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일불(三身一佛) <淸華큰스님 法語>
삼신일불(三身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여래(如來) | 진여(眞如) +- 법신… 청정법신비로자나불 -+ | 법성(法性)
| 法身…淸淨法身毘盧遮那佛 | | 실상(實相) 보리(菩提) 심(心:Mind)
| 보신…원만보신노사나불 | 불(佛:Buddha) | 진아(眞我) | 報身…圓滿報身盧舍那佛 | | 열반(涅槃)
| 극락(極樂)
| 화신…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 | | 주인공(主人公) +- 化身…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
+ | 중도(中道) | 묘각(妙覺) +-일물(一物)
부처님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를 보다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삼신일불(三身一佛)을 아시면 아주 편리하십니다. 이것은 현교(顯敎)나 밀교(密敎)나 다 삼신일불, 이른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이른바 근본불교(根本佛敎)라든가 또는 보통 공부하는 분들은 삼신(三身)에 대해서 별로 말씀을 많이 안하시기 때문에 불교를 하신 분들도 이 삼신일불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을 가지시기가 좀 어려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꼭 이렇게 외워 두셔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삼위일체(三位一體)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신조이듯이 불교도 이 불타론(佛陀論), 부처란 무엇인가? 하는 불타론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연관을 시키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합니다.
법신, 보신, 화신이 삼신입니다. 그런데 부처면 부처님 하면 될텐데 왜 이와 같이 부처를 나누고서 법신, 보신, 화신 삼신으로 구분해서 더 복잡하지 않는가? 그러나 부처란 공덕(功德)이 하도 무량무변(無量無邊)하기 때문입니다. 이 중생계(衆生界)라 하는 것은 지금 현재는 사람도 있고 태양계도 있고 지구도 있습니다마는 몇 100억년이 지나면 파괴되어서 텅텅 비어버리고 그때는 에너지만 남습니다. 그런 때는 부처는 하나 뿐이다 해도 무방하겠지만 지금 현재와 같이 산도 있고 내도있고 지구도 있고 사라도 있고 이런 때는 변화된 그런 여러 모양이 있기 때문에 변화된 모양도 거기에 포함해서 말씀을 하셔야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겠지요.
그래서 법신(法身) 이것은 바로 우주의 순수한 생명 그 자체의 그런 면을 법신 그럽니다. 그리고 불교의 말로 해서 이것을 더 구체화시키면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조금도 때가 묻지 않은 청정한 몸인 비로자나불을 가리킵니다. '비로자나(Vairocana)' 이 말은 인도 말인데 우리말로 풀이하면 광명변조(光明遍照)라. 생명(生命)의 광명(光明)이 우주(宇宙)에 두루 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말로 하면 청정(淸淨)하고 무량(無量)의 공덕(功德)을 갖춘 그런 광명의 몸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말로 달리 하면 대일여래(大日如來)라. 큰 대(大)자, 날 일(日)자입니다. 대일여래라는 것은 보통 태양과 같은 광명이 아니라 무장무애(無障無楝)하게 우주를 다 비추고 우주에 가득찬 광명이란 의미로 대일여래라 합니다. 그래서 법신이란 뜻이나 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란 뜻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와같이 청정하니 우주에 광명으로 두루 빛나기만 하면 그때는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겠지요. 그러나 이 법신 우주에 가득찬 청정광명(淸淨光明) 가운데는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어떠한 것이나 원만하게 다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한테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능력이 원만하게 갖추고 있는 그 자리, 그 자리르 보신(報身) 그럽니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 모든 공덕(功德)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는 부처란 뜻입니다.
따라서 법신과 보신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법신이라 하는 그 우주에 충만해 있는 우주에 충만한 그런 광명 가운데 들어 있는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모든 그 성품 공덕이 보신(報身)입니다.
그리고 화신 이것은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 현상계(現象界), 태양계나 은하계나 또 산이나 지구나 우리 인간이나 모든 현상계가 이것이 화신(化身)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도 화신이고 너도 화신이고 자연도 화신이고 두두물물 다 화신입니다. 그런데 화신 견지에서는 하도 수가 많단 말입니다. 사람 수도 많지만 여러 가지 그런 갈래의 중생들이 많습니다. 생각이 없는 중생(無情衆生), 생각이 있는 중생(有情衆生), 눈에 보이지 않는 중생(無色衆生), 이런 중생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그런 차원에서 화신 그럽니다.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므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석가모니불 할 때는 좁은 의미로 인도에서 왕자(王子)로 태어나 출가해서 도를 성취한 그리고 부처가 되신 분이 석가모니불인 것이고, 광범위하게 대승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나, 너나, 천지 우주의 현상계가 모두가 다 석가모니불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지루하고 재미도 없고 그럽니다.
불교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만 염(念)하면 누구나 성불(成佛)한다. 그래 버리면 참 쉽기도 하고 누구나 할만 하겠지요.
