外道)와 단견외도(斷見外道)

장백산-1 2015. 1. 22. 19:05

 

 

 

 

 

◈ 완릉록 21-2 상견외도(常見外道)와 단견외도(斷見外道)

 

 

 

 

 

◈ 완릉록 21-2 상견외도(常見外道)와 단견외도(斷見外道)

 

 

等覺이니 妙覺이니 하는 지위와 차례를 단박에 뛰어 넘어서

絶對로 또 다른 生覺으로 흘러들어가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우리 선종의 가문에 비슷하게나마 들어오는 것이다.
너희 輕妄한[取次] 사람들이야 이 法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으로 헤아릴 때에는 그 헤아리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여 버리고,
한편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을 때에는 또 헤아리지 않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인다.
그렇다고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닐 때에는

또 역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의 마구니에 묶인다.
그러므로 마구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마음에서 저절로 나온다'고

말한 것이니라.


이것은 오직 신통 없는 보살은 그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니라.
만약 언제든지 마음에 恒常하다는 견해[常見]가 있으면 그것이
바로 상견외도(常見外道)이며,
만약 一切의 法은 공(空)하다고 관(觀)하고
마음이 모든 것은 空하다는 見解에 빠지면
그것이 바로 단견외도(斷見外道)이다.

 

 

********원오당 한소리********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지위와 차례를 단박에 뛰어 넘어서

절대로 또 다른 생각으로 흘러들어가서는 안된다.]

 

앞단에서 치우침에 대하여 설하는 대목 그대로 이어져 설하신다.

等覺과 妙覺은 三界인 欲界와 色界 無色界를 뛰어넘어

부처님과 平等한 마음의 見處를 등각(等覺)이라하고

부처님의 不思議한 心力과 마음이 衆生의 願과 바램과 보살행이 필요함에

般若智慧인 神通妙用이 절로 나오는 境地를 일러 묘각(妙覺)이라하며

이때 부터가 바로 부처님의 탄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러나 황벽스님은 等覺이 되었으니까

나도 이제 부처님고 같은 반열이라는 생각을 하거나

妙覺이니 내가 바로 부처님이다 하면서 그것에 치우치면

바로 마구니의 마음 境界가 됨으로

그 어떤 치우침의 마음도 없고 生覺이 없는

一切의 微細煩惱까지 消滅된 無心의 境地를 있는 그대로를 觀하여

이 모든 差別的 地位가 原來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見處에 따라 세운 이름과 생각일 뿐임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 어떠한 길로도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말이며

平常心을 유지하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래야 禪宗의 家門의 祖師로써의 기본이 된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해야
로소 우리 선종의 가문에 비슷하게나마 들어오는 것이다.]라고

그래서 선문이란 마음에서 모든 것을 텅~비우고

일어나는 마음을 觀하여 언제나 平常心에 安心立命해야 되는 것이니

어찌 일반 불자들이야 넘볼수도 없는 境界임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輕妄한[取次] 사람들이야 이 法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라고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法門을 이어가신다.

여기서 取次人이 무엇일까?

佛敎人들이 지금 절에 가는 원인을 좀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내가 願하고 求하는 바를 위대한 부처님의 威信力에 의지해서 얻어내려는

祈福的 次元을 넘어서는 불교신자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祈福信仰 이것이 佛敎를 사라지게 한 根本原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禪佛敎가 사라진 原因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佛敎의 顯敎마져 사라졌다.

 

선불교 현교가 사라진 원인은

祈福이라는 欲望의 成就를 위한 欲界 衆生에게 第一 必要한 것은

財物과 名譽와 權力으로 이것이 人間 삶의 最高의 目的으로 되어 있는데

어찌 이를 위해 祈禱하고 發願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그렇다 맞다. 그렇게 살면 된다. 그래서 人間이니까!

 

그렇다면 西區의 一流의 富를 蓄積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製一 幸福해야 한다.

그런데 幸福指數만은 正反對이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일 수록 잘사는 사람과 잘 못사는 貧困層의 差別相은

極과 極으로 對置하여 서로가 서로를 믿지도 못하고 서로 죽이고 살생하는

地獄苦를 치루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 先進國으로 進入한다고 하지만

벌써 밤거리를 거니는 낭만은 사라지고 밤길 조심하고 사람 조심해야 하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한 差別的 戰爭이 始作되었다.

 

우리의 삶이란 무엇일까?

내 스스로 삶의 主人公이 되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마음 便安히 幸福을 누리고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願하는 삶일 것이다.

