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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緣起法)의 의미 (우주의 실상 : 중중무진의 우주)

장백산-1 2019. 2. 13. 16:30

연기법(緣起法)의 의미 (우주의 실상 : 중중무진의 우주)   


2010. 6. 24. 23:03  http://blog.naver.com/royshong/110088698820


중중무진(重重無盡)은 인연(因緣)이 겹치고 겹침이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중중무진은 우주삼라만상만물이 서로서로의 무한한 인연(因緣)들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들, 즉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연기법)으로서의 우주(宇宙)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연기적인 존재들의 인연이 모여서 새로운 연기적인 존재를 일으키고, 일어난 연기적인 존재들의 인연들이 모여서 다시 새로운 연기적인 존재를 일으킵니다.


만일 우주삼라만상만물이라는 각각의 존재가 자신의 개별 자성(自性)으로써 존재한다면 이 우주는 중중무진의 우주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각각의 존재의 개별 자성의 존재는 존재의 조건으로 중중무진의 인연이 필요 없으므로 그 존재에 이르러 중중무진한 인연의 연결은 더 이상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존재도 자신의 개별 자성이라는 것이 없는 중중무진의 연기적인 존재의 우주이므로, 이 우주는 존재와 존재, 티끌과 전체가 서로의 인연에 의지하는 중중무진의 우주라는 것입니다. 검붉은 흙에서 고동색 줄기와 푸른 잎, 붉은 과일이 열리는 까닭은 흙이나 나무, 에너지, 씨앗들이 단독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 인연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중중무진의 인연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중중무진의 우주에서는 꽃 한 송이, 물 한 방울, 나무 한 그루에도 중중무진 우주의 인연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부분의 인연이 전체로 확장되고, 그 전체의 인연이 다시 부분으로 회귀하는 무한 순환을 실현하는 것이 중중무진의 자연, 즉 우주인 것입니다.


북경의 나비의 날개 짓이 뉴욕의 폭풍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귀로 듣는 피리 소리를 예로 들더라도, 그 피리 소리에는 우주의 인연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피리를 부는 사람의 의지, 피리의 재질, 바람 소리, 입김 ,온도, 기압, 소리를 전달하는 매질로서의 공기, 듣는 사람의 귀, 듣는 사람의 의식 등등 그 수많은 인연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중중무진의 우주는 극단적 역동성의 우주입니다. 우주삼라만상만물, 모든 존재가 자성이 없는 무아(無我)이므로, 우주의 모든 존재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인연의 관계망 위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무상(無常)의 연기적인 존재입니다.


찰나의 멈춤이나 정지도 있을 수 없는 중중무진의 인연과 연기가 일어나는 곳이 바로 우리의 존재이며, 우리가 사는 우주인 것입니다. 혹자는 바위와 같이 천년의 세월을 제자리에서 버티는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극단적 역동성을 상상할 수 있느냐고 의문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근저에는 바위가 자신의 자성으로서 그렇게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위가 그렇게 존재하는 형상과 성질에는 내연內緣과 외연外緣, 그리고 인식자와의 멈춤이 없는 인연이 일어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인식되는 바위의 존재에 찰나의 멈춤이나 정지도 없는 인연과 연기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찰나도 멈춤이 없는 인연과 연기의 우주에서 모든 존재들은 일체一切 동체同體를 이룹니다. 세상의 모든 좋고 나쁜 것들의 인연에 의해 나는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므로 일체 동체이며, 서로의 인연에 의지하는 연기 존재들이 이루는 거미줄 인드라 망의 우주이므로 우주와 나의 존재는 일체 동체인 것입니다.


일체 동체이며 중중무진인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사라짐은 다른 하나가 사라지는 원인이 됩니다. 자연의 생명 종種들 사이에서 이러한 사라짐의 현상은 빠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들을 멸절시켜가고 있지만, 그러나 연기법은 그 멸절이 곧 인간의 멸절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예고합니다.