그런데 현대(現代)를 살기가 참 어려운 때 아닙니까? 과학(科學)도 접촉해야 하고, 기독교인도 접촉해야 하고, 유교인, 도교인 우리가 모두 접촉해야 되는데 그런 가운데서 화해하고 살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것도 바르게 알고 다른 것도 바르게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피차가 다 순수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통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기본적인 것은 꼭 알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제 생활의 지침이 됩니다. 여러분들 자녀분들은 앞으로 다 대학 나오고 박사 되고 모두 다 그럴 것인데 그런 분들은 제법 무엇을 압니다. 그네들을 설득 시키려고 할 때는 우리가 좀 더 알아야 합니다.
이 법신, 보신, 화신은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끝도 갓도 없이 우주를 다 포섭해 있는 그런 쪽으로 보아서는 법신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들어 있는 모든 자비 지혜 공덕 능력 행복 이것은 보신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자리에는 행복도 다 충만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처님 자리에는 자비나 지혜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행복이사 우리가 만들어서 행복스럽게 사는, 이런 좋은 사람 만나고, 무엇이 많이 생기고, 그래야 행복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참다운 행복은 우주가 나가 되고 내가 우주가 되어서 어느 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때 그런 때같이 행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 행복이 이 보신 부처님 가운데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자비도 사랑도 한도 끝도 없고, 지혜도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를 깨달은 분들이 예수나 공자, 석가 아닙니까. 이런 분들의 사랑이나 자비는 한계가 없습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 부모를 죽인다 하더라도 원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 원수같은 모양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 우주에 가득한 생명의 광명이 바로 법신불(法身佛)인가 하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자비나 행복이나 지혜나 능력이나 이것이 보신불(報身佛)이고, 이 법신과 보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현상계 모두가 화신불(化身佛)입니다.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지금 끝도 갓도 없는 바다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끝도 갓도 없는 바다 자체는 법신불에 해당하고, 바다에 가득 차 있는 물 그것은 보신에 해당하고, 그 바다 물에서 바람 따라 일어나는 크고 작은 그 많은 거품이나 파도는 화신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세존 부처님께서도 이런 비유를 많이 쓰셨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신 이것은 그야말로 끝도 갓도없는 무량무변의 바다에 비유하고, 보신은 바닷물에 비유할 수가 있고, 화신은 바닷물에서 바람 따라 일어나는 천파만파, 천백억개 그런 거품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또 하나의 태양에 비유할 때는 태양 전체는 법신불에 해당하고, 태양 광명은 보신불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이런 비유도 부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법신불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라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고 또는 아미타불로 배대해서 의미할 때는 아미타(阿彌陀)의 타(陀)에 해당합니다.
법신이라는 것은 어디에 구간 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 적으로 우주에 충만한 순수한 생명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만보신 노사나불, 이것은 바로 그 한도 끝도 없는 법신에 들어 있는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하나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때는 성(性)이라 하고, 즉 하나의 성품(性品)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우주에 들어 있는 하나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미타(阿彌陀)의 미(彌)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은 우주의 모든 현상, 나나 너나 일체존재 현상계 이것은 상이기 때문에 이제 공성상(空性相)의 상(相)에 대비합니다. 그와 동시에 아미타불에 붙이면 그때는 아(阿)에 해당합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것은 밀교적인, 참다운 대승의 뜻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법신과 보신과 화신을 다 합한, 즉 말하자면 삼신일불(三身一佛) 하나의 부처님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입으로 쉽게 외우시는 아미타불 이것이 사실은 이와같이 우주 모두를 다 포함해 있는 우주의 생명 자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통 염하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무엇인가? 무슨 보살 무슨 보살 그 굉장히 많이 있어서 부처님 이름도 하나만 있으면 좋은 것인데 하도 많으므로 우리가 곤란스럽습니다. 그리고 어떤 스님들한테 물어 보면 부처님도 이름따라 따로따로 있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버리면 더욱 혼란스럽겠지요.
부처님은 하나의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이 부처, 저 부처가 뿔뿔히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은 하나의 공간성(空間性)이 있는 물질이 되겠지요. 그러나 시공(時空)을 떠나버린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이 부처, 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부처님 이름도 약사여래(藥師如來) 부처님!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부처님! 그렇게 이름들이 많이 있지마는 그것이 따로따로 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하도 많지만 간단히 세 차원으로 나누면 이와같이 법신, 보신, 화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 차원에 다 못들어 갈 때는 약으로 해서 우리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면에서는 약사여래, 도 하늘에 있는 별만을 의미할 대는 치성광여래, 이와 같이 이름이 붙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실은 부처님은 하나입니다. 무량무변의 끝도 갓도 없는 생명이 어디 가서 몸이 있고 작고 크고 넓고 좁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지장보살(地藏菩薩)도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하나의 순수 생명 자리입니다.
중생 영혼(靈魂)은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영혼을 다스려서 인도하는 그러한 의미에서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자비로 우리 중생을 제도하시는 부처님을 볼 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 지혜로 우리 중생을 제도하는 면에서 볼 때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시든지 평소에 관세음보살을 많이 외우셔서 관세음보살 하시기가 좋으신 분들은 관세음보살을 외이신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마음만은 이와같이 삼신일불이라. 부처님은 바로 우주를 통괄해 있구나 생각하십시오.
마음을 열으셔야 됩니다. 불교는 마음을 여는 공부입니다. 불자님들 어려우시더라도 이 부처님 공부는 마음을 여는 공부입니다.
