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識 - 上 대상 포착하는 ‘나’가 아닌 감각기관 개별의 인식

장백산-1 2015. 9. 17. 00:33

 

 

識 - 上  대상 포착하는 ‘나’가 아닌 감각기관 개별의 인식

이진경 교수  |  tjdwogjs@hanmail.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識은 감각기관 가진 ‘나’라는 主體의 認識으로 알고 있지만
감각기관 개별 활동이 곧 ‘識’ 감각기관이 없어도 識은 존재


“오직 識이 있을 뿐 對相은 없다(唯識無境)”고 주장하는 유식학(唯識學)이 아니어도, 불교에서 식(識)이란

말은 매우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無明을 조건으로 하여 행(行)이 있고, 行을 조건

으로 하여 식(識)이 있고, 識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名色)이 있고…”라고 하며 이어지는 12緣起의 설법에

서도 일찍부터 識이 등장하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識에 대해 말할 때도 識은 등장한다.

 

唯識學은 이를 더 밀고 나가, 第7識과 第8識의 槪念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識의 作用을 통해서 無常한

세계 속에서 번뇌와 집착으로 물든 삶을,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난 삶을 설파했다.

‘識’이란 무언가를 포착하는 활동을 뜻하기도 하고, 그렇게 포착된 내용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처럼

西洋哲學에 익숙한 이에게 이 ‘識’이라는 말은 약간 妙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분명 대상에 대한 認識活

動을 지칭하지만 ‘認識’이라는 말과는 다르고, 포착된 어떤 認識 內容을 지칭하지만 그런 의미의 ‘認識’

이나 ‘知識’과도 다르다. 무엇보다 흔히 사용하는 ‘認識’이라는 말은 對相을 포착하는 主觀的인 活動이나

그 結果를 뜻하기에, 近代에는 주로 ‘意識’과 相關的인 것으로 사용되었고, 人格的인 主觀 全切를 統合하

는 ‘精神’ 全切의 層位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反面 佛敎에서 사용하는 ‘識’이란 말은 意識뿐 아니라,

안식, 이식 등 눈이나 귀의 활동, 혹은 그 활동의 결과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그렇기에 西洋哲學에서 ‘내가 무엇을 認識한다’는 말은 흔히 쓰지만, 내 눈이 무엇을 認識한다는 式으로

는 쓰지 않는다. 눈이나 감각기관을 통해 포착된 것은 그 자체로 따로 다루어지지 않고, 눈과 귀 등을

‘器管(organ, 원래 ‘도구’란 뜻이다)’으로 사용하는 主觀의 一部로만 다루어진다. 안식, 이식을 별도로

말한다는 것은 ‘나’라는 주관과 同一視되는 정신이나 의식의 ‘도구’가 아닌 눈이나 귀 등의 獨者的인

‘認識’이 있음을 함축하는 것 같다. 意識과 동렬에 놓인 눈, 귀의 ‘認識’이란 서양철학의 어법으로는

낯설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意識이나 精神, 靈魂 같은 하나의 統合된 全切로 귀속되지 않는 눈, 귀, 코 등의

獨者的인 ‘識’이 있다는 말은 깊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요소를 갖고 있다. 눈이나 귀가, 혹은 그게 포착한

것이 ‘나’라는 인식주관의 의식이나 영혼이 생각하고 판단하는데 필요한 부분적인 ‘도구’나 재료라는 생각

은, 生物學的으로는 有機體中心主義的인 것이고, 哲學的으로는 人間中心的인 것이다. 認識이란 언제나

유기체인 인간을 뜻하는 인식주관의 활동에 귀속된다는 생각이 어느새 前提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佛敎에서 말하는 識은, 靈魂이나 精神 같은 유기적 통일체를 상정하지 않고 눈과 귀 등의 獨者的

인 活動이 獨者的인 結果物을 얻는다고 하는 發想을 담고 있는 것 같다. 意識이란 안식, 이식, 비식 등과

동렬에 놓이는, 여섯 가지 識 중의 하나일 뿐, 그 모두를 統合하고 指揮하는 特權的 全切가 아닌 것이다.

