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 완릉록 21-4 自性을 비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백산-1 2015. 2. 5. 00:20

 

 

 

 

◈ 완릉록 21-4  自性을 비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저 밝음만을 추종하고 어둠을 싫어하며,

그저 깨달음만을 얻으려 하고 煩惱와 無明은 받으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고 중생들은  妄念이 남아 있는 存在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生覺하면 百千劫이 지나도 다만 6도에 계속 輪廻하여 쉴 날이 없으리라.
왜냐하면 온 宇宙 모든 부처님의 本來 根源의 自性을 비방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께서는 너희에게 分明히 말씀해 주셨다.

"부처 또한 밝음도 아니요 중생 또한 어둠도 아니다.

왜냐하면 法에는 밝음도 없고 어둠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佛)라고 해서 또한 强하지도 않고  衆生이라고 해서 弱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法에는 强함도 弱함도 없기 때문이다.

또 부처라고 해서 智慧로운 것도 아니고, 衆生이라 해서 어리석은(愚癡)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法에는 지혜로움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기 때문이다.

 

' 너희들이 나타나서는 모두들 禪을 안다고 말들 하지만 입을 벌리기만하면 그대로

病痛이 생기고 만다. 그리하여 根本은 말하지 않고 枝末만을 말하며,

迷惑함은 말하지 않고 그저 깨달음만 말하며, 本體는 말하지 않고 作用만을 말하는데

제대로 말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없다.

저 一切 法은 本來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또한 없는 것도 아니어서

반연이 생겼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며  반연이 사라졌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다.

 

 

 

********원오당 한소리********


 

 

앞 단에서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이 다 自己 스스로 自心을 取하여 만들어낸  것이며

法이라고 할 때의 法은 事實 報身과 化身의 分別로 이루어 진 것이나

自性이나 法性이나 佛性이나 無垢淸淨의 참性稟에는 그 어떤 差別 分別이 없다.

왜 그런가???

 

거울 속에는 수많은 그림자가 비치지만  거울 自體에는 그 어떤 흔적도 자취도 없다

티뷰이 畵面에 수많은 事件과 影像과 風境과 그림들이  비추어 우리가 그것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는 判斷을 하고 惡이다 善이다, 좋다 나쁘다. 악역이다 착한 配役이다 하지만

그 모든 事件들은 全部 다  電氣에너지의 흐름만 있었지 實際로는 아무 事件도 없었듯이

Off-스윗치를 누르는 瞬間  畵面만 있을 뿐 거기에는 아무것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사라졌을까?  아니면 그럼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화면에 비춰졌던 모든 것들은

그대의 根本識인 第八識  阿賴耶識에 動映像으로 編輯 記錄되어 種子識으로 貯藏되어 있다.

記憶으로 貯藏되어 있으니 내일 演續劇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보고, 듣고, 향기맡고, 맛을보고,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그린 그림들은

全部 다 境界가 되어 내 陷沒識인 阿賴耶識에 記錄 貯藏이 되어있다.

第八阿賴耶識 여기에 貯藏된 情報記錄이 바로 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第八識인 阿賴耶識을 根本識이라고 말하고 모든 識의 根本이 되는 識이다.

이렇게 記錄 貯藏된 記憶은 宇宙가 생겨나기 前부터 지금 이 瞬間까지 全切 記憶이 다

根本識인 第八阿賴耶識 여기에 記錄 貯藏되어 있다. 여기에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를 떠나서는 三界도 宇宙森羅萬象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根本識인 第八阿賴耶識은 萬有를 다 알고, 이미 모든 것을 다안다.

깨달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석가도 여기에 있고 하나님도 여기에 있다.

예수도 코오란도 아브라함도 그 어떤 성인도 범부도 중생도 인간도 산하대지 초목총림

비금조수, 하물며 보이지 않는 微生物도 鬼神도 聖人도 迷惑도 깨달음도 根本識 여기에 모두 다 있다.

내가 아는 것 外에도 累劫生을 살아움직이는 이 根本識이 바로 宇宙이고 三界이며

부처의 世界이고 極樂淨土이고 華嚴世界이며 華莊世界인 것이다.