여기 계시는 어른들께서는 그야말로 일기당천(一騎當千)이라. 모두 한 분이 천분이나 만분이나 제도(濟度)하실 분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꼭 필요하다고 되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앞서 삼신이 바로 부처인데, 그것은 또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부처를 생각하실 때는 꼭 항시 '마음'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가운데 들어 있는 법신, 보신, 화신 그런 공덕이나, 내 마음 가운데 있는 공덕, 지금 더러는 남도 미워하고, 못난 짓도 하고, 그런 마음 가운데 들어 있는 법신, 보신, 화신이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불교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각(自覺)입니다. 스스로 본래 부처임을 깨달아야 참다운 신앙인이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겉 신앙밖에는 못됩니다. 참 신앙이 돼야 자기를 구제하고 남한테도 구제의 소임을 다 할 수가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마음의 본래 자리가 바로 법신(法身) 부처님이고, 내 마음 가운데 들어 있는 자비나 사랑이나 지혜나 행복이 보신(報身)인 것이고, 또 내 마음의 공덕으로 이루어지는 우주만유(宇宙萬有)가 바로 화신(化身)입니다.
나와 우주는 절대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인 문제를 꼭 확실하게 느끼셔야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진리를 생각할 때는 항시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봐야 됩니다.
다른 종교와 불교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다른 종교는 뿔뿔히 봅니다. 나와 남이 둘로 있고, 도는 다른 나라와 우리 나라가 따로 있고, 자연과 인간과 다르고 하지만 불교의 기본적인 대승사상 이것은 절대적으로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지금 현상계 겉만 보기 때문에 나와 남이 둘이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도 우리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대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지금 자연보호(自然保護) 운동을 굉장히 맹렬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연보존이라 자연정화라 모두 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큰소리 치고 제아무리 그런 캠페인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자연과 나와 뿔뿔이다.' '자연은 자연이고 나는 나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온전한 운동이 못됩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과 같이 자연과 나는 혼연히 하나의 생명이다. 이래야 자연이 온전합니다.
다만 일반 중생들은 겉으로 보고 성인들은 안으로, 속으로, 본질로 봅니다. 우리는 본 바탕에서 볼 것인가 또 피상적으로 겉만 볼 것인가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성인과 일반 중생은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성인들은 근본 바탕에서 보는 것이고 일반 중생들은 겉으로 봅니다.
그리고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우리 마음을 성자 마음과 같이 여는 것입니다. 성자 마음은 우주를 곧이 곧대로 그대로 봅니다. 자연의 도리 그대로 보는 것이 성자의 마음입니다.
공자나 석가나 예수나 다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시대에 따라서 그때그때 표현의 방편은 다르게 했다 하더라도 그분들이 보신 것은 다 줄거리는 똑같습니다.
그것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분들 차원에서는 나와 남이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자(聖者)들은 항시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입니다. 내가 따로 없고 도 내것이라고 고집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분들은 자기 소유가 없습니다.
석가의 평생을 보시고 공자나 예수의 평생을 보십시오. 자기 앞으로 무슨 소유를 남겼습니까.
우리 세간 사람들이 그렇게 다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을 우리가 표준으로 해야 합니다. 어느 땐가는 우리도 꼭 성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라는 것은 종당(終當)에는 다 파괴(破壞)가 되는 것입니다. 150억년 이상이 되면, 현대 물리학도 증명을 다 합니다. 파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 때는 자기 몸뚱이나 남의 몸뚱이나 어디가 남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생명은 비단 인간 생명분만 아니라 소나 돼지나 또는 개나 그러한 축생(畜生)도 한 생명입니다. 근본 자리에서는 그런 축생도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무생물(無生物)이나 생물(生物)도 근본 순수 에너지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따라서 지금 눈앞에 있는 고양이 한 마리나 개 한 마리나 또는 곤충이나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진화(進化)가 되어서 종당에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사람보다 더 진화돼서 천상(天上)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에 보면 다 나와 잇습니다.
천지 우주가 몇 100억년 뒤에 파괴될 때에 우리 인간 존재나 중생들은 다 높은 천상에 올라가서 우주의 이 형체가 파괴되어도 그 비참한 꼴을 우리가 당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바이블을 잘 못 해석한 사람들은 중생을 태운 체로, 믿는 자기들만 휴거로 해서 구제해 올라가고 다른 사람들은 심판(審判)을 받는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성인의 우주관(宇宙觀)은 중생들이 닦으면 우리 사람보다 못한 중생들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우리 사람도 보다 금생(今生)에 선량(善良)한 행동을 많이 해서 천상으로 올라가고, 그렇게 해서 모든 생명체가 순수한 천상에 올라갔을 때 우주가 파괴된단 말입니다. 우주가 파괴되는 참화(慘禍)를 우리가 입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 부처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또 잘 이해를 못하신 분들은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욕심도 많고 남들을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고 내 마음 내가 돌아보아도 하찮은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부처일 것인가?
하찮은 이것은 자기 겉에 뜬 그림자같은 허망한 마음입니다.
