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이슈

국정운영체계와 개헌문제: 새로운 논의를 위하여

장백산-1 2016. 10. 31. 16:46

김병준의 특별기고)국정운영체계와 개헌문제: 새로운 논의를 위하여

이 글은 2016.10.27(목) 09:30~11:40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2층 릴리홀에서 열린, 특별토론: 국가운영체제와 개헌(국가미래연구원, 경제개혁연구소, 경제개혁연대 주최) 토론회에서 김병준 교수가 발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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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운영체계와 개헌문제: 새로운 논의를 위하여                                                                           

 

                                                                                                           

김병준(국민대 교수, 전 대통령 정책실장)

 

ppt로  발제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참석하시는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급히 생각의 일단을 글로 적기로 했다. 다소 거친 점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Ⅰ. 모든 대통령, 모든 국회의원, 모든 관료가 실패하는 대한민국 : “고장 난 자동차”


무거운 이야기부터 하자. 다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3월 쓴 글 ‘정치하지 마라’의 일부다.

 

“정치를 하는 목적이 권세나 명성을 좇아서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를 위하여, 가치 있는 뭔가를 이루고자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한참 지나고 나서 그가 이룬 결과가 생각보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열심히 싸우고, 허물고, 쌓아 올리면서 긴 세월을 달려왔지만, 그 흔적은 희미하고,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실패의 기록뿐, 우리가 추구하던 목표는 그냥 저 멀리 있을 뿐이다.”

 

재임 중에도 그는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대통령 못 해먹겠다” “권력은 시장으로 갔다” 등이 그것이다.

 

몇 년이 흐른 뒤 당시의 야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지금의 빅근혜 대통령도 결국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다음은 지난 4월 총선 이후 언론사 편집국장ㆍ보도국장 초청 오찬에서의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일부다.

 

“…꿈은 많고 의욕도 많고 어떻게든지 해보려고 했는데 거의 안됐어요. …혼자 가만히 있으면 너무 기가 막혀 가지고 마음이 아프고 내가 좀 국민들 더 만족스러운 삶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내가 대통령까지 하려고 했고, 열심히 밤잠 안자고 이렇게 고민해서 왔는데 대통령 돼도 뭐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모든 대통령이 실패하고 있다. 다음 대통령은 잘 할 수 있을까? 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뿐만 아니다. 국회는 국회대로 실패하고 있고, 관료는 관료대로 실패하고 있다. 멀쩡한 사람도 국회의원 몇 년이면 ‘이상한 사람’이 되고, 시험 하나는 잘 쳐서 공무원이 된 관료들도 몇 년만 지나면 ‘무능력한 눈치꾼’이 된다.

 

모두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다. 능력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지식도 양식도 없는 자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원래 편히 살면서 권한행세나 하고 싶은 자들이 관료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이 모자라 못하는 것을 왜 남의 탓, 제도 탓하느냐” 힐난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이 발제자에게도 “감히 누구를 누구에게 비교하느냐?” 따지고 들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뒤로 물러나 생각해 보자. 어떻게 모두가 이 모양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의 문제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 아닐까?

 

줄여서 이야기하자. 먼길을 가는 자동차로 치면 자동차 자체가 고장이 나 있다. 누가 운전을 해도, 또 그 옆에서 누가 길을 봐 주어도 잘 가지 않게 되어 있다. 어떤 운전기사든 실패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실패를 보며 실제 차를 조금이라도 고쳐가며 운전할 수 있는 인사들은 손사래를 치며 차로부터 멀어진다.

 

대단히 외람된 이야기이지만 결국 이래도 저래도 크게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이 대거 차 주변으로 몰려든다. 그리고 자신들이 운전하면 차가 잘 갈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친다. 차가 가고 안 가고는 안중에도 없다. 어디로 차를 몰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 자리에 앉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앉을 것인가? 보여줄 기술이나 능력이 없을수록 상대를 더 몰아붙인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의미 없는 패거리를 지으며 세를 과시하고 분노를 판다. 그리고 선동을 한다. 그 사이 차는 더 내려앉고, 양식 있는 사람들은 더욱 멀리 달아나 버린다.

