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일본 지은원 소장 ‘미륵하생경변상도’. |
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하는 정토신앙은 타력문인 것 같지만 자력문이다. 아미타불은 결국 중생의 自心(스스로의 마음) 속에 깃들여져 있는 佛性이며, 極樂淨土는 佛性의 發現에 의해 펼쳐진 지금 여기 이 世上의 實相, 本來모습이다. 佛性은 一切諸佛 즉, 宇宙萬物의 根源이며 無量淨土 즉, 지금 여기 이 세상의 本性인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과 이 세상를 떠나 아미타를 부르고 무량정토를 찾고 구한다면 필시 外道 境界에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중생이 아미타불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의 불성 믿는 것과 동일 마음속 망상 번뇌 미혹 사라지면 마음 속 불성인 아미타불 친견해 극락왕생
阿彌陀佛은 佛性을 佛格化시킨 말이며 極樂淨土는 一眞法界, 온 우주, 지금 여기 이 세상을 對相化시킨 말에 불과하다. 이러한 까닭에 衆生이 아미타불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곧 衆生 自身의 佛性을 믿고 의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정토신앙에 있어 往生이란 지금 여기 이 세상을 버리고 다른 국토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세상이 곧 정토임을 깨닫는 것이다. 佛性에는 生과 死라는 分離 分別하는 二分法的인 槪念이 없으며 따라서 佛性에는 이승과 저승이라는 分別 槪念이 없다.
중생들은 아미타불을 의지하기 前에 이미 아미타불을 저마다 모시고 있으며 극락세계에 태어나지 않아도 이미 極樂淨土에 往生해 있다. 다만 迷惑에 가려진 自身의 阿彌陀佛, 佛性를 보지 못하고 자신이 있는 지금 여기인 極樂淨土를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정토에 나려면 마음 속에 迷惑 번뇌 망상을 除去하는 것이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往生이란 다시 말해 중생의 미혹한 마음이 佛性으로 轉換되어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가 곧 佛國淨土 즉, 極樂淨土임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일찍이 원효대사는 정토신앙을 감응도교(感應道交)라고 하여 말세의 신앙으로 念佛할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 感應道交란 중생을 구제하려는 아미타불의 本願力과 중생이 정토에 태어나려는 發願力이 서로 만나 '하나'의 氣運이 되는 것이다. 이를 불성과 연결하여 설명하면 중생들의 마음에 평등하게 갖추어져 있는 불성은 자신과 세상을 해탈시킬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구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佛性은 비록 중생의 無明心 속에 존재하지만 언제나 그 無明心 속을 뚫고 나오려는 運動을 끊임없이 하고 있으며 無限한 慈悲와 功德으로 중생들을 引導하고 있다. 이를 ‘대승기신론’에서는 眞如熏習이라고 하며 이것을 정토경에서는 아미타불의 本願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듯 佛性으로써의 阿彌陀佛은 언제나 서방에서가 아닌 중생이 존재하는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서 중생들을 정토에 들게 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정토경만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 말씀은 다 중생을 정토에 태어나게 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정토경이라고 말해도 된다. ‘아미타경’과 ‘무량수경’ ‘관무량수경’만이 정토경이 아니라 모든 불경이 정토경이라 해도 무방하다. 정토경에서는 왕생의 조건으로 염불수행을 강조한다. 염불은 글자 그대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생각 생각을 아미타불로 꽉 채우는 수행이 정토교의 염불수행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염불법은 예로부터 세 가지로 설명되어왔다. 칭념염불(稱念念佛)과 관상염불(觀相念佛), 그리고 실상염불(實相念佛)이다. 먼저 칭념염불은 아미타불이라는 명호를 계속해서 암송하는 것이다. 불자들이 보통 행하고 있는 염불법이 바로 칭념염불이다. 다음 관상염불은 아미타불의 상호와 모습을 마음으로 상상하여 떠올리는 염불법이다. 이 방법은 법당에 모셔진 아미타부처님의 상을 눈으로 바라보며 명호를 함께 암송하다가 눈을 감고 그 상을 계속해서 떠올리는 수행법이다. 끝으로 실상염불은 칭념염불과 관상염불을 통해 아미타불의 본래 모습인 불성을 체득하고 그 불성을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칭념염불과 관상염불이 아미타불을 친견하는 방편이라면 실상염불은 아미타불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관상염불 가운데에 아미타부처님의 상을 관찰하는 방법 외에 극락세계의 16가지 수승한 모습을 관찰하는 수행이 있다. 이를 극락세계 16관법이라고 하는데 정토경 가운데에 ‘관무량수경’이 이를 설하고 있는 경전이다. 16관법은 극락정토에서 해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상관(日想觀), 맑은 물을 떠올리는 수상관(水想觀), 보배땅을 떠올리는 보지관(寶池觀), 보배나무를 떠올리는 보수관(寶樹觀), 보배연못을 떠올리는 보택관(寶澤觀), 보배 누각을 떠올리는 보루관(寶樓觀), 연꽃좌대를 떠올리는 연좌관(蓮座觀), 그밖에 불상관, 진신관, 관음관, 세지관, 보관, 잡상관, 상배관, 중배관, 하배관이다. 이는 모두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극락정토의 광경과 그 곳에 머물고 계신 불보살의 모습을 떠올리고 되풀이해서 기억하는 수행이다.
