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에 물질이 있다
입력 2017.12.14. 19:47 수정 2017.12.14. 20:26
[원병묵의 물질(物質)로 읽는 예술]
①허블 우주망원경과 웨스터룬드 2 성단
[한겨레]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덕분에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을 볼 기회가 많았다. 저녁 무렵 집집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면 동네 가득 나무 연기가 자욱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동네방네 놀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보며 마당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별똥별이 떨어질 땐 무슨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한껏 즐거웠다. 그 시절 밤하늘은 어찌나 밝던지 금방이라도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했다. 자연을 가까이 접하는 동안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고 언젠가 자연의 비밀을 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과학자의 꿈은 그렇게 영글어 어느새 물질의 비밀을 탐구하며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는 과학자가 되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만들어 하늘을 처음으로 관측한 1610년 무렵 인간의 시선은 태양계를 넘지 못했다. 인간의 시선이 우리 태양계와 우리 은하를 본격적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은 에드윈 허블이 캘리포니아 패서디나 근처 윌슨산 천문대에서 우리 은하 밖 천체들을 관측하기 시작한 1920년대다. 그러나 허블을 포함한 천문학자들은 언제나 비구름과 대기 현상이 빛을 방해하지 않는 더 높은 곳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싶어 했다. 그 바람은 마침내 1990년 4월24일 실현되었다.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쏘아올려 비구름과 대기권 저 위에 ‘허블 우주망원경’을 설치한 것이다. 이제 우주에서 맘껏 깨끗한 우주를 관측할 수 있다.
2015년 4월23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허블 우주망원경 발사 25주년을 기념하여 허블 우주망원경이 찍은 대표 사진들을 공개했는데, 그중 하나가 여기에 실린 ‘웨스터룬드 2’(Westerlund 2) 성단 사진이다. 2009년에 찍은 이 사진 속 성단은 지구로부터 약 2만 광년 떨어진, 생긴 지 200만년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젊은 성단이다. 사진에서 밝게 보이는 부분은 성단에서 강한 항성풍이 날아오는 곳이다. 이 항성풍이 가스와 충격파를 끊임없이 쏟아내는데, 이것이 별의 탄생을 촉진한다. 사진에는 이제 막 태어난 수천개의 젊은 별들과 우리 은하에서 가장 밝고 가장 거대한 별들이 포함되어 있다.
웨스터룬드 2 성단 사진의 환상적인 풍경 앞에서 과학자들은 ‘측량 가능한’ 사실들을 찾고,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찾는다. 과학자들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인식과 증명의 경계를 탐색하지만, 예술가들은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한계를 넘고자 몸부림친다. 과학자들은 물질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자 하고, 예술가들은 물질을 통해 세상을 표현하려 한다. 이 성단 사진에서 물질에 관한 과학과 예술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물질과 예술’을 주제로 한 연재의 첫 작품으로 이 사진을 선택했다. 이 사진은 과학과 예술의 공존 지점을 잘 보여주는 최고의 작품이다. 이 사진의 중앙은 허블 우주망원경에 탑재된 ‘광시야 카메라 3’(Wide Field Camera 3, WFC3)를 이용하여 가시광선과 근적외선 영역의 노출을 합성하여 얻었다. 사진 주변은 ‘탐사용 고성능 카메라’(Advanced Camera for Surveys, ACS)에서 얻은 가시광선 사진을 합성한 것이다. 광시야 카메라 3는 다양한 필터와 프리즘을 이용해 가시광선은 물론 자외선과 적외선 검출이 가능하고 넓은 시야각으로 지상에서 볼 수 없는 천체의 다양한 현상을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다. 즉, 웨스터룬드 2 성단 사진은 적, 청, 녹 삼원색 필터로 찍은 가시광선 사진, 적외선 검출기로 얻은 적외선 영상을 정밀하게 합성해 재구성한 것이다. 천문학자들과 광학기술자들, 컴퓨터 공학자들의 협업이 별과 물질이 생성되는 순간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창조주의 손’을 보고, 누군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전율하기도 하며, 천문학자는 별 생성 비밀을 캐내기 위해 눈을 반짝일 것이다.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입자와 가스로 이뤄진 항성풍의 충격파가 만들어낸 기묘한 형상과 패턴, 그 사이에 숨겨진 법칙을 몹시 궁금해할 것이다.
