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본래 마음'은 인식작용의 대상이 아니고,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본질이다

장백산-1 2015. 2. 8. 20:54

 

 

 

2. 법문(法門) : '본래 마음'은 인식작용의 대상이 아니고,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본질이다.

 

 

 


여러분이 질문하는 걸 보면, 대개 그 원인과 답까지도 정확하게 진단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계속 불편한지,

내가 왜 생각을 쉬지 못 하는지· · ·원인까지도 다 알아요. 그런데 그 원인을 알아서 그 원인을 해소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서 놓여난다는 그 구조가 만약 옳은 거라면, 우리 인류는 벌써 모든 문제를 다

해결했어야 맞아요.· · 원인을 알아서 원인을 除去함으로 해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런 生覺은, 우리가

相對世界에서 줄곧 살아왔기 때문에 생겨난 思考方式일 뿐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苦痛이 지금 싫지요? 고통이 싫어서 고통을 除去하기 위한 努力을 하지요? 그래서 설사

그 노력이 이루어졌다 해도, 그 自體가 相對的인 거요.· · · 이쪽저쪽이란 말입니다. 계속 이쪽저쪽이에요.

우리 意識 世界의 構造 自體가 그렇게 相對的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그 싫어하는 내용이 뭐였건 상관없이

뭔가를 지금 싫어한다는 건 그와 反對되는 것을 希求한다는 얘깁니다. 이게 소위 二元性이오. 그게 지금

둘로 갈라져서 사단이 난 겁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 如如한 마음에는 둘로 갈라진 要素라는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感覺機能, 認識機能이

생기면서부터 認識의 主體를 세우고 認識의 對相을 세우는 그런 버릇이 생긴 거요. 그렇게 認識의 主體와 客體를

전혀 別個의 것으로 認定하기 始作하면서부터 우리의 마음이 둘로 갈라진 겁니다. 本來 '한 마음'은 認識의 主體니

客體니 하는 나뉘어진 두 法이 없는 거요.

우리는 本來의 마음을 몰라요. 모를 수밖에 없는 게, '本來 마음'을 알았다 하면 그건 이미 本來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本來의 마음이 어떤 거라고 아무도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것은,

'이것은 이런 것이다', '過去에 내가 알았던 그 어떤 것하고 같은 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머리에 떠올라야 돼요. 그러나 本來의 마음은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그런 對相이 아닙니다. 나에 의해서

認識되어질 수 있는 그런 對相이 아니고, 나의 모든 知覺作用을 可能하게 하는 그 本質입니다.

여러분, 影畵를 볼 때 스크린에 카메라가 안 나타나죠?

카메라로 영화를 찍지만 카메라는 카메라 그 自體를 드러낼 수가 없잖아요?

이게 무슨 뜻인지 理解하면, 우리 '本來 마음'이라는 게 나에 의해서 認識되어질 수가 없다는 事實을 알게

될 겁니다. 우리의 모든 知覺作用, 그게 멍청한 知覺作用이건 똑똑한 知覺作用이건 모든 知覺作用의 本質,

根源이 우리의 '本來 마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本來 마음'은 絶對로 追究할 수가 없어요. '本來 마음'을 얻기 위한 努力은 아무 意味가 없다

이런 얘기요. 追究하는 것은 '本來 마음'이 아니고, 그 '本來 마음'이 두 번 세 번 굴러서 그럴싸하게 여겨지는

어떤 心象이요. 내가 그린 어떤 이미지, 理想.

'本來 마음'은 우리가 追究할 수도 알 수도 없어요.

說明할 수도 없고 알아보려고 해도 소용없는, 時間 空間을 넘어선 存在입니다. 왜 그렇겠어요?· · ·

우리의 生覺이 굴러서, '本來 마음'이 굴러서 時間槪念이니 空間槪念이니 自我槪念이니 하는 게 생긴 거요.

人間이 開發해낸 어떤 理論도 넘어서 있어요. 人間이 構成해낸 어떤 價値 尺度에도 걸리지 않아요.