 

이제 다른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 사람이 아닌 차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누가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느냐가 아니라, 누가 되더라도 잘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좌절만 해도 그렇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 당시의 권위주의 체제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음을 말해주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좌절 또한 지금의 체제가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음을 말해 준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대통령은 국정이 바르게 수행될 수 없는 이 체제와 환경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였다. 이에 대한 고민 없이 ‘이기자’만 외치는 정치권에 대해 깊은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대연정 시도가 무산된 이후, 또 집권 후반기의 개헌논의가 동력을 잃은 뒤에는 더욱 그러했다. 흔히 느끼는 절망감이나 좌절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죽음보다 더한 절망감과 좌절이었다. 그는 떠나고, 그가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이기자’는 함성만 들린다. 그리고 그 함성 속에 그 죽음의 의미마저 죽어가고 있다.


Ⅱ. ‘실패’의 증거들


개인이든 국가든, 또 기업이든 종교기관이든 결정행위를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문제를 문제로 알아야 하고, 그에 맞는 ‘시의적절’하고도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또 어떤 조직도 살아남지 못한다.

 

참여정부 시절, 결정이 너무 느리다는 생각에 청와대가 그 속도를 계산해 본 적이 있다. 노태우 정부에서부터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의 3000여 개의 제ㆍ개정 법률을 대상으로 했는데, 공무원 책상 위에서 출발한 법률안에 국회를 통과하여 집행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35개월이었다. 거의 3년이 걸린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모든 과정을 통과한 것만 그렇다. 중간에 폐기되거나 사라진 의미 있는 것들은 계산에 넣지 않고도 말이다.

 

무슨 이야기냐? 인수위에서 시작한 일이 레임덕이 시작될 무렵에야 집행단계에 이른다는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하는 엄청난 변화를 생각해 보라. 글로벌 산업구조의 변화나 동북아 질서의 변화 등을 생각해 보라. 양극화와 가족붕괴에다 ‘고용절벽’과 ‘인구절벽’의 문제 등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변화까지 생각해 보라. 이런 느린 속도의 결정으로 나라가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겠나.

 

속도의 문제는 그나마 낫다. 결정의 합리성은 그야말로 바닥수준이다. 우선 떠올라야 할 의제부터 잘 떠오르지를 않는다. 조선산업과 해운산업 등의 문제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양극화와 인구문제 또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 한 쪽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깊이 고민해 오던 문제들이다. 다만 제대로 된 의제로 등장하지 못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중요한 의제들이 수면위로 떠오르지도 못하고 사장되고 있다.

 

왜 의제로 등장하지 못하느냐? 우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집단들, 특히 정치집단에 철학과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기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다 보니 목소리 큰 쪽이나 네트워크가 강한 쪽 사안들이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새로운 변화를 감안한 비전이나 전략,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새로운 의제는 나올 수가 없다. 정권을 잃어가면서도 노동개혁을 추진했던 독일 사민당의 경우나 세제개혁을 했던 캐나다 보수당의 경우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태산을 옮겨도 시원치 않은 판에, 그래서 온 동네 사람들이 있는 중장비를 다 동원해서 덤벼도 시원치 않은 판에, 삽자루 잡는 방법이나 신발 끈 매는 방법을 의제로 삼고 있다. 새삼스레 성호 이익 선생(1681-1763)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 “펄펄 끓는 용광로에 쇳덩이를 집어넣어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야 될 판에, 불에다 쇠를 달구어 결만 두드리는 대장장이 노릇이나 하고 있다.”