우리 본심(本心) 양지(良知)라. 우리 본심 이것은 석가모니와 공자와 예수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우주를 사무쳐 보고 우주와 한 생명인 그 마음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어떤 종교나 우리 마음을 성자의 마음같이 활짝 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차원에서 볼 때는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 가운데는 끝도 갓도 없는 자리가 법신인 것이고,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자비, 지혜, 행복, 능력이 원만한 그 자리가 바로 보신인 것이고, 이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현상계, 내 몸둥이나 당신 몸뚱이나 일체 존재 이것은 화신입니다.
이것을 다 합한 것이 결국 내 마음의 본체(本體)이고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또 다르게 말씀을 하면, 불교에 나와 있는 술어로 한도 끝도 없으나 우선 중요한 것만 다 발취했습니다.
우선 '진여(眞如)'. 바로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진여라, 또는 여래라, 진리라, 단지 진니라 하는 이치가 아니라,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입니다. 바로 여래란 말입니다. 바로 생명입니다.
우주는 모두가 다 생명 덩어리입니다. 다이아몬드나 금(金)이 다만 다이아몬드나 금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 덩어리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증명합니다. 다이아몬드도 내내야 탄소(炭素)가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탄소는 무엇인가? 탄소는 원자 핵(核)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가 적당히 거기에 알맞게 돈단 말입니다.
원자 핵은 무엇인가? 또 전자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현대 물리학은 측정(測定)을 못합니다. 왜 측정을 못하는가 하면 부단히 변화무상(變化無常)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위치(位置)를 알려고 하면 속도(速度)를 모르는 것이고, 진동(振動)하는 속도를 알려고 하면 위치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이젠베르그(Wernen K.Heigenberg)의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원리(原理)라. 물질도 저 끄트머리 가서는 결국은 확실히 알 수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자는 물질이라는 것은 본래 진동하는 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여서 하나의 모양만 낸 것이지 본래는 에너지(Energy)뿐이다.
그러기에 에너지가 바로 물질이고 물질이 바로 에너지란 그런 말씀이 여실히 현대 물리학의 결론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결론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 바로 본래에서는 에너지뿐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교식으로 말하면 색즉공(色卽空)입니다. 공즉색(空卽色)입니다. 우리 중생의 그 제한된 탐욕심(貪慾心)이나 분노하는 마음(貪心)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痴心)이나 그런 독스러운 마음 그런 흐리멍텅한 마음에 가려서 우리 중생은 지금 겉밖에는 못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의 밝은 눈으로 볼 때는 천지 우주의 겉, 이것은 움직여 가는 하나의 과정(過程)에 불과한 가상(假相)에 불과한 것이고, 그 본 바탕은 모두가 다 순수한 에너지고 생명이고 바로 부처로 봅니다.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이 우리가 지금 사는 세계 좋다고 싸우고, 궂다고 싸우고, 서로 아귀다툼 하는 사회, 이 사회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다. 이것은 지금 현대 물리학이 증명을 합니다.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모든 것은 결국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이고 또는 법성(法性), 우주의 성품(性品)입니다. 내 마음이나 부처나 이것은 바로 우주의 성품입니다.
또 중도(中道)라. 조금도 치우침이 없습니다. 중도는 우리가 공부해 가지고서 뒤에 중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이 바로 중도입니다. 어디에 치우침이 없습니다. 자비나 지혜나 사랑이나 행복이나 다 원만히 갖추고있단 말입니다.
물질에 치우침도 없고, 또 정신(精神)에 치우침도 없고, 모두가 다 마음뿐인데 물질은 우리 마음이 잠시간 모양을, 가상을 나툰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자취가 없으며 잡을 수도 없습니다. 물질과 정신은 본래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금강경을 보실 적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 인간이 보는 나라는 상(我相), 너라는 상(人相), 중생이라는 상(衆生相), 수명이 길다, 짧다 하는 상(壽者相)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같단 말입니다.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일반 사람들은 불교를 단순히 중생들이 보는 차원에서만 해석을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보통 성경은 쉽다고 생각을 하겠지요. 그러나 그 당시에 예수님은 어렵게 말씀을 해서는 누가 못 알아먹습니다. '갈릴리' 해안에서 어부나 그런 사람들이 알아 먹겠습니까? '베드로'나 '요한' 그 사람들이 어부(漁夫)인데, 따라서 소박하게 말씀하신 것이지 예수의 뜻도 똑같이 우리가 느끼는 감투나 식욕(食慾)이나 이성욕(異性慾)이나 모두가 다 허망(虛妄)하다는 것입니다.
허망하다고느껴도 우리가 참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허망하다고 느끼지 못할 대는 그것만 가지고 싸운단 말입니다. 감툰 가지고 싸우는 추태가 지금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종교를 공부하는 것은 당장에 성인은 못된다 하더라도 성인들이 말씀하신 것은 다 옳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들 말씀은 다 옳으니까 말입니다. 그분들 말씀은 다 우주의 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옳은 것입니다. 다소 약간의 차이 있게 말씀하신 것은 그 시대 상황 따라서 도는 교화(敎化) 중생의 근기(根氣)에 맞추어서 말씀했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그 분들 본래 뜻은 다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경을 보나 논어를 읽으나 바이블을 보나 칸트의 철학서를 보나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금생에 나와서 쥐꼬리만큼 배운 것, 학교에서 배우고 어디서 배우고 그런 선입관념(先入觀念)을 배제하고서 허심탄회하게 생각할 때는 다 같아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살 때입니다. 그래야 화해(和解)가 됩니다. 여러분들 이슬람의 알제리에서 극렬주의자(極烈主義者)들을 보십시오. 프랑스의 비행기를 납치해 가지고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자기들도 죽고 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이슬람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마호멧의 뜻이 거기에가 있지도 않은 것인데, 마호멧도 위대한 성자입니다. 따라서 그의 가르침도 근본 뜻은 기독교와 똑같습니다.