價値觀을 넘어서 있다 그런 소립니다. 그건 完全히 本源的인 걸 말하는 거요. 그게 우리 '本來 마음'이오.

'본래 마음'은 智慧롭지도 않고 멍청하지도 않아요.

本來的인 마음 어디서 얻는 게 아니고,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이 몽땅 實體가 없는 텅~빈 虛妄한

것이라는 事實을 깨달으면, 그래서 그 虛妄한 마음만 따라가지 않으면, '本來 마음'은 恒常 거기에 있었던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本來的인 마음은 온 누리에 充滿해서 두루해 있다는 事實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自己中心的으로 스스로를 孤立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나하고 너가 嚴然히 다르게

보이지만, 本來 性稟, '本來 마음'은 온 누리에 두루 充滿해서 모든 이런 것과 모든 저런 것이 時空을 超越해

몽땅 한 뿌리요, 한 성품, 한 근원, 한 마음, 한 바탕인 겁니다.

 

우리가 지금 마음工夫를 하기 때문에 便宜上 '本來 마음'이라고 하지만, 佛家에서는 本來마음이라는

이름을 淸淨自性, 法性, 法界, 眞理, 眞如, 如來, 眞心, 本來面目 등등 여러 名稱으로 부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여러 日常用語 中에서 가장 가까운 말이 있다면, '素朴한 마음' 정도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소(素)'라 하는 게 '흴 소'자요. 전혀 雜된 게 끼여들지 않은, 어떤 槪念도, 어떤 理論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論理的인 根據,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根據가 끼여들지 않은 本來的인 것,· · ·

素朴하고 淸淨한 청정심(淸淨心)을 말합니다. 이때의 淸淨이란, 더러운 것을 排除하고 깨끗한 것을 取하는 게

아니고,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그런 相對的 槪念이 一切 붙지 않은 純粹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素朴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우리가 '이것이 素朴한 마음이다'라고 直接的으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까,

素朴한 마음 아닌 것를 알아내 봅시다. 우리가 부르고 있는 마음 이름가운데 素朴한 마음이 아닌 거,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훌륭한 意味를 賦與하고 있는, 社會的인 道德性이라든가, 훌륭하다고 추구하고 있는 것, 어떤 理想을

만들어놓고 그 理想에 接近하기 위해서 努力하는 그것이 과연 이 素朴한 마음에 該當하는가 안 하는가 지금 그걸

알아보는 거요.

 

素朴한 마음, 本來 마음, 淸淨한 마음은 追究할 수가 없어요. 새삼스레 追究할 그 어떤 對相도 아니고

우리 本來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本來 내 건데 뭘 追究하겠어요? 그래서 '부처가 또 부처를 찾는다'거나,

'대장부가 머리를 두고 또 머리를 찾는다'는 말이 있는 거요.

지금 우리는 참으로 追究하는 게 많죠? 眞理니 理想이니 하는 게 全部 우리가 追究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의 생각 마음을 自由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眞理밖에 없다는 둥, 그런 비슷한 소리를 많이들 들어왔잖아요?

그런데 대개 이 世上에서 普遍的으로 追究하고 있는 '똑똑한 精神'은 素朴한 마음이 아닙니다. 이 소릴 들으면

二元性으로 길들여진 여러분은 금방 '그럼 멍청한 精神이면 되겠네' 하겠지요?· · · 똑똑한 精神도 틀리는데

멍청한 精神을 어디다 쓰겠어요?

知識이 많거나 信念이 많은 精神은 素朴한 精神 마음이 아닙니다. 그 知識 가지고 한몫 보려는 사람, 그 知識

가지고 自己 과시, 自己 확인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 또 信念이 많아서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 아주

굳어져 버린 사람, 그렇게 知識이 많고 信念이 많은 마음은 素朴한 마음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이에 유추해서, 우리가 좋다고 追究하는 모든 것은, '本來 마음'이 아니라는

事實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뭔가 나를 幸福하게 해주고 安定되게 해주고 보다 훌륭한 내가 되기 위해서

나한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生覺되는 그 무엇인가에 자꾸 依持해요. 宗敎에 依持하건 哲學에 依持하건

思想에 依持하건, 또 뭐하면 어떤 政黨에 몸을 담던가, 어떤 理念을 追究한다든가 그러는데, 그런 精神은 全部

다 素朴한 마음이 아니오.