어쩌다 떠오른 중요한 의제들도 수시로 상대를 찌르거나, 스스로의 이익을 강화하는 ‘무기’로만 쓰인다. 이를테면 세월호 문제도 정부를 공격하는 무기로 썼을 뿐 이후 안전문제에 큰 변화는 없다. 화물까지 실은 낡은 여객선 문제나 광역버스의 입석문제도 여전하고 말이다.

 

Ⅲ. 실패의 원인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글로벌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문제이고, 또 하나는 우리 사회가 갖는 특별한 문제다.

 

먼저 우리 문제는 길게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 지역주의와 남북분단에 따른 진영논리의 강화 등, 모두들 듣고 또 들은 문제들이다. 한 가지 꼭 보탠다면 노동시간이 길어 국민들이 정치나 국정을 깊이 생각하거나 생산적으로 관여할 시간이 없다는 점, 그래서 쉽게 비판이 아닌 비난과 힐난 쪽으로 움직이게 되고, ‘분노장사’와 ‘선동’에의 유혹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는 것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 특유의 이러한 문제보다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반적인 문제에 좀 더 길게 지적할까 한다. 관심이 아무래도 좀 떨어지는 것 같아서이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책문제의 변화다. 우선 과거 농경사회나 초기 산업사회에 비해 국가가 다루어야 할 정책문제의 수가 많아졌다(대량화). 그리고 문제와 문제가 얽혀있는 구조도 훨씬 복잡해졌다(복잡화). 이것을 풀면 저것이 막히고, 저것을 풀면 이것이 막힌다. 또 그 내용 또한 매우 다양해졌으며(다양화), 해결에 있어서도 신속성과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신속성 요구, 전문성 요구).

 

둘째, 시민사회와 시장이 크게 성장했다. 먼저 정보통신기술의 진보에 따라 엘리트와 대중 간의 지식 및 정보의 비대칭성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직접 참여를 위한 기제도 크게 강화되었다. 특히 SNS와 IT 기술의 발달은 시민사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키우고 있다.

 

시장의 성장 또한 괄목할 만하다. 시장이 글로벌화되는데 비해 이를 공적으로 규율해야 하는 국가는 여전히 국가단위로 남아 있다. 자연히 기업들은 국가의 조세와 규제를 ‘쇼핑’하고 다니면서 조세확보 기능 등 국가의 전통적 기능을 약화시키고 있다. 시장이 국가 위로 올라서게 되었다는 말이 옳을 것 같다.

 

그리고 셋째, 상대적으로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 시장이 글로벌화되는 반면, 이를 규제하는 국가는 여전히 국가단위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 결과 시장의 주체인 기업들이 국가의 규제와 조세를 ‘쇼핑’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되었고, 국가는 이러한 환경 아래 전통적으로 수행해 오던 역할과 권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게 되었다. 소위 新자유주의적 질서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풀어야 할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시민사회와 시장의 요구도 커졌다. 하지만 국가의 권능과 역할, 즉 통치역량(governability)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불균형이 세계의 모든 국가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보라.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가 국가부채가 늘어나는 등 재정이 악화되고 있다. 조세권력, 즉 조세를 거둘 수 있는 힘은 줄어드는 반면 고령화와 민권 신장 등으로 복지 수요 등은 크게 늘어나고 있어서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일자리를 죽이는 기술혁신 등 온 세상을 뒤흔드는 문제가 일어나고 있지만 이를 감당해야 할 국가부문의 힘과 능력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국가부분이 힘을 합칠 수 있는 글로벌 거버넌스라도 잘 확립되어 있으면 다행이련만 그렇지도 못하다. 특히 동북아지역은 지역협력체제조차 요원한 상황이다.

