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배움이 곧 수행이다

장백산-1 2016. 9. 19. 14:31

배움이 곧 수행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할 때 그가 너무나 기뻐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행복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제자인 크레도가 물었다.


“스승님, 무엇이 그리 기쁘십니까? 저희는 스승님의 죽음에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왜 내가 기뻐하면 안 되는가? 나는 삶이 무엇인지 발견(發見)했다. 이제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나는 위대한 神秘의 門, 죽음 앞에 서 있다. 그래서 나는 감격하고 있다. 

나는 곧 未知의 世界로 위대한 旅行을 떠날 것이다. 나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더 이상 기다

릴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신앙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을 

명심하라.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죽음 이후에 영혼(靈魂)이 살아 있을 거라고 確信하십니까?”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그것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알지 못한다.’ 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 

世上에서 가장 위대한 용기(勇氣)를 보여준 말이다. 언어학 교수들이 ‘나는 모른다.’라고 말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앵무새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매우 眞實하고 正直한 사람이었다. 

그는 죽은 이후에 靈魂이 살아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냐는 질문에 ‘나는 모른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제자가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죽음의 문 앞에서 그렇게 기뻐하십니까? 죽은 후에

靈魂이 살아 남지 않는다면, 그다음엔...?”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지켜봐야겠다. 내가 살아남는다면, 

그런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내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어떻게 두려움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살아

남지 못한다면, 나는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려움은 어디 있는 것인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두려움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살아남는다면, 나는 살아남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전혀 모른다. 그래서 나는 호기

심으로 가득 차 있고, 죽음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의 眞面目이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이란 

기독교인이나 힌두교인, 불교인이나 이슬람교도가 아닐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知識의 존재방식이다. 

기독교인은 ‘나는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知識은 기독교의 敎理에서 온 것이다. 

힌두교인은 ‘나도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힌두교인의 知識은 베다와 바가바드기타와 그 敎理로부터 

온 知識이다. 힌두교는 기독교인에 반대한다. 힌두교인이 ‘내가 옳다면, 당신은 옳을 수가 없다. 당신이 

옳다면 나는 옳을 리가 없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논쟁과 반박, 불필요한 토론과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소위 종교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는 모른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대가 ‘나는 모른다.’라고 말할 때 그대는 열려 있고, 배울 준비가 되어있다. 그대가 ‘나는 

모른다.’라고 말할 때, 그대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지 편견(偏見)이 없으며, 어떠한 믿음도 없으며, 어

떠한 知識, 알음알이도 없는 것이다. 그대에게는 오직 깨어있음만 있다. 그대는 ‘나는 깨어있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과거로부터 어떠한 敎理도 옮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이다. 이것이 바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 진정한 수행의 마음의 태도이다. 그리고 수행이란 배움을 의

미할 뿐이다. 수행자는 배우는 사람을 뜻하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행은 배움을 

의미한다.


오쇼의 <농담> 중에서, 가져온 곳 :  카페 >목탁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