다만 그때그때 시대 상황에 따라서 약간씩 표현을 달리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이블을 보나 불경을 보나 가장 핵심을 보아야 합니다.
소승을 봐서는 다른 가르침하고 자꾸만 충돌이 됩니다. 대승을 봐야만 불교도 하나가 되고 다른 종교하고도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실상(實相)'이라. 부처라는 것은 바로 우주의 참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가상만 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세간적인, 성인이 아닌 한에는 모두 가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먼저 자기 무지(無知)를 알아라. 우리 범부는 자기 무지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아, 내가 무던히 공부했는데 내가 무엇을 좀 봤는데 꼭 자기 아는 것을 고집(固執)을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들대로 고집하기 때문에 서로 피차 다투게 되겠지요.
우리 중생들은 지금 가상(假相)을 봅니다.
우리 중생들 자신이 성자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판단(判斷)할 것인가? 나한테 '나'라는 관념(觀念)이 있고, 욕심(慾心)이 있고 또 기분 사나울 때 불룩거리고 하면 성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 만유가 무엇인가?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과거는 무엇인가? 이것을 모를 때는 성인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인이 아닐 때는 항시 겸허(謙虛)해야 합니다. 이른바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먼저 자기 무지를 알아라. 자기 부족(不足)을 먼저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참다운 지혜(智慧)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실상이라. 우주의 참다운 모습이란 말입니다.
또는 보리(菩提)라! 참다운 지혜입니다. 보리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라.
도는 진아(眞我)라. 참 나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중생들의 나는 망아(妄我)라. 망령될 망(妄), 나 아(我)자 망아라 합니다. 우리 범부의 나는 올바른 나가 못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나올 때 가지고 온 자기 업장(業障)에다 금생에 나와서 쥐고리만큼 배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처를 성취한 성자의 나는 그때는 참다운 나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되고 석가가 되고 공자가 되고 그래야 이제 비로소 진아(眞我)란 말을 붙입니다.
'열반(涅槃)'이라. 영원히 행복스럽단 말입니다. 번뇌(煩惱)가 조금도 없이 우리 생명도 몸뚱이사 천 번 만 번 바꿔진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 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 남편이 죽고 아내가 죽고 아들이 죽고 한다고 생각할 대는 누구나 다 슬퍼서 자기를 지탱하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새영이 자기 몸뚱이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십자가(十字架)에서 조금도 아낌없이 한 점의 회한(悔恨)도 없이 자기 몸을 바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자기 생명이 자기 몸뚱이에만 있지를 않단 말입니다. 우리 생명자체는 원래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생(前生)에도 나라는 생명이 있었고, 또 내생(來生)에 죽은 다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는 과거에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쓰는 이 몸뚱이는 과거에 있었던 것도 아니라 금생에 부모님의 연(緣) 따라서 잠시간 나와서 이와같은 몸이 된 것입니다.
죽은 뒤에는 금덩어리보다 더 귀한 내 몸이 그대로 있을 것인가? 화장(火葬)하면 재가 되고 묻으면 썩어서 없어지지 않습니까. 죽은 다음에는 이 몸뚱이 어디에도 흔적도 없단 말입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금생만 잠시간 부지하는데 금생마져도 잠시간 동안도 그 풍재(風災)라, 화재(火災)라, 지진(地震)이라 얼마나 고난(苦難)이 많습니까?
남한테 배신당하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으로 인생개고(人生皆苦)라. 결국은 따지고 보면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고생의 물결 위에서 우리가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반(涅槃)이라. 비로소 작은 나, 망령된 나를 떠나버려야 참다운 나가 돼서 영생(永生)으로 행복한, 몸뚱이야 교통사고를 만나서 죽으나 어떻든간에 우리는 항시 행복스럽단 말입니다.
이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 살아야 앞서 허두에 말씀드린 바로 안심법문입니다.
'극락(極樂)'이라. 다시 위없는 행복이란 말입니다. 극락은 저 극락세계가 어디에 별도로 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현상적인 눈에 보이는 그런 물질 세계를 떠나서 참다운 정신세계,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는 바꿔서 말씀드리면 성자가 되었을 때는 바로 그때는 어디나 다 극락입니다.
'주인공(主人公)'이라.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주인공입니다.
민주주의도 참다운 주인공 자리를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망령된 알듯말듯한 사람들이 주인이 될 때는 자기도 혼란스럽고 남한테도 혼란을 일으키기만 합니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성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해야 참다운 민주주의가 됩니다.