 

이러한 국가부문의 위기 위에 전통적 거버넌스 구도의 문제점도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의회제도의 침몰이다. 오래전 미래학자 토플러는 ‘의회는 박물관으로 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했다. 극심한 사회변화 속에, 또 국가부문의 위기 속에 바로 그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Brexit)만 해도 그렇다. 영국이 어떤 나라던가? 가장 모범적인 의회를 운영해 온 나라 아니던가? 그런 나라의 의회가 유럽연합을 탈퇴하느냐 마느냐의 중대한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결국은 국민투표에 붙였다.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 말고는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의회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우연이 아니다. 농경시대와 초기산업사회만 해도 의회에 상정되는 법안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급하게 결정해야 할 사안이나 전문성을 요하는 사안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국회가 그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즉 대화하고 타협하고 대립하고 갈등하면서도 만족할만한 수준의 처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연간 수천 건의 법안들이 상정되고 있다. 대화와 타협과 대립과 갈등의 기구인 의회가 무슨 수로 일 년에 수천 건의 법안을, 그것도 이념과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켰을 뿐만 아니라 신속성과 전문성을 요하는 법안들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나. 더욱이 국가 자체의 통치역량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말이다.

 

우리만이 아니고 영국만이 아니다. 의회를 비롯한 국가부문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정치신뢰도가 내려앉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의 트럼프나 필리핀의 두테르테 같은 비합리적이고 과격한 성향의 정치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민주주의 그 자체가 큰 위험 속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Ⅳ. 무엇부터 고민할 것인가?


1. 국가, 시장, 공동체


하고 싶은 말은 많다. 하지만 오늘의 주제인 ‘개헌문제’에 맞춰, 국가운영체계를 바로 잡기 위한 고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만 이야기했으면 한다. 개헌은 헌법 조항 몇 개를 고치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헌법학자나 법률가의 일만도 아니고, 정치학자나 정치인들의 일도 아니다. 국가운영 체계를 고치는 일이고, 그만큼 큰 틀의 고민이 필요하다. 당연히 글로벌 차원에서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우리 특유의 입장과 문화 등을 모두 반영한 고민이어야 한다.

 

고민의 출발은 국가부문의 위기가 어디서 출발하고 있는지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변화가 극심한 세상에서, 또 이미 많은 것이 변한 세상에서 나라를 움직이는 세 개의 축, 즉 국가와 시장 그리고 공동체가 각각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들이 오가야 한다. 현실의 문제와 규범의 문제가 함께 엮인 문제이다.참고로 흔히 말하는 스웨덴을 보자. 따라 하자는 게 아니다. 또 국가의 조세확보 역량 등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을 생각할 때 따라 갈 수도 없는 국가다. 어떠한 고민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기 위해 보자는 것이다.

 