 

몸은 바로 이 記錄 貯藏된 根本識과 連結하여 살아 움직이고, 말을하고, 느끼고,

生覺하게 하며, 感性도, 感情도, 다 여기 根本識인 種子識의 發現인 것이다.

그러니 모든 識의 根源인 오직 이 根本識밖에는 그 어떻한 것도 있지도 않고

이 根本識은 流轉相續하여 恒住不滅이요 不生不滅이요 天眞無垢한 참生命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느껴지고, 있는 곳을 찾을 수는 없지만 지금 바로 활발발하게

살아움직이면서 宇宙森羅萬象을 나투고 있지 않은가!!!!!

그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모두 이것이고

소리로 들리는 것이 이것이고

향기로 맏아지는 것이 이것이고

맛으로 아는 것이 이것이고

몸으로 느껴지는 것이 이것이고

마음으로 想像의 날개를 펴는 것이 모두 다 이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깨달음이 어떻고 미혹이 어떻고 무명이 어떻고 하는 소리가

어디에서 하는 소리냐  그래서 운문선사께 부처가 무었이냐고 물었더니

무슨 똥막대기 같은 소리를 하느냐 하였고

납승에게 묻는다면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냐!" 고 할것이다.

이렇게 말해 주어도 모르겠다면 그냥 죽으라고 말할 수 밖엔 없다.

무엇을 죽이느냐? 그대가 찾아 얻으려고 하는 貪心, 瞋心, 癡心. 三毒心을 찾는

그 取心을 죽이라는 말이다.

 

그대가 하는 모든 行爲는 全部 다 自己 안에 있는 根本識인 種子識에서

헛된것만 찾아서 化現함으로 사람마다 하는 行動이 다르고 말하는 것이 다르고

生覺하는 것이 千差萬別인 것이다.

그래서 황벽스님도 그 種子識에서 取하는 마음에 따라서 化現하는

行動과 말과 生覺이 다르게 나타남으로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저 밝음만을 추종하고 어둠을 싫어하며,

그저 깨우침만을 얻으려 하고 번뇌와 무명은 받으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고 衆生들은 妄念이 남아 있는 存在이다'고 한다.]

 

밝음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밝은 그 種子識을 찾아 發現하고

어둠을 싫어함이 아니라 어둠이라는 種子識은 發現을 안하려고 하고

깨우침만을 發現하려 하고 煩惱와 無明은 받아서 發現하지 않으려 하고

숨기고 外面하지만 그것은 全部 自己 性稟인 種子識을 속이고

없는것 없듯이 다 알면서 아닌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自己 스스로 自己를 속이면서 나는 衆生이니까 이렇게 生覺한다고 말하고 있다.

남을 위해 살고, 남과 내가 差別없는 나인것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거짓으로 둘러되며 핑계를 만들고 안하려고 할 뿐이다.

 

그러나 그 無明도 어둠도 煩惱도 중생이란 것도 내 自性속의 일이라고 안다면 어떨까!

그것이 내 스스로 取함을 피하는 것이지 그대 自性속에 다 實相으로 存在하는 것인데

피한다고 없어 지겠는가. 어둠과 밝음은 하나이며 내가 스스로 나눈 것인데

어찌 나를 속이는가. 밝음만 있으면 萬象을 비추어 볼 수도 없고

반대로 어둠만 있어도 萬象을 볼 수가 없다. 그럼으로 밝음과 어둠이 同時에  있어야

形相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밝음과 어둠은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어둠과 밝음은 因과緣 처럼 同時生이고 同時滅인 것이다.

그러니 名色으로 드러난 모든 相은 全部 이를 同時에 가지고 있으며

좋고 나쁨이 따라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황벽스님도 그렇게 自心을 取하고 버림으로써 스스로 자성을 속이고

좋은 것만을 골라서 取해서 좋은 그 種子識만을 드러내려고 한다면

아무리 歲月이 흘러도 自性의 眞面目을 알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신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生覺하면 百千劫이 지나도록 다만 6途에 계속 輪廻하여

쉴 날이 없으리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本來 根源의 自性을 비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自性을 비방한다는 말이 무엇을 말하느냐!