'묘각(妙覺)'이라. 다시 위없는 깨달음이란 말입니다. 그냥 알듯말듯한 깨달음이 아니라 다시 위없는, 불교말로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婪多羅三必三菩提)라. 이른바 그야말로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위없는 가장 평등하고 궁극적인, 보편적인 가르침이 바로 묘각이고 부처님 지혜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부처고 우리 마음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마음인데 우리가 짧은, 한 80년도 못 사는 인생 가운데서 이렇게 훌륭한 마음을 개발하는 일은 뒤로 제쳐 버리고서 그 엉뚱한 것 때문에, 감투를 제아무리 높이 써봐도 그것은 별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요새 그 일본의 고베 지진을 보십시오. 참화를 당한 3000여명 가운데는 위대한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부자도 많이 있고, 학자도 많이 있고, 그런 참화가 그 사람들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도 언제 올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정말로 다른 허드레 것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저는 그 기독교 예수님 말씀 가운데서 굉장히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가 자기 제자들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제도하려 나아갈 때입니다. 그때 제자 한 사람이 예수께 '주여 저는 지금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님 장래를 모시고 주를 따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말씀이 '죽은 자는 죽은 자 스스로 장래케 하고 그대는 나를 따르라.' 성자가 되는 길이라는 것은 자기 아버지 장래를 모실 그런 시간 여유도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급한 것입니다. 당장에 하늘이 무너져 벼락치고 지진이 일어나고 땅이 무너지면 그때는 경각에 오늘 목숨이 내일 갈지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금방 몇 시간 뒤에 목숨이 어긋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가 못되고서 부처의 길을 모르고 죽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 때는 죽어서는 금생에 닦은대로 갑니다. 욕심 많으면 욕심 많은대로 아귀(餓鬼)로 가는 것이고, 아귀 귀신(鬼神)이 되는 것이고, 성내기를 좋아한 그런 사람들은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阿修羅)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또는 사리 분별을 잘못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돼지나 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대는 보통 상식적으로 말할 때는 돼지나 개는 씨가 따로 있지 않는가? 우리 불교에서는 그렇게 안봅니다. 삼계윤회(三界輪廻)라, 자기가 지은대로 돼지가 되고 개가 되고 소가 되고 사람되고 천상가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나쁘게 배우고 잘 못 살고, 잘못된 버릇 때문에 돼지가 되고 소가 되고 나쁜 사람되고 하는 것입니다.
앞서 삼신일불, 법신, 보신, 화신, 삼신일불 이것은 불교의 대승 경전에는 그때그때 많이 있습니다. 특히 밀교에는 더욱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삼신일불의 체계는 어디서 인용을 했는가 하면은 용수보살(龍樹菩薩), 용수보살은 제 2의 석가(釋迦)라 하는 분입니다. 대승불교는 주로 용수보살 때 추천되었습니다. 용수보살이 낸 책 가운데서 보리심론(菩提心論)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리심론 책 가운데서, 그 당시에 인도 사회에서 용수보살은 석가가 돌아가신 약 250년 뒤에 나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보다는 한 300년 앞서 나오신 분이지요.
그런데 용수보살이 낸 보리심론이라는 책은 그 당시 왕자나 대신들, 학자들, 그 당시의 최고 엘리트 그들한테 설한 수도법문(修道法門)입니다.
여러분들께 지금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그 가운데 보면 앞서 말씀드린 체계도 있습니다. 보리방편문의 맨 허두에 마음 심(心)자가 있지요. 그 다음 것은 한글로 쉽게 풀이한 것입니다.
그 뒤에는 앞서 말씀드린 삼신일불 아미타불 체계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 대의(大義)는 무엇인가 하면 한 말씀으로 말씀드리면 바로 우리 마음이나 또는 우주만유의 모든 것의 근본 성품이 부처다. 그 부처의 대명사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그런 뜻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니까.
이것은 용수보살의 보리심론에 있는 것인데 그 당시에 가장 최고 엘리트한테 하신 수도법문입니다. 그 개요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이나 산이나 냇이나 태양이나 일체 존재의 근본 성품이 부처고, 그 부처의 대명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모든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이름이 많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부처한테 들어 있는 공덕이 하도 많기 때문에 일일이 개념적으로 표현을 못해서 그 공덕 따가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지혜(智慧)로운 면으로 해서 문수보살(文殊菩薩), 자비(慈悲)로운 면으로 해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우리 중생의 영혼(靈魂)을 다스리는 면으로 해서 지장보살(地藏菩薩) 그러는 것이지 이 부처, 저 부처가 뿔뿔이 있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삼신일불(三身一佛), 법보화(法報化) 삼신(三身)이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이것은 불교 사상 가운데서 핵심적인 사상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삼위일체(三位一體)…크리스트교의 정통신조
┌ 성부(聖父 : Holy father) … 하느님 ┐
천주(天主:God)│ 성신(聖神:Holy Spirit) … 성령(聖靈) │조물주(造物主:Creator)
└ 성자(聖子 : Holy Son) … 예수(Christ) ┘
그런가 하면 지금 세계적으로 18억 인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사상의 핵심은 삼위일체(三位一體)입니다.
불교는 한 10억쯤 믿고 있는데 기독교는 18억쯤 믿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10억쯤 믿고 있는 불교인하고 18억 믿고 있는 기독교인하고 또 10억이 훨씬 못되는 이슬람하고 그 세 종교가 서로 옥신각신 싸운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 보스니아나 체챈이나 그런데는 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사움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생각을 할 때에 우리 인간은 참 그야말로 겉잡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비극입니다. 이 종교의 싸움은 문화 문명의 싸움입니다.