스웨덴은 규제자유도가 유럽 43개국 중 10위 안팎에 있을 정도로 시장이 자유롭다. 흔히 알고 있는 상식과 달리 우리가 금기시하는 영리병원도 허용되는 국가이다. 시장이 자유로운 만큼 시장소득의 불평등은 지니계수로 0.44나 된다. 0.34 정도 되는 우리보다 훨씬 심한 국가이다(해마다 차이가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OECD 통계 등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하지만 국가가 시장소득의 반을 거두어 재분배를 한다. 그 결과 시장소득이 아닌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0.27 정도로 떨어진다. 0.17이 떨어지는 셈이다. 겨우 0.02~3 정도 떨어지는 우리와는 현저히 차이가 난다.여기에 강력한 지방분권으로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와 그 권한을 나누고 있다. 의회를 포함한 중앙정부는 그만큼 업무를 줄일 수 있고, 따라서 정말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 또한 이 분권적 구도를 바탕으로 지역공동체와 시민사회가 살아서 움직인다. 말하자면 국가와 시장 그리고 공동체가 모두 살아서 움직이고 있고, 국가부문 또한 중앙과 지방이 권한과 책임을 나누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가? 시장은 규제에 묶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국가는 재정능력이 약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또한 지방자치는 중앙정치의 연장이 되어 엉망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 자치권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강화시켜 주라는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가 되어 있다. 당연히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형성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국가와 시장 그리고 공동체라는 세 바퀴가 모두 제대로 돌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제대로 작동되지도 않고, 또 작동할 수도 없는 국가부문, 그것도 국회를 포함한 중앙정부가 시장과 공동체의 성장까지 막고 있는 양상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음을 증명한 중앙정부 중심의 국가주의 체제가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집중되었던 권한이 국회로 분산되었을 뿐, 국가권력이 시장과 공동체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지배하는 체제는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국가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체제로 나라의 미래와 번영을 이룰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그만큼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2. 국가부문 1: 종축
이야기를 좁혀 국가부문을 살펴보자. 우선 종축으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관계이다. 앞서 가는 대부분의 국가가 ‘보충성의 원칙’을 바탕으로 지방분권을 국가운영의 중심틀로 삼고 있다. 공동체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부분을 기초지방정부가 하고, 기초지방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을 상급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의 기본정신이 되어 있고 적지 않은 국가들이 이를 헌법정신으로 천명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국가의 기능이 과거와 같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공동체의 역할이 나라의 미래를 좌우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며, 기초지방정부 등 권력이 시민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이러한 공동체의 형성도, 또 그 역할을 이끌어내는 것도 용이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있다. 권한과 책임을 지방으로 넘김으로써 의회를 포함한 중앙정부는 그야말로 중앙정부가 해야 할 ‘큰 일’에 집중하게 하자는 것이다. 의회가 지방 군수나 면장이 해도 될 일까지 관여하는 구도로는 국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정신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경쟁자가 존재하지 않아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중앙정부와 달리 지방은 서로가 경쟁하며 국가의 혁신을 주도하게 한다.

 

우리는 여러모로 잘못되어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차피 국가가 과거와 같은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중앙정부가 권력을 과점하고 있다. 지방자치는 더 이상 잘못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놓고, 자치권 또한 제약하고 있다. 공동체가 제대로 자랄 리 없고, 혁신이 제대로 일어날 리가 없다.

 

3. 국가부문 2: 횡축

다음은 국가부문의 횡축에 관한 문제이다. 즉 입법 행정 사법, 그 중에서도 특히 입법과 행정의 기능과 그 상호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다.

 

현재의 체제는 분명 문제가 있다. 우선 대통령의 힘에 관한 문제인데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대통령은 나라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누구 한 사람 총리시키고 장관시킬 수 있다. 특정 기업을 조금 봐 줄 수도 있고, 누구 한 사람을 잡아넣기도 하고 풀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권력’이다. 특히 공사·공단의 사장을 앉히고 하는 것을 힘이라 하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국가운영에 있어 작은 ‘쪼가리 권력’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목표가 불분명하고 철학도 빈약한 집단들이 워낙 많다 보니 이런 ‘힘’을 ‘힘’이라 한다. 관심 또한 누가 장관이 되고 누가 공사·공단 등 어떤 기관의 장이 되고, 또 누가 공천을 받느냐에 가 있는데, 이런 것을 ‘힘’이라 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산업구조와 인적자원 양성체계를 바꾸고, 금융체계를 바꾸고 자본시장을 육성하고… 시장 공동체 국가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 등인데, 이런 일을 할 힘이 대통령에게는 없다. 시작하는 순간 바로 상처를 입고, 강하게 추진하면 할수록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어떻게 보면 대통령은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에까지 책임을 지고 있다. 이를테면 청년실업은 산업구조가 바뀌고 인적자원 양성체계가 바뀌어야 가능한 일인데, 이런 일은 잘할 수가 없다. 법안 하나 만들어 집행에 이르기까지 35개월이 걸리는 판에, 노동자와 자본 모두 새로운 산업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거의 기적이 되는 마당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도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태산도 들어 올릴 것 같이 말하지만 실제 대통령이 되어서는 삽자루 한 번 쥐었다 놓는 것으로 끝이 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책임은 크고 힘은 없다. 그래서 발제자는 이를 ‘역삼각형’이라 부른다. 역삼각형의 윗변처럼 헌법적 의무와 정치적 책임을 크나, 그것을 받쳐 줄 권력적 기반은 약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쉽게 상처를 입는다. 그것이 한국의 대통령이다.


