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 완릉록 21-5 法도 없고 法 아님도 없다

장백산-1 2015. 2. 6. 23:48

 

 

 

 

 

◈ 완릉록 21-5   法도 없고 法 아님도 없다

 

根本이라 할 만한 것이 있지 않으니, 根本은 根本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니니, 마음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모양 또한 모양이 아니니, 모양은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法도 없고 本來마음도 없어야만

비로소 마음이라 하는 마음法을 알게 된다'고 했다.
法은 곧 法이 아니요 法 아님이 곧 法이며,  法도 없고 法 아님도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마음이라 하는 마음法이니라.
홀연히 한 生覺이 일어났을 때 그 生覺이 허깨비인 줄 분명히 알면

곧 과거의 부처님에게로 흘러들어 간다.
과거의 부처님은 또한 있지도 않고 미래의 부처님 또한 없지도 않다.
그렇다고 또한 미래의 부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한다.

반면에 현재의 생각 생각이 일정하게 머물지 않으니

현재의 부처님이라고도 부르지 못한다.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만약 일어날 때에,

그것을 두고 깨달은 것이라거나 혹은 미혹한 것이라든가,
또 이것은 좋은 것이거나 혹은 나쁜 것이라고 思量分別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문득 그것에 執着하여 끊어버리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원오당 한소리********

 

앞단에서 取心의 虛妄함을 말하였고

取心은 바로 自性이 自性속의 種子識을 發現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다했다.

그래도 무엇인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 森羅萬象을 설명할 수 없지 않느냐는

疑心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그러니 分別 妄想心의 所作인 衆生인 것이다.

그래서 황벽스님도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신다.

[根本이라 할 만한 것이 있지 않으니, 根本은 根本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니니, 마음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모양 또한 모양이 아니니, 모양은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根本이란 무엇이 여러 개 있을 때 그 것들의 根本이 무엇이냐 할 때 根本이라는 말이 설 수 있다.

그런데 오직 自己性稟인 自性밖엔 없다. 그러나 그 自性마져 虛空性이라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무엇을 들어 根本이라고 할까. 根本이나 마음이나 形相이나 貌樣이나 모두다

邊計所集性의 虛空性이다. 그러므로 이 所集된 種子識도 取함에 따라 發現하지만

取하지 않으면 報身佛로 그냥 그 흔적이 없다.

 

그러니 이것을 들어 있다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있지도 않고 없는 것마져 없는 것이기에 根本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虛空性인 이 마음이나 根本이나 法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法도 없고 本來 마음도 없어야만 비로소 마음이라는 마음法을 알게 된다'고 했다.]

 

마음에 法도 없고 本來 마음이라는 名色도 없어지고

마음이라는 生覺과 取함과 그 어떻한 取心이 없을 때

虛空같이 지어지고 取해지고 求해지고 얻어지는 모든 名色을 떠나

구름 한 점 없이 흔히 드러난 蒼空같을 때 비로소 無心의 境地가 온천하에 그 빛을 발하면서

드러나 지니 이것이 眞心이며 淸淨無垢한 自性淸淨心인 마음인 것이다.

이것을 일심(一心)이라 하고 심법(心法)이며 禪이며 진여(眞如)이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法은 곧 法이 아니요 法 아님이 곧 法이며, 法도 없고 法 아님도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마음이라 하는 마음法이니라.]

法이라고 할 때 法은 내가 마음을 取하여 이름을 붙여 名色으로 法이라고 하기 때문에

法은 法이 아니요. 法이라는 名色을 取하지 않을때 無心의 마음을 다르게 불러 그대로의

마음을 진정한 法이 되기 때문에 法아님이 곧 法이며 그렇다고 法이라 할 것도 없고

法 아님도 없다고 하신다. 法을 法이라고 取하면 法이 아니지만

일어나는 一切의 마음이 그대로 法이기 때문에 取心과 見解를 내는 法이 아니다

마음 그대로를 일러 法이라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알겠는가?

 

[홀연히 한 生覺이 일어났을 때 그 生覺이 허깨비인 줄 분명히 알면

곧 과거의 부처님에게로 흘러들어 간다.
과거의 부처님은 또한 있지도 않고 미래의 부처님 또한 없지도 않다.
그렇다고 또한 미래의 부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한다.
反面에 現在의 生覺 生覺이 一定하게 머물지 않으니 現在의 부처님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無心한 境地에서 卽, 心地에서 본다면은 홀연히 한 生覺이 일어났다는 것은 種子識의 發現인 것이다.

그럼으로 이것은 내가 取心으로 思量해서 貯藏한 識이므로 이것이 眞相이 아닌 虛相임을 알아차린다면

過去의 부처님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은 記憶속의 種子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황벽스님도 金剛經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과거심 불가득(過去心不可得)이요.

현재심 불가득(現在心不可得)이며

미래심 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부처님이라는 生覺이 만약 일어날 때, 그것을 두고 깨달은 것이라거나

혹은 迷惑한 것이라든가, 또 이것은 좋은 것이거나 혹은 나쁜 것이라고

思量分別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문득 그것에 執着하여 끊어 버리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홀연히 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상이 부처님 형상을 지어 말을 하거나

形相이 보일 때 이것에 執着하여 取心을 내거나 내가 부처를 보았으니 깨달았다거나 하는

生覺을 일으키면 안되며, 좋다 싫다 思量分別을 한다면 바로 어떻게 될까.

그것이 바로 내 種子識의 化現임을 알아차려 살불살조(殺佛殺祖)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取心이기 때문이다.

어떤 生覺도 다 내 記憶속에 貯藏된 種子識이며 이 種子識을 取하거나 分別하면

이것이 바로 또한 分別 妄想이 되니 이것이 參禪 中에 흔히 격게되는 記憶의 化現이며

내 스스로 取한 取心인 것이다.

 

그래서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물흐르듯 흘러가게 두어야 하는 것이며

납승의 경험으로 보면 참선중에 선천이 열리는 色界에서 수많은 佛菩薩과 영가들의 形象을 접하게

되는데 이 때 이 形相이 계속될 때 우리의 보검인 話頭 卽, 無字를 들면 그 즉시에 사라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殺佛殺祖를 계속 이어지면 그 다름으로 정천(靜天)으로 접어들면

그런 形相은 다시 찾아 오지 않는다.

 

色界에서 흔히 볼 수있는 心處는 梵天에서는 天人들을 나투이고

光天에서는 찬란한 빛의 投映과 불보살의 화현을 자주 접하게 되고

靜天에 접어들면 그 때부터 고요한 靜寂만이 흐른다.

그러니 이것은 다 수행중에 일어나는 마음의 心處인 것이다.

그래서 황벽스님은 그것을 애써 끊어 내어야 할 필요도 없고 애써 물리치려고도 하지말라 하지만

다 心處의 과정에 불과 한 것이며 心法界 28天을 두루 격어 心香을 꽃피운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범부에서 본다면 생각으로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실참을 통하지 않은 사람들은 마음의 見處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無心의 境地를 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 일 것이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

 

원오스님
http://cafe.daum.net/won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