이미 자연의 인간은 사라지고 물질과 소비에 종속된 기형의 인간들만이 남아 있지만, 자연이 해체되면 물질의 인간들도 버티지 못할 날이 오고 말 것입니다. 불교인이면서도 이 중중무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성이라는 이상한 개념으로 중중무진을 대체하기도 합니다. 즉, 모든 생명에 불성이 있기 때문에 살생을 하면 안 된다느니 혹은 모든 존재가 불성이 있기 때문에 범아일여라느니 하는 잘못된 인식입니다.


불교의 모든 개념은 연기(緣起)의 이치를 기반으로 보아야 하므로 불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들은 모조리 중중무진이라는 연기법의 개념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첫 번째 잘못된 관념은, 나에게 불성이 있으므로 나는 부처이다’라는 관념입니다. 이 관념은 나는 중중무진의 연기적인  존재이므로 부처이다’라는 사실을 왜곡하는 관념입니다. 중중무진의 우주에서는 모든 점, 모든 존재로부터 인과(因果)가 비롯합니다. 즉, 내가 인식하는 우주의 모든 인과는 나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의 존재는 내가 인식하는 우주의 우주적 존재이므로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불성을 보거나 깨우침으로써가 아니라 이미 부처인 나의 연기법적인 존재를 자각함으로써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를 보는 자 부처(진리)를 본다’라는 말의 진실한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세간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대로, 나에게 불성이 있기 때문에 내가 부처라면, 나는 불성이라는 무엇을 보거나 깨쳐야만 비로소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불성이라는 무엇을 보지 못하면 나는 언제나 중생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며, 따라서 부처와 중생이라는 분별은 존재적으로 대(對)를 짓게 되는 과오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불성이 있으므로 부처다’라는 말이 이끄는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듣는 것만으로도 부처가 되거나, 아니면 내 안에 내재해 있는 불성을 깨쳐야만 부처가 되거나 하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불성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가 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내재해 있는 불성을 깨치지 못하는 한 중생이라는 주장도 연기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힌두적 인과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성이 있으므로 부처이다’라는 말은 불교를 힌두이게 하는 잘못된 관념임을 분명히 인지하여야만 합니다.


두 번째 잘못된 관념은, 처처處處에 불성이 있다는 관념입니다. 중중무진의 연기 존재들이 이루는 우주이므로 처처가 부처인 것이지, 처처에 불성이 있어서 처처가 부처인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잘못된 관념은, 불성이 있으므로 살생을 하지말라는 불살생입니다. 그러나 나와 일체 동체이면서 나를 존재하게 하는 중중무진 인연의 연기적인 존재들이므로 의미 없는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 불성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살생을 하지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네 번째 잘못된 관념은, 범아일여입니다. 만물에 불성이 있으므로 범아일여라고 하는 것은 만물에 브라흐만이라는 절대 실재가 내재해 있으므로 범아일여라는 힌두에서나 하는 말입니다.


연기법을 말하는 불교에서는 중중무진의 인연에 서로가 의지하여 있으므로 일체동체인 것입니다. 이외에도 불성을 들먹이며 연기법을 왜곡하는 관념들은 무수하게 많습니다. 그러나 불성을 실체화하여 불교의 말씀을 논하는 것은 모두가 힌두입니다. 연기법의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불성이라고 하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본래 자리, 궁극 성품의 불성을 말하는 것은 모두 불교의 거죽을 뒤집어 쓴 힌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중중무진은 존재들이 서로에게 겹쳐 존재하는 것이란 의미이지만, 동시에 무수한 세계들이 서로에게 겹쳐 존재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므로 세계가 존재하며 세계가 존재하므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세계와 나의 존재는 서로의 인연에 의지하는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감성과 의미로서 존재하는 세계, 나라는 존재의 의미와 감성을 존재하게 하는 세계가 서로의 인연에 의하지 않고서는 따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세계와 코끼리의 세계, 뱀의 세계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겹쳐 어울리는 것이 중중무진의 우주요 화엄의 우주입니다.