국회는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그 권한이 커졌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부에 대한 상대적 권한 말이다. 뿐만 아니다. 중앙집권적 구도 아래 지방정부가 할 일까지 관여를 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국회에 비해서도 그 역할이 크다. 이들 국가의 경우 많은 부분 전문적인 문제는 전문가 위원회, 노사문제와 같이 이해당사자들끼리의 합의가 중요한 것은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조합주의적 기구, 또 국가 미래와 관련된 사안들은 현자들로 구성된 조직 등으로 그 역할을 넘기고 있다. 이들 기구들이 결정해 오면 의회는 이를 그대로 통과시켜주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독일의 노동개혁도 독일 의회가 아니라 하르츠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이룬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 의회는 그야말로 국가 의회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집중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회주의가 전반적으로 위기에 빠진 상황 속에서도 그 나름의 체면과 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우리의 국회는 다르다. 이런 권한 저런 권한, 소화해 낼 수도 없는 권한을 모두 쥐고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국가 중심주의의 문화와 중앙집권적 체제가 존속하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 그러하다.

 

왜 이 권한들을 쥐고 있느냐? 대통령과 달리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주의 정치구도와 다당제의 성립을 어렵게 하는 소선거구제 등 갖가지 모순으로 아무리 잘못해도 또다시 당선되는 구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여기에다 빠져나가는 방법도 많다. 대통령이 잘못하면 모든 잘못을 대통령에 돌리고 신당을 만들어 나가거나 출당을 시켜 소위 ‘차별화’를 한다. 당의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인재영입’의 분식(粉飾)‘을 한다. 또 ‘물갈이’ 한다며 현역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꼬리 자르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하여 다시 권한은 있고 책임은 없는 기구가 된다.


Ⅴ. 어떻게 할 것인가?: 권력구도 vs. 책임구도
개헌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개헌 담론의 수준이 매우 낮다. 변화를 보는 눈도 부족하고 미래를 위한 비전도 철학도 약하다. 기껏해야 대통령 권력을 어떻게 하느냐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해되지 않는바 아니다. 펼치면 펼칠수록 판도라의 박스가 되니 이것 하나만이라도 어떻게 해 보자는 뜻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시각 자체는 충분히 넓어야 할 것 아닌가.


대통령의 권력에 좁혀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다. 담론수준이 낮아도 너무 낮다. 일례로 한쪽은 대통령의 권력이 너무 강하니 분권형 대통령제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책임총리제 등을 주장한다. 또 다른 한쪽은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약해서 되는 일이 없으니 4년 중임제 개헌을 해서 대통령 권한을 추진력을 강화시키자는 주장을 한다. 때로는 같은 사람이 아침에는 이 이야기를, 저녁에는 저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좁혀서 이야기하자면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가 더 문제다. 이미 새로운 세상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정책문제의 특성이 농경사회나 초기산업사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변하고 있고, 영국의회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당장에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금 당장 의회주의를 포기할 수도 없고, 대의민주주의를 그만둘 수도 없다. 하지만 고민은 철저히 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장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새롭게 정리하느냐의 문제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며, 조합주의적인 기구나 전문가적 기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대한 높은 수준의 논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고민과 함께 권한과 책임을 일치시키는 문제도 심각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특히 책임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를테면 실제 권능에 비해 책임이 큰 대통령의 책임은 덜어 주어야 하고, 책임에 비해 권능이 큰 국회의 책임은 키워야 한다.


