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 자비로운 나눔 - 연기법의 실천
연기법에서는 이 우주 전체가 다차원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가 바로 나이고, 우주 전체가 곧
나를 살려주는 중중무진의 무한 상생의 관계임을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체 모든 존재들이 바로 나를
키워주었고, 자비로운 보살핌으로 나를 살려주었다면 그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우주법계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며 보답의 실천이 바로 보시며 나눔이다.
우주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지만, 사실 엄격히 따진다면 보답이라는 말도 필요 없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이 우주가 있기에 내가 있다면 이 연기적인 삶에 나와 너라는 분별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이며,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일 수밖에 없는 同體的인 한生名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되어진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 기반이 되는 한 몸, 한 생명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만유가 모두 한 몸이요, 한 생명이라면 어찌 나와 너라는 나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와 너가 없다면 내 것과 네 것이라는 分別도 사라진다. 네가 아픈 것이 곧 내가 아픈 것이며, 네가
굶는 것이 곧 내가 굶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연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들이
기아와 가난에 허덕인다면 그것은 곧 내가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의 가난이
곧 나의 가난이다. 그러니 어찌 나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나누고 보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同體的인 보시는 보시나 나눔이라는 말조차 필요치 않는다. 내가 배고플 때 내가 먹는
것을 가지고 내가 내게 보시한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타인에게 베풀더라도 사실 그것은 베풂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同體大悲의 참모습이다. 동체대비란 말
그대로 온 우주법계가 한 몸이라는 自覺에서 나오는 크나 큰 자비를 말한다. 이러한 큰 자비는
자비라는 말조차 쓸 필요가 없는 자비이다.
이러한 同體大悲야말로 緣起的인 自覺 속에서 꽃피어나는 상(相) 없는 慈悲이다.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베푸는 것은 동체대비요 베풀었다는데 머물지 않는 無住相布施이다.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으니 내 것을 너에게 준다는 觀念 또한 생길 수 없는 것이다.
宇宙의 것이 因緣에 따라서 내게도 오고 네게도 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因緣에 따라서 必要한 곳에
必要한 것이 있도록 하는 것 外에는 할 것이 없다. 상대에게 그것이 필요하면 그것을 내어줄 뿐이다.
그렇게 나누어 주고 나서도 내가 상대에게 주었다는 相을 낼 이유가 없다. 그 나눔은 다만 因緣에 따라서
있어야 할 자리에 간 것일 뿐이다. 내가 네가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다만 나는 도왔을 뿐이다. 그러니 이러한 緣起의 世界에서 布施는 보시가 아니다. 보시를 하고서도 보시했
다는 相이 생길 틈 없다. 이러한 보시야말로 緣起的인 보시요, 동체대비의 깨달음에 입각한 보시인 것이다.
緣起를 깨달으면 이처럼 同體大悲의 布施行이 저절로 삶의 방식이 된다. 그러나 緣起를 깨닫지
못했더라도 反對로 相없는 無住相布施를 끊임없이 行하면 보시의 실천행 속에서 緣起的인 自覺이
꽃피어난다. 그러니 보시행, 자비로운 나눔이야말로 연기법을 실천하고, 연기를 깨닫는데 있어
중요한 실천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시와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緣起法이라는
眞理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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