눈은 눈대로 認識하고, 귀는 귀대로 認識한다. 코와 혀, 몸과 의식 또한 그러하다. 이는 인격적인 주관

없이는 ‘인식’에 대해 생각할 수 없고, 정신이나 영혼 없이는 사고나 인식 같은 활동을 생각할 수 없다는

오래된 統念을 根本에서 뒤집을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해준다. 들뢰즈라면, 유기체에 대한 6根의 반란이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말할 때, 인간의 思考能力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 意識이나 ‘精神’

같은 槪念을 상정하고 있다. 따라서 意識이나 精神이 없는 것, 가령 植物이 생각한다는 생각은 어불성설

이라고 간주되었다(데카르트는 동물이 생각한다는 주장조차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눈이나 귀, 코가

意識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識’을 갖는다는 것은, 意識이나 精神 같은 걸 假定하지 않아도 認識活動이나

그 結果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認識이 아니라 識을, 意識이 아니라 眼識과 耳識 등의 6識을 말

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認識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 식물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도록 해준다.

그런데 識 槪念이 담고 있는 잠재력은 이것 이상이다. 이런 발상을 좀 더 밀고 가보면, 識이란 눈이나 귀

같은 기관이 꼭 있어야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逆으로 눈은 대체 어떻게 眼識을 얻을 수 있는

걸까를 탐색해보면 분명해진다. 인간의 눈과 시각에 대한 연구는, 眼識이란 細胞나 단백질 수준에서 發

生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예컨대 인간의 눈의 망막에는 다섯 가지 光受容體가 있다. 빛의 强度에 민감한

간상체(로돕신)와 빨강, 노랑, 파랑의 세 가지 색을 구별하는 세 개의 추상체(포톱신), 그리고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크립토크롬이란 光受容體가 그것이다. 이러한 光受容體가 일정한 波長과 振幅을 갖는 빛에 反應

하며 그것을 포착할 對眼識이 발생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눈동자를 통과한 빛을 망막을 이루고 있는 광수용체가 자신이 흡수할 수 있는

特定 波長의 빛을 받아들이고, 이 신호를 腦로 보내 視覺的인 像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안식 전체의 형성

에는 腦가 관여하지만, 眼識이라고 할 수 있는 最소限의 識은 빛과 光受容體의 만남으로 形成되는 것이다.

즉 눈이란 기관이 아니라 細胞的인 水準에서 빛과 결부된 ‘識’이 형성되는 것이고, 이것이 綜合되어 ‘눈’의

識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동물의 눈도 그렇게 작동한다. 따라서 빛에 反應하는 光受容體가 있다면 반드

시 ‘눈’이라는 동물적인 기관의 형태를 갖지 않는다고 해도 ‘안식’을 가질 수 있다. 細胞的인 水準에서

眼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귀나 코, 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눈과 귀, 코, 혀, 몸, 의식의 6根

보다 더 아래로 내려간 수준에서 識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識이란 槪念이 주는 낯설고 妙한 느낌은 아직

 제대로 펼쳐지지 않은 이런 새로운 사유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植物은 명백하게 眼識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식물은 광수용체

를 갖고 있다. 가령 애기장대 같은 아주 ‘단순한’ 식물조차 11개(인간은 5개였다!)의 광수용체를 갖고 있

으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크립토크롬도 갖고 있다. 그렇기에 植物은 눈이란 기관은

없지만 빛과 색채를 區別하고 知覺하는 能力을 갖고 있다. 빛이 거의 없을 때와 한낮일 때, 지평선으로

해가 질 때를 區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밤낮의 길이를 알 수 있고 청색, 적색 같은 색상을 區別하기도 한다.

 

청색광으로 몸을 구부릴 方向을 찾고, 적색광으로 밤의 길이를 잰다. 또한 적색광과 초적색광(빨강보다

조금 더 波長이 긴 빛)을 區別할 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知覺한 빛을 記憶하여 反應한다. 나아가 인간의

시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빛을 知覺하고 識別한다. 그래서 가령 적외선과 자외선을 ‘본다’.

그 이외의 것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식물들이 빛을 향해 몸을 움직이고 변형시키며, 계절의 변화를

감지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이런 認識能力의 作動을 통해 이루어지는 現象

이다. 겉으로 보면 무슨 ‘조건반사’나 ‘기계적 반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現象들은 매우 복잡하고

섬세한 細胞的이고 分子的인 識들의 作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식물은 눈이 없지만 ‘안식’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이면 식물은 동물의 후각처럼 냄새에

반응하는 수용체를 갖고 있으며, 냄새에 반응하고 또 냄새를 이용하기도 한다. 접촉을 지각하는 촉각도,

나아가 기억력도 갖고 있다고 한다. 다만 식물이 소리를 듣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혀 없

이 맛을 느끼는지 여부는 별로 실험되지 않은 듯하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10호 / 2015년 9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