가장 좋은 방안은 내각제일 것이다. 권한과 책임이 보다 더 일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결정의 속도 또한 빨라질 수 있다. 통상 대통령제가 결정의 속도가 빠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최근 들어 내각제 국가의 결정속도가 더 빠른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통령제 국가의 경우 정책문제는 행정부에서 한 바퀴 돈 뒤, 국회에서 또다시 한 바퀴를 돈다. 말하자면 두 바퀴를 도는 셈이다. 하지만 내각제에서는 집권당의 결정이나 국회의 결정이 곧 내각의 결정이 되고, 내각의 결정이 곧 국회나 집권당의 결정이 된다. 한 바퀴로 끝이 나는 것이다. 특히 최근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도 수상 또는 총리의 리더십을 강화하는 추세에 있다. 자연히 결정의 속도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내각제는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재벌문제 등 경제력 집중의 문제가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기업-의회-관료가 연합하는 ‘철의 삼각형(iron triangle)’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특히 정당이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상향식 공천’ 등으로 의원 개인의 자율성이 커질 수 있는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서든 국회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도는 강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국정이 바로 될 수 없다. 국정이 엉망이 되면 정당이 존속할 수도 없고, 그 소속 국회의원의 정치적 생명이 끝이 나는 구도를 확립하지 않고는 국회도 국정도 변하지 않는다. 국회가 국가주의의 틀 속에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면서 책임지지 않는 권한을 내려놓지 않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는 대통령의 권한을 제 아무리 키우고 제약하고 해도 국가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내각제적 요소를 더 강화하는 방법도 하나의 안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총리를 집권당이나 국회가 선출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책임총리제가 이루어지고, 국회나 집권당은 국정에 대한 책임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의 개혁은 개헌을 할 이유도 없다. 집권당 스스로 총리를 선출해서 대통령에게 추천을 하고 대통령이 이를 받으면 된다. 받지 않으면 모든 것이 대통령의 책임이 될 것인 바, 대통령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집권당 스스로 결정하면 될 일을 개헌까지 하며 국민을 피곤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개헌을 하지면 오히려 더 큰 목적, 즉 새로운 세상을 향한 새로운 철학과 국가운영의 틀을 새롭게 하는 내용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Ⅵ. 맺으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헌논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첫째는 정치권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올 리 없다. 수시로 집권의 수단으로, 그렇지 않으면 집권을 하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하는 수준이 이야기들도 나오고 있다. 친박-반기문 연합의 이원집정부제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나라가 이들을 위해 있는 건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둘째, 개헌을 하자는 목적이 바로 잡혀있지 않다. 대통령의 권한 문제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증거이다. 문제는 대통령 권한뿐만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국가중심주의와 중앙정부 중심의 구도가 더 문제다. 그 속에서 대통령도 국회도 문제이고, 국회는 더욱 큰 문제이다.


뿐만 아니다. 권력구도를 바로 잡는 것만 해도 그렇다. 즉 누구에게 권력을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책임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더 문제다. 책임을 제대로 물으면 책임지지 못할 권한은 내려놓게 된다. 그러면서 시장과 공동체와 국가의 역할이 바로 잡히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권력구도가 아닌 책임구도 문제에 더 큰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끝으로 셋째, 결론적으로 담론수준이 낮다. 여기에는 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진영논리와 ‘이기자’의 논리에 함몰되어 누구를 운전석에 앉힐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문제는 운전기사가 아니다. 자동차를 고쳐가면서 운전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비전과 정치력을 가진 정치집단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수록 운전기사보다는 자동차를 고치는데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지식인 사회가 제대로 역할을 하는 것 같지 않다. 당연히 발제를 하는 이 사람을 포함해서이다.

 

이 상태면 개헌이 되어도 문제이고, 되지 않아도 문제이다. 좁은 시각에서 정략적 개헌이 시도되거나, 그것조차도 논란만 무성하다가 없던 일로 될 가능성도 높다. 바로 보고 바로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개헌이 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논의였다는 소리라도 듣는다. 되어도 되지 않은 것만 못한 개헌이 되고, 또 그런 쓸데없는 개헌을 위한 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간단하게 적는다는 것이 너무 길었다. 죄송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