기계나 전자로 만든 무기 싸움이 아니라 앞으로는 문명의 싸움입니다.
어느 종교가 가장 위대한가? 가장 위대한 정보가 내내야 종교와 철학이 아닙니까. 세계를 주름잡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싫든 좋든간에 세계 삼대 종교의 핵심을 알아서 공통점(共通點)을 알아야지 그렇지 못하고서는 자기 마음도 편치 못하고 자기 가정도 잘못 다스리고 아들이나 딸들이 기독교 믿고 무슨교 믿고 할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설득을 시키겠습니까. 억지로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냥 도망치고 말겠지요.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과 딸들이 참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배우기는 많이 배웠지만 무엇인가 갈피를 잘 못 잡고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네 어른들이 정말로 세계 삼대 종교의 핵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싫든 좋든간에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싸움판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이것은 예수가 애초에 만든 것이 아니고, 앞서 말한 삼신일불(三身一佛)도 부처님께서 초기에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차근차근 우리 중생들의 지혜가 발달되니까 중생들의 혼란스런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하나의 체계를 세운 것입니다.
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서기 325년 제 1 회 니케아(Nicaeca)회의 및 제 1 회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채택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 및 '아타나슈스 신조'에 의하여 기독교 핵심 교리로 확립되었습니다. 기독교 주교라든가 또는 신부나 학자들이 모여서 혼란스러운 기독교 학설을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서 니케아 공의회라면 유명합니다. 기독교는 가끔 이와같이 교리가 혼란스러울 때 공의회를 엽니다. 공의회에서 비로소 삼위일체를 책정했습니다.
그것은 성부(聖父), 성신(聖神), 성자(聖子)로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하나다. 이른바 성부, 성신, 성자 삼위가 한 몸이란 말입니다.
지금 이 삼위일체 설을 가장 역설하는 데가 몰몬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나 석가나 부처님이나 본래 둘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겉만 보고 삽니다. 겉으로 볼 때는 나는 나요 너는 너요 석가모니는 석가모니고 부처는 부처요 그러겠지요. 그러나 근본 성품, 본질적으로 볼 때는 다 하나란 말입니다.
그렇듯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성부 즉, 우주를 다스리고 섭리하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 가운데 들어있는, 우주 가운데 들어 있는 이른바 성령(聖靈)이 성신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생명이 하느님입니다.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신비로운 모든 것을 다 갖춘, 무소불능(無所不能)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어디에나 있고 능하지 않음이 없는 만공덕(萬功德)이 성령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성부와 성신에 붙둁서 오염되지 않은 사람, 즉 성자가 예수란 말입니다.
예수님도 요단강 하단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禁食祈禱)를 모시고 마구니와 싸워서 비로소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과거 전생에 좋은 일 많이 해서 업장이 가벼웠다 하더라도 하나의 범부였습니다.
석가모니께서도 6년 고행(苦行) 끝에 마지막 보리수(菩提樹) 밑에서 팔만 마구니와 싸워 대각(大覺)을 성취하고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란 말입니다. 대각을 성취한 부처님입니다.
그렇듯이 예수 역시 범부 중생인데 요단강 하단에서 모든 번뇌를 다 조복(調伏)받고 깨달아서 천지 우주의 도리와 하나가 됐습니다. 참다운 신성한 우주의 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명실공히 석가모니(釋迦牟尼), 달마(達磨), 서산대사(西山大師)와 같은 성인들은 다 부처입鎨. 우리 중생도 욕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어리석은 이 모양 이대로는 부처라고는 감히 할 수가 없으니 본래에서 볼 때는 이 못난 이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못나고 못생기고 더러는 남한테 사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용수보살같은 제 2의 석가(釋迦)란 분도 출가하기 전 궁중에 들어가서 궁녀를 희롱하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간신히 역사(力士)들의 칼날을 피해 살아났습니다. 그 때 반성하기를 욕심이라는 것이 이렇게 나를 망치는구나! 다른 사람들은 다 잡혀 맞아 죽었단 말입니다.
이렇게 발심해서 출가하여 제 2의 석가라 할 정도로 위대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다라서 우리가 과거를 더듬어 보면 어느 누구나 다 심란한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같은 경우도 한 50년 가까이 중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자의로 반성할 때 과거에 조금 더 부지런하고 순수했으면 하는 그런 한심스러운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 모양 이대로 자신을 생각할 때는 한심스럽지만 부처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이 하느님 아들이고 또 화신 부처님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중에 또 배우게 됩니다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천지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물질로 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에너지, 순수한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 몸이 물질이고 내가 지금 끼고 있는 반지도 물질이고 이 펜도 물질이고 한데 왜 물질이 아닐 것인가? 내 몸이나 내 패물이나 내 연필이나 이런 것도 다 원자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원자로 안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원자는 무엇인가?