부처님은 세계가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그리고 생명들마다 다른 세계가 곧 중중무진의 우주이요, 불교에서 말하는 화엄의 우주인 것입니다. 궁극의 성품을 직접 관한다는 견성 불교와 대비되는 것이 남방의 아비담마 불교입니다.


아비담마 불교의 요체는 모든 만물이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임을 통각함으로써 해탈한다는 것입니다. 무아이고 무상임을 분석적으로 펼쳐 놓은 것이 소위, 구경법으로 불리는 82 혹은 72가지 기본 요소들입니다. 즉, 만물은 지, 수, 화, 풍, 마음, 물질 등의 82가지 구경법들이 이루는 인연의 가합물이며 구경법들이 서로 묶여 찰나 찰나로 인연하는 것으로부터의 연기가 만물이라는 분석입니다.


그러나 아비담마 불교는 구경법이라는 존재론적 관념의 요소들을 동원함으로써 중중무진의 화엄 사상을 놓치게 됩니다. 즉, 82가지 부수의 구경법들이 가합하는 인연으로만 연기를 해석하다 보니 존재에 대한 무아, 무상, 고만 붙들고 있게 되고 그러다 보니 개인의 해탈만 추구하는 소승 불교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법무아를 말하는 불교에서 구경법이란 있을 수가 없고, 또 연기란 기본 요소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그런 물리적 현상이 아닙니다. 연기란 그야말로 한량없는 연기적 존재들이 겹치고 겹쳐서 이루는 중중무진의 현상인 것입니다. 중중무진의 연기법이라서 연기법에서는 존재와 세계, 존재와 우주가 분리 불가이며 따라서 연기법의 불교는 존재만 붙들고 씨름하는 소승이 아니라 세계까지도 싸안아서 세계 속에서 실천적으로 실현되어져야 하는 대승의 불교인 것입니다.


연기법(緣起法)의 불교는 궁극의 성품을 보아서 해탈하는 견성의 불교도 아니며, 구경법을 관하여 해탈하는 아비담마의 불교도 아닙니다. 중중무진의 연기법 그 자체를 보는 지혜의 법을 불법이라고 말하는 불교가 연기법의 불교입니다.


궁극 성품이니 82가지 구경법이니 하는 것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후세에서 만들어 낸 인위적 관념들일 뿐입니다. 특히 아비담마 불교의 82가지 구경법 논리는 제가 보기엔 굉장히 이상합니다. 인연 연기를 설명하고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아닌가 유추합니다만, 그러나 물질의 요소들을 동원하여 연기법을 설명하려다 보니 무아의 해석 또한 물질적 해석, 즉,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육체적 물질의 이합집산 차원에서 무아를 설명하고 있는 꼴입니다. 이런 아비담바가 주장하는 위빠싸나라면 그 위빠싸나는 연기법의 위빠싸나가 아니라 물리적 이합집산을 관찰하는 위빠싸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제가 연기법을 주장하니까 견성의 불교는 물론 아비담마 불교까지 싸잡아서 비난하는 양비론의 주장으로 보실지도 모르나, 그러나 연기법으로 보니 잘못 되었기에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뿐입니다. 연기를 이루는 기본 요소들을 82가지 법으로 존재화해서 이들로부터의 해탈을 말하는 아비담마 불교는 물론, 연기를 이루는 궁극 성품을 존재화해서 이를 견성함으로써 해탈하는 견성 불교 모두 존재론적 관념의 오류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도리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법에서 기본 요소이니 혹은 궁극 성품이니 하는 존재론적 관념들을 일체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오직 무상, 무아의 연기법입니다. 무상, 무아의 연기법에 구경법이나 궁극 성품과 같은 존재론적 관념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연기법을 왜곡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출처 : Tong - 慧音의 세계님의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

[출처] 연기법의 의미 (우주의 실상:중중 무진의 우주)|작성자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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