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아무것도 없는 무일물(無一物)의 마음

장백산-1 2019. 6. 10. 11:49

즉심즉불(卽心卽佛),  아무것도 없는 무일물(無一物)의 마음


마음이 그대로 부처, 마음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마음은 육체의 한계(限界)를 벗어나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오고 간다. 공간적 제약도 마음을 가둘 수는 없다. 마음만 먹으면 먼 고향집 앞뜰과 뒷동산은 물론 우주 저 멀리 여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또한 머지않아 죽고 끝날 육체에 비하여 마음은 영원한 성품을 갖고 있다. 나아가 욕망에 억눌린 육체보다 마음은 왠지 순수하고 고결한 느낌이다. 


선(禪)에서는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 한다. 그 표현이 ‘즉심즉불(卽心卽佛)’이다. 이와 유사한 말이 ‘비심비불(非心非佛)’이다. 마음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는 말이다. 마음을 일컬어 황벽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의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고, 부처가 그대로 네 마음이다. 마음과 부처는 다르지 않다.”<전심법요>


그러나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고 말할 때의 마음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보통 말하는 마음이 아니다. 


사실 세상에서 간사한 것을 들자면 마음만큼 간사하고 사악한 당체는 없다. 마음은 평화로워졌다가도 폭풍처럼 사납게 출렁거리기도 한다. 마음이 어느 한 군데 꽂혀 있으면 그 마음에는 바늘 끝 조차 들어갈 틈새가 없다. 그럴 때는 정말 타협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고집불통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마음은 찰나지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며, 오락가락 우왕좌왕 하며, 이러 저리 따지고 비교(比較)하며, 이것 저것 분별하고, 이해타산하고, 헤아리고 해석한다.


그런 마음, 즉 분별심(分別心)은 일정한 한계(限界)가 있는 마음이며 더러운 때가 덕지덕지 낀 마음이다.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이 그런 분별심이다.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 즉 분별심은 시비하고 분별하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이해타산하고 헤아리고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이 분별심이라면 부처의 마음은 무엇인가? 


부처의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은 한계(限界)가 없는 마음이요, 아주 더없이 깨끗한 청정( 淸淨)한 마음이며, 생명력(生命力)이 가득 차있는 마음이다. 부처로서의 마음은 이 세상이라는 경계의 바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잡힌 고요한 마음이다. 일체의 상(相, 이미지, 모습, 생각)을 떠나 있으면서 안과 밖을 가르는 벽이 없는 마음다. 그래서 걸리적거리는 장애물 또한 없는 마음이다. 남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오락가락하지 않는 주체적(主體的)인 마음이며 당당한 마음이다. 허공(虛空)과 같이 한 군데도 막힌데가 없는 무한한 품성( 品性)을 지니고 있으면서 드러난 현상(現像)을 파악(把握)하는 신령(神靈)스러운 영지성(靈知性) 또한 갖고 있다. 이 신령스런 영지성을 다른 말로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성품이라고도 말한다. 게다가 부처로서의 마음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능숙한 화가와 같이 능수능란하게 그려내는 원초적(原初的)인 생명력(生命力)을 지니고 있다. 창조적(創造的) 주체(主體), 무한한 가능성의 당체(當體)로서의 자유자재한 마음, 완전하게 평등하고 평화로운 마음, 그같은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다. 아울러 부처의 마음은 허약(虛弱)하고 허구적인 개념(槪念) 관념(觀念)의 허깨비 같은 마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사는  이 현상의 세상에서 뚜렷이 역력(歷歷)하게 활동(活動)하며 움직이는 마음이다. 부처로서의 마음은 그래서 이 세상과 하나인 혼연일체(混然一體)가 된 마음이다. 


마음이 전부입네 하고 마음에만 집착한다면 그것 또한 어리석은 중생들의 병(病)인 중생심, 분별심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심법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범부는 이 세상이라는 경계에 집착하고, 깨달은 사람은 마음에 집착한다. 마음과 경계를 모두 버려야 진실한 법이다” 


그렇다면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은 같은 마음인가 다른 마음인가? 마음의 본래모습은 중생심이나  불심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본래모습의 마음이 중생심, 즉 분별심(分別心)에 갇혀 있고 속박되어 있으면 중생의 마음이요, 분별심의  감옥 속박에서 벗어나 시비 분별 비교 판단 이해타산 해석하지 않는다면 부처의 마음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마음, 중생, 부처 이 셋은 똑같다(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처의 마음은 平常時의 사람들 마음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우리가 밥 먹고 일하며 얘기를 나누는 일거수일투족이 부처의 마음이나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다만 그 平常時의 사람들 마음이 시비(是非) 분별(分別) 비교 판단 이해타산 해석을 떠나 있으면 부처의 마음이다. 是非와 分別을 떠난 마음은 무일물(無一物)로서의 마음이다. 자취를 찾을 수 없는 마음이요 공(空)으로서의 마음이다. 그 無一物로서의 마음이 바로 걸림 없는 마음이요 創造的인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바로 보아 깨닫는다고 할 때, 그것은 내가 걸림 없는 마음이 된 것을 말한다. 보고 곧바로 깨닫긴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런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體驗의 깊이가 말해준다. 닦음의 깊이가 말해준다. 實踐의 깊이가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한 體驗의 깊이 속에서 우리는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는 도리에 썩 어울리게 참여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보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이요 깨닫는 것이다. 즉심즉불의 의미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고명석/조계종 포교연구실 선임연구원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