 

이 素朴한 마음을 떠난 마음은 輕朴한 마음이라 할 수 있소.

여러분 누구한테 輕朴하다는 소리 들으면 속상하죠? 그런데 凡夫는 全部 다 輕朴한 사람이오.

뭔가에 依持하는, 뭔가에 依持해서 보다 나은 새로운 刺戟을 늘 求하는 사람, 보다 나은 그 뭔가를

要求하는 사람, 사람에 依持하건, 法에 依持하건, 財物에 依持하건, 名譽에 依持하건, 權勢에 依持하건,

어떤 뭔가에 依持해서 自己滿足을 取하는 그런 精神 狀態는 全部 輕朴한 거요. 그런데 우리 범부들은

지금 끊임없이 뭔가를 追求하고 있죠? 우리 凡夫들은 지금 全部 輕朴하게 들떠 있다는 얘기요. 依他的이오.

뭔가 依持하고 뭔가 끊임없이 追求해요. 가장 맑고 깨끗하고 純粹한, 가장 神性한 宗敎的인 體驗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떠한 努力을 한다해도 모두 輕朴한 거요.

그런데 이 輕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特性은 뭔가? 이 輕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自己 逃避를

해요. 뭔가 다른 것을 求해요. 自己를 회피한단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인 '나'하고 그냥 살지 못하고,

보다 나은 나를 자꾸 追求해요. 그게 自己 逃避(도피)요. '도(道)'는 本來 행해지고 있는데, '道' 그 自體와

더불어 살지 않고, 머릿속으로 내가 그려낸 것을 지금 追求하는 것으로 삶의 指標나 目標로 삼는단 말입니다.

去頭絶尾하고 어떤 目標나 어떤 目的을 追求하고 있는 마음은 素朴한 마음이 아니고 輕朴한 마음이라 말이요.

 

그렇다면 結論은 간단해요. 이 輕朴한 마음을 어떻게 하면 解消할 수 있는가? 이 輕朴한 마음을 解消해야

'本來 마음'이 돌아올 것 아니겠어요?· · · 그러나 절대로 이 輕朴한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해선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 ·輕朴한 마음을 없애려고 努力하는 瞬間,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두 갈래가 나기 때문이오.

지금 '나'는 輕朴하죠? 그럼 輕朴함을 없애고 輕朴하지 않은 '나'가 되려고 애쓸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輕朴한 '나'가 輕朴하지 않은 '나'로 되는 것은 너무 當然하기 때문에 그 努力에다가 어떤

正當性이라든가 힘을 賦與해요. 그리고는 精神 없이 내달아요. 지금 이 點이 重要합니다.· · 우리가 어떤

意志的인 努力이나 뜻을 세워, '이건 아니다' 하고 判斷하고 結論 내려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努力한다면,

그 瞬間 '나'와 '나 아닌 것'의 二重的인 作用이 始作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二重的인 作用 속에 그 '나'가

持續되는 거요. 지금 現在의 '나'는 不滿이기 때문에 이놈이 다른 것으로 돼야 하잖아요? 보다 나은 다른

그 어떤 것으로 되기 위한 努力을 하고 있는 게 계속 '나' 아닙니까?

自己 自身이 輕朴한 마음밖에 굴리고 있는 게 없다는 事實을 깨달았을 때, 이 輕朴한 마음, 대단히 우둔하고

때묻은 혼란스러운 이 마음을 그와 反對되는 어떤 것으로 고치기 위한 努力을 하는 限, 그 우둔한 마음은

계속 되는 거예요. 혼란은 계속된단 말입니다. 그러지 말고 '우둔한 마음을 그냥 지켜봐라· · · ' 그것이

聖人들이 한결같이 하신 말씀이오.