 

그런데 그 目標가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中國에서 건너온 祈福 信仰의 道敎가 지금의 佛敎가 되어 버렸다.

절에서 行하는 모든 行爲와 儀式은 全部 中國 道敎의 産物이다.

佛供. 禮佛. 천도. 부적 비방 四物 역시 全部 道敎的 儀式이고 道敎의 産物이다.

어디에서 佛敎를 찾을 수 있을까???

 

그대들은 보았는가.

몇년 前 韓國의 十大 善知識이 2년 동안에 다 末法時代를 豫告라도 하듯이

涅槃에 드셨다.

그런데 그 열명 선지식의 第者들이 모두가 49제를 행하고 백일제를 행하고

년년 기일제를 행하고 있다.

그 儀式으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왔는지 그리고 그 돈으로 무엇을 한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무명누더기 한벌로 平生을 사신 善知識의 靈前에 똥물을 퍼붓는 꼴이지 않은가.

그 제자들의 지금의 面面을 한 번 보라 아직도 전국에서 그 영혼만 팔아

마구니 중에 마구니 짓만 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불자들의 잘못이다.

 

소승불교을 행하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無知하고 못산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대들도 生覺해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의 宗敎는 다 祈福이고 欲望의 副産物이다.

어느 宗敎도 眞理를 말하지 않는다.

聖人들의 참뜻을 말하지 않는다.

眞理를 참뜻을 말하면 세상 사람이 다 안 믿을 것이니까

그렇게되면 종교 장사가 안될 것이니까

 

그래서 오직 삿된 것만 가리켜야 믿는다

왜?

顚倒夢想에 사로잡힌 衆生이니까

뒤집힌 마음에 바른 것을 보여주면 꺼꾸로 된 것이라며 辱하고

다시는 안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自己 마음에 비친 相을 自己觀念으로 비추어 보니까

있는 그대로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할 말이 없다.

부디 自省自覺하시어서 正見이 되시기만 바라고 바랄뿐.

 

그래서 황벽스님도 마구니를 이렇게 설하신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으로 헤아릴 때에는 그 헤아리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여 버리고,
한편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을 때에는 또 헤아리지 않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인다.
그렇다고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닐 때에는

또 역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의 마구니에 묶인다.] 

이것이 바로

제자인 임제가 말하는 3현이요 3구인 것이다.

혜아릴 때는 혜아리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이고

혜아리지 않는 때는 헤아리지 않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이고

혜아리지 않는 것도 아닐 때는

혜아리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의 마구니에 묶인다. 고 하시어

무엇이든 마음의 길이 생기면 바로 그 길로 마음이 빠지게 되며

이 빠져드는 마음을 마음의 마구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바로 안심입명(安心立命) 평상심(平常心)에 住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마구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마음에서 저절로 나온다'고 말씀한 것이니라.
이것은 오직 신통없는 보살은 그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니라.]

그렇게 平常心에 住하려고 하나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바로 識心이다.

識心은 저절로 境界따라 나타나고 境界따라 사라짐이 根本이니

아무리 努力한다고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황벽스님도 신통없는 菩薩은 그 발자취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觀念化된 識心따라 나타나는 報身과 化身은

보살의 境地에 가지 않고는 알 수 없는 境地 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말하는 마음은 全部 報身과 化身만 느끼고 알고 있으니,

언제나 恒常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마음이니

마음은 언제나  恒常한다는 見解와

이 化身과 報身은 마음의 實體가 아니니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 마음은 거짓이며

실로 마음이라고 할만한 마음이 없는 것이며

寂滅이라고 하는 見解를 警戒코자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만약 언제든지 마음에 恒常하다는 견해[常見]가 있으면 그것이
바로 상견외도(常見外道)이며,
만약 一切의 法은 공(空)하다고 관(觀)하고 모든 것이 空하다는 見解에 빠지면
그것이 바로 단견외도(斷見外道)이다.]

 

왜 그럴까?

여기에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淸淨法身인 마음의 本體이며 心地인 마음이 빠져있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비록 報身과 化身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해도

그 모든 것을 生하게 하고 滅하게 한 마음거울의 本體는 變함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거울속에 비친 相은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비치지만

그 심상(心相)만 놓고 본다면 상견(常見)도 단견(斷見)도  맞다고 해야 하지만.

그것은

심지(心地)를 모르는 外道들의  形相만으로 判斷하는 마구니임으로

이 모든 相은  본지풍광(本地風光)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