전통적으로 정토수행자들은 이와 같은 관상염불을 보다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극락정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이를 바라보고 떠올리는 것으로 수행법을 삼아 왔다. 우리가 사찰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극락세계 변상도(變相圖)가 바로 그것이다.
변상도란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말한다. 그림으로 그려진 극락세계와 불보살의 모습을 눈을 감고 떠올려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한 다음 그 광경들이 점차 뚜렷해져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한다. 이렇게 하면 점차 마음속의 煩惱와 迷惑이 사라지면서 마침내 眞正한 阿彌陀佛인 佛性이 現前하고 一眞法界의 極樂淨土가 지금 여기 이 땅에서 펼쳐지는 것을 체득하게 된다.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이는 16관법 가운데 여러 관을 하든지 하나만 택하여 관을 하든지 나름대로 닦는다. 불교의 모든 수행이 그렇듯이 정토수행 역시 삼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삼학은 악업을 그치고 선업을 짓는 계학, 마음을 하나에 집중하는 정학. 마음의 현상과 본성을 관찰하는 혜학이다.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계를 중히 여기고 선업을 쌓아야 한다. 그런 다음 수행인은 염불로써 늘 마음을 집중하고 삼매를 닦아 아미타불의 진신을 친견하도록 해야 한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다겁생래에 아무리 중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아미타불의 원력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면 모든 업장이 소멸하여 청정한 정토에 나게 된다고 설한다. 만약 임종 시에 산란한 마음 가운데에서도 아미타불을 놓치지 않고 부르면 필시 이 사람은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정토에 왕생하게 된다. 하지만 평소에 염불을 닦은 이와 왕생의 차이는 있다. 어떤 수행보다도 염불 수행의 장점은 닦기가 쉽다는데 있다. 언제 어디서건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된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염하다 보면 일체의 망상이 물러가고 오로지 극락으로 통하는 하나의 마음 길이 명료해진다. 길을 가다 보면 길의 끝이 있듯 망상에도 끝이 있다. 염불을 통해 망상이 끝나는 곳 거기에 이르러야 아미타불을 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 정토종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선도대사는 왕생의 조건으로 다섯 문을 제시 했다. 이를 오념문(五念門)이라 하는데 신업예배문(身業禮拜門), 구업찬탄문(口讚嘆門), 의업관찰문(意業觀察門), 작원문(作願門), 회향문(回向門)이 그것이다. 신업예배문은 정토수행자는 오로지 아미타불을 제일의 부처님으로 삼고 몸으로써 예배 공양하기를 게으르지 아니하는 것이다. 구업찬탄문은 온 마음을 기울여 아미타불의 대원력과 극락정토의 공덕을 입으로써 찬탄하는 것이다. 의업관찰문은 늘 극락정토의 부처님과 성현들 그리고 모습들을 떠올려 관찰하는 것이다. 작원문은 간절한 마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해 마지않는 것이다. 회향문은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이 지은 수행의 공덕을 부처님과 중생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정토신앙의 시작은 신심과 발원이고 완성은 성불과 회향이다. 아미타불이 그러했듯 정토에 왕생한 중생도 똑같이 아미타불의 행을 이어 받아 자신의 정토를 건립하고 중생들을 성불 시킨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320호 / 2015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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