웨스터룬드 2 성단 사진은 별의 생성 과정과 물질의 기원을 보여주는 절묘한 작품이다. 웨스터룬드 2 성단은 1960년대 이 성단을 발견한 스웨덴 천문학자 벵트 웨스터룬드의 이름을 딴, 약 3천개의 별들로 구성된 거대한 집단이다. 사진 중앙에 아주 밝고 무거운 별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고, 이들 어리고 무거운 별들에서 나오는 강력한 항성풍과 자외선 복사 에너지가 주변 먼지와 가스 구름을 밀어낸다. 성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항성풍과 에너지가 별들이 태어나는 거대한 먼지기둥과 산등성, 계곡 같은 환상적인 하늘 풍경을 만든다. 이 아름다운 장면은 마치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 같다. 밝은 별 주변의 붉은 점들은 갓 태어난 어두운 별들의 모습으로, 이들을 만든 먼지와 가스로 이루어진 거대한 둥지에 안겨 있다. 사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밝고 푸른 별들은 성단에 속한 별들이 아니고 앞쪽 어딘가에 위치한 별들이다. 허블 우주망원경의 가시광선과 근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이 사진에서 붉은색 음영은 수소 가스, 청록색의 대부분은 산소 가스다. 물질의 생성 비밀을 간직한 우주는 그 자체로 가장 완벽한 예술 작품이다.
‘물질’(物質)은 사물의 본바탕을 일컫는 말이다. 사물을 구성하는 구성 요소인 물질은 일정한 질량과 크기를 갖는다. 물질은 압력과 온도에 따라 기체, 액체, 고체의 상태가 끊임없이 변하고 ‘물성’(物性)이라는 고유한 성질을 가진다. 물성은 물질의 성격이다. 물질이 갖는 고유의 전기적, 자기적, 열적, 기계적, 광학적 특성과 그 근원을 알면 물질을 잘 활용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은 물질을 ‘쿼크’와 ‘렙톤’이라는 기본 입자와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이라는 네 가지 기본 힘으로 설명한다. 물질의 질량((質量)은 원자핵을 구성하는 쿼크와 렙톤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강력에 기인하고, 물질의 크기는 원자핵을 도는 전자의 궤도가 불확정성 원리와 전자기력 때문에 일정한 공간이 필요한 원자 크기에 기인한다.
우주는 물질의 기원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은 암흑 에너지, 암흑 물질, 원자, 광자, 중성미자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우주의 질량과 에너지 대부분은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에서 비롯된다. 은하와 성운의 회전 속도나 서로 충돌하는 은하들의 기묘한 형상, 우주의 가속 팽창 등에서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의 권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중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이 약 95%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가 관측하는 물질은 우주의 5% 정도일 뿐이다. 어쨌든 우주는 위에서 말한 물질로 가득하다.
우주는 쿼크와 렙톤, 빛과 입자,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 초신성 폭발과 중성자별 충돌 등등 이 모든 물질이 서로 얽히고설키고 서로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풍경을 만든다. 이 환상적인 풍경 앞에서 과학자들은 ‘측량 가능한’ 사실들을 찾고,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찾는다. 과학자들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인식과 증명의 경계를 탐색하지만, 예술가들은 인식과 증명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생각의 한계를 넘고자 몸부림친다. 과학자들은 물질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자 하고, 예술가들은 물질을 통해 세상을 표현하려 한다. 이 성단 사진에서 물질에 관한 과학과 예술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주가 물질로 가득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중심에 물질이 있다. 자연을 표현한 예술에서 과학의 원리를 찾을 수 있고, 물질의 이해로부터 예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앞으로 과학과 예술을 잇는 물질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물질을 이용한 예술의 표현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프랙털을 표현한 잭슨 폴록, 나노 입자를 사랑한 구스타프 클림트, 물의 패턴을 그린 채성필 작가, 다 빈치와 반 고흐가 그린 난류, 현대 과학의 난제인 커피 얼룩 효과, 모래 알갱이가 보여주는 복잡성, 불완전한 유리의 아름다움, 버블과 거품의 단단함, 변하지 않는 빛을 만드는 구조색 등 ‘물질과 예술’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으로 파헤쳐 보고자 한다.
*참고자료
[1] 김항배, <우주, 시공간과 물질>(컬처룩, 2017년)
[2] 나사, ‘허블 우주망원경’ (https://www.nasa.gov/mission_pages/hubble/story/index.html)
[3] 네이처, ‘허블 25주년 기념 뉴스’(http://www.nature.com/news/cosmic-confetti-celebrates-hubble-s-25th-birthday-1.17408)
[4] https://www.spacetelescope.org/images/heic1509a/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원병묵 성균관대 교수는 연성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물리학과 재료공학 사이에서 기초와 응용을 넘나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 엑스선 나노 영상과 연성물질 물성 연구의 권위자로, 지난해 촛불집회 인원 추산을 유체역학적으로 접근하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원 교수가 예술 작품 속에서 물질의 원리를 읽어내는 ‘물질로 읽는 예술’을 4주마다 한번씩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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