그런데 우리는 自器 自身이 몹시 우둔하고 마음이 좁아터지고 인색하고 貪慾스럽다는 事實을 그냥 바라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여러분, 경박하지 않은 참다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 努力하는 것이 '나'를 自由롭게

해주는 게 아니에요. 그 輕朴한 마음을 그냥 지켜만 보세요, 一切 토를 달지 말고, 이름 붙이지 말고. 輕朴함이

됐건 우둔함이 됐건 貪慾스러움이 됐건 그게 뭐 어떤 마음이건 간에 그냥 지켜볼 수 있는 마음,

그게 '본래 마음'이오. 이렇게 또 설명하면 '本來 마음'에 흠집을 내는 거요. '本래 마음'은 差別이 없어요.

옳고 그른 것도 없고, 높고 낮은 것도 없어요. '本來 마음'은 虛空 같아서 거기엔 아무런 中心이 없어요.

거기에는 고여 있는 것도 없고 蓄積된 것도 없어요. 때문에 이 '本來 마음'은 모든 것을 그냥 볼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냥 볼 수 없게 된 理由는, '本래 마음'을 잃어버리고 自己中心的으로 蓄積한

虛妄한 錯覺하는 식심(識心)을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뭔가를 계속 取捨選擇하고 뭔가를 取向하기

때문인 거요. 그게 전부다 '나'라는 中心 때문에 생겨난 거요. 이 '本來 마음'은 도대체 취하고 버리고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지금 걱정되는 게 뭐냐 하면, '本來 마음'은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다' 라는

그 얘기가 틀린 말은 아닌데, 여러분이 그 말을 들을 때에는, 있는 그대로 봄으로 해서 얻어지는 그 뭔가를

여전히 追求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本來 마음'은 追求하면 追求할수록 멀어져요. 그러니

'本來 마음'이라 하는 이름에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努力하면 努力한 만큼 眞實에서 멀어져요.

努力을 왜 해요? 내가 追求하는 그 어떤 것을 成就하기 위해서 하잖아요,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여러분 자기 자신이 경박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박하지 않은 나로 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더욱더 경박해집니다.

 

우리는 本來 온전합니다. 本來 부처라는 얘기요. 이 '本來 마음'은 努力해서 얻는 게 아니라

本來 갖고 있는 거요. 그런데 자꾸 努力해서 얻으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原因을 닦아서 結果를 追求하는 者는

어리석은 者라고 한 거요. 原因을 닦아서 結果를 追求한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本來 마음'이 뭔지 모르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앞으로는 절대로 追求하지 않으리라' 하고 얘기하겠죠? 그러면 그 사람은 벌써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境地'를 追求하고 있어요. 벌써 때를 묻혔다고.· · · 그래서 '智慧 光明으로 하여금

그 스스로 빛나게 하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겁니다.

 

우리는 지금 이 瞬間에도 熱心히 배우죠? 熱心히 듣고 熱心히 읽고, 그것도 不足해서 熱心히 닦아요.

닦고 맑히고,· · · 그게 全部다 이 가짜 '나'를 훌륭하게 하기 위한 努力이오. 그러나 그것은 自己 强化,

自己 擴大의 努力이지 저 '本來 마음'하고는 相關이 없는 거요.

내가 저 '本來 마음'이라고 했는데 저 '本來 마음'이라고 할 만한 저 '本來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오.

저 '本來 마음'이라고 말하는 그 놈이 바로 本來마음 그 놈이오.

重要한 것은 참된 實體인 本來의 그 '如如한 마음', '素朴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言語나 文字를 使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요. 이 理致를 잘 理解해서 그 言語나 文字를 使用하면서도

그 言어나 文字의 굴레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올가미에 붙잡히지 않아야 된단 말입니다.

'本來 마음'을 찾은 사람은, 眞實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 必要하지 않다는 걸 마침내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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