이렇게 좋다 싫다 밝다 어둠이다 하면서 取하고 버리고 하는 이 일이 바로

다 내 自性안의 일인데 이 事實을 모르고 내가 있고 또 너가 있다는 二分法으로

分別하고 差別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내것이라하고 나쁜 것은 네것이라고 하면서

나는 좋은 사람이고 너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모든 일이 다 내 自性안의 일인 것이다.

왜인가?  自性/識밖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유식(唯識) 卽, 오직 識뿐이라고 말할 때 이 唯識이 바로 나의 自性이기 때문이다.

내 自性에 千差萬別의 一切가 다 들어 있기때문에 이밖의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宇宙森羅萬象 頭頭物物이 다 한 瞬間 내 自性/識/根本識/種子識/第八阿賴耶識안의

性稟이며 이것이 바로 내 自性 스스로 發現시킨 化現으로 다시 내 마음을 取하는 것이라는

事實임을 안다면 한 瞬間 바로 깨달아 버려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이다.

돌~~~~~!!!!!!!!!!!

 

여기서도 깨닫지 못하니 황벽스님도 또 부처님을 증인으로 세우신다.

 

[부처님께서는 너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부처 또한 밝음도 아니요 중생 또한 어둠도 아니다.


왜냐하면 法에는 밝음도 어둠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라고 해서 또한 强하지도 않고  衆生이라고 해서 弱하지도 않다.]

 

마음 스스로 差別해서 取함으로 부처도 있고 중생도 있는 것이지

중생 없는 부처는 없고 부처 없는 중생도 없다.

이것 역시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 이면서 둘인 因緣으로 同時生 同時滅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法쪽으로 가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왜냐하면 法에는 强함도 弱함도 없기 때문이다.

또 부처라고 해서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중생이라 해서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法에는 지혜로움도 어리석음도 없기 때문이다.]

法으로 말을 하나 무엇으로 말을 하나 差別은 原來부터 없었다.

그런데 그대 스스로 自性을 속여서 取하려는 慾心인 이 취심(取心)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럼으로 스스로 속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禪이란 바로 여기 있는 [그대로]를 인증(認證)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증득(證得)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認證하면 差別하는 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황벽스님도 애가타서 말씀하신다.

[' 너희들이 나타나서는 모두들 禪을 안다고 말들 하지만  입을 벌리기만하면 그대로 病痛이 생기고 만다.

 
그리하여 根本은 말하지 않고 枝末만을 말하며,

迷惑함은 말하지 않고 그저 깨달음만 말하며,

本體는 말하지 않고 作用만을 말하는데 제대로 말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없다

 

 

禪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禪이란 부처님의 마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니 또 석가모니불을 生覺할 것이다.

바로 이런 生覺 이것이 病이다. 그대밖엔 없는데 어디에 석가모니가 있는가!

그분은 3000년전에 열반하셨다.

바로 내가 되엇건 그대가 되엇건 다 마음이다.

그 마음에 投影된 것은 다 그대 자심(自心)이다.

그대의 阿賴耶識에 貯藏된 씨앗의 發現이란 말이다.

지금 이대로를 認證하면 그대로 實相이요 實體인 것이다.

法이면 法. 禪이면 禪. 眞理면 眞理. 모든게 虛相이 없다.

나한테는 다 진상(眞相)인 것이다.

왜? 그대 자성(自性)이 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황벽스님도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
[저 一切 法은 本來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또한 없는 것도 아니어서

반연이 생겼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며 반연이 사라졌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自性 스스로의 일임으로 모든 法이 本來 있지도 않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신것은


그대 自性안의 種子識을 發現하면 있고, 發現하지 않으면 그대로 種子識으로 있기 때문에

반연을 하여 드러내면 化身부처를 나툼이되고

그냥 반연을 하지 않으면 報身부처로 존재하고 있기때문에

一切는 다 그대 스스로 마음을 쓰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되는 것이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