원자 이것은 중성자(中性子), 양자(陽子), 전자(電子) 또는 중간자(中間子) 그런 하나의 소립자(素粒子)로 되어 있습니다. 소립자 그것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현대 물리학에서 모든 물질 구성의 가장 작은 알갱이가 양자, 중성자, 전자 아닙니까? 이제 전기 에너지가 있으므로 전등이 빛을 내겠지요. 그런데 전자나 중성자나 양성자나 그런 차원에서는 측정을 못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측정을 못합니다. 왜 측정을 못하는가 하면 일정한 공간성(空間性)이 없단 말입니다.
전자는 정밀한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모양이 안 보입니다. 움직이는 것만 보이지 일정한 모양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라. 일체 물지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이라. 절대시간, 절대공간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시간성, 공간성을 갖고 있는 것을 우리는 물질이라 하므로 절대물질은 없다고 보아야 옳겠지요.
상대성 이론에서만 보면 물질은 상대적으로는 존재하고 절대적으로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 차원에서 보면 상대적으로도 물질은 찰나 찰나 천류(遷流)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존재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현대 물리학은 물질의 근원에 들어가 물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에너지만 빙빙 돌아서 어떻게 진동하는가? 진동의 특성 여하에 따라서 전자라, 양자라 하는 것이지 일정한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부단히 변화해 간단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산소(酸素), 수소(水素), 탄소(炭素)가 되곤 합니다. 또 그것들이 모여서 다이아몬드가 되고 사람 몸뚱이가 됩니다. 산소, 수소, 탄소 그것들이 적당히 모여서 세포(細胞)를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일체 물질을 구성한 근본 알맹이가 항시 움직이고 있어놔서 무엇인가 모르는데 그런 것들이 또 모여서 된 우리 몸뚱이 이것도 일정한 실체(實體)가 없는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것이라고 볼 수도 없단 말입니다.
내 몸 가운데는 지금 세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포가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화무쌍(變化無雙)합니다. 신진대사(新陳代謝)에 지나지 않는 세포들의 집합체를 지금 나라고 합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니까 내 몸 이렇게 잘나게, 못나게도 보이고 그럴는지 모르겠지만 성자가 볼 때는 본 바탕을 보므로 그 못나고 잘난 몸둥이가 모두가 다 부처님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순수 에너지가 바로 불성(佛性)이고 부처님입니다. 성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성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두두물물이 순수 에너지 불성이요 바로 부처입니다. 우주의 성품으로 말할 때는 법성 그럽니다.
그렇게 모양이 없는 것이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모양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눈으로 잘나고 못나고 보이는 것이지 성자가 볼 때는 본래 모양이 없는 그 자리, 천지 우주에 훤히 빛나는 광명불성(光明佛性), 그 자리를 바로 봅니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보면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설사 독사(毒蛇)라도 모두 광명으로 빛나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나는 못났다 나를 배신한 저놈은 죽여야 한다. 이런 것도 역시 겉만 봐서 그럽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가 다 근본 바탕에서 영원적(永遠的)인 차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부처님입니다. 그러기에 위대한 사람들은 남을 단죄(斷罪)를 못하고 심판(審判)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톨스토이 전집(全集)'도 보십시오. 우리 범부는 남을 단죄하고 나쁜 놈, 좋은 놈이라고 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十字架) 위에서도 원수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고 자기를 핍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모시고 안했습니까.
그런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이 원수가 원수로 보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나가 있고, 너가 있고 하니까 나한테 삐딱한 사람은 원수고 싫고 하는 것이지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안보이니까 원수가 있을 수 없고, 미운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진리(眞理)는 본래 하나!
저는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나 불교의 삼신일불(三身一佛)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종교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본래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는 성자 하면 예수만 성자고 다른 사람들은 성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다른 종교도 함부로 하고 다른 사람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그런 소지가 있습니다.
불교 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도둑놈이나 누구나 모두가가 다 본래로 화신불(化身佛)이란 말입니다.
본래 기독교 사상 역시 예수의 본 뜻대로 예수만 성자인 것이 아니라 천지 우주에 있는 모든 현상계, 나나, 너나, 도둑놈이나, 나쁜놈이나 모두가 다 원래는 성자란 말입니다.
다만 예수나 석가나 그런 분들은 깨달은 성자이고 스스로 성자인줄을 분명히 아는 성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본래는 다 성자인데 미처 번뇌(煩惱)에 가리워서 깨닫지 못한 성자란 말입니다.
만약 예수만 성자고 다른 사람들은 성자가 아니다. 그래 놓으면 결국 다른 사람하고 자기하고 구분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배격도 하고 허물이 생깁니다. 따라서 기독교도 앞으로는 꼭 예수님의 본 뜻대로 예수만 성자가 아니라 누구나 다 한결같이 성자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강목사나 안교수같은 분들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다변 된 사회에 그냥 그렁저렁 살 때가 아닙니다. 세계화(世界化) 하지만 우리가 정신적으로 철학적으로 하나의 도리를 알아야 참다운 세계화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종교인 불교, 기독교가 이와 같이 똑같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슬람도 내내야 똑같은 것인데 기독교 신앙에 좀 미치지 못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그네들을 교도(敎導)하고 가르쳐서 참다운 종교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모두를 회통(會通)하는, 모두를 하나로 보는 진리의 수행자(修行者)가 할 일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가져온 곳 : 카페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글쓴이 : 경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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