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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찾는 '이것'이 찾는 바로 '그것'

장백산-1 2019. 7. 2. 12:25

깨달음을 찾는 '이것'이 찾는 바로 '그것'  - - 법상스님



대승찬'이라는 선어록(禪語錄) 첫 구절에 대도상재목전(大道常在目前)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즉, 무한하고 무량한 큰 도는 바로 눈앞에 있다는 말이지요. 무량하고 무한한 큰 도는 항상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에 무량하고 무한한 큰 도는 눈앞, 목전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도(道), 깨달음, 부처, 마음, 열반, 해탈, 성품, 자성, 불성, 본성 등의 다양한 방편의 이름으로 바로


눈앞, 목전에 있는 대도, 이것을 설명하지만, 이것은 나와 따로 나눠져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법(佛法)은 불이법(不二法)이며, 불이중도법(不二中道法)입니다. 즉, 눈앞, 목전에 있는 대도, 이것은


둘로 나뉘어져 떨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대도, 이것이 어찌 다른 곳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깨달음, 법(法), 진리, 진실, 도(道)를 바깥으로 찾아나선다 한들 그것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 법(法), 진리, 진실, 도(道), 부처, 마음, 열반, 해탈, 성품, 자성, 불성, 본성을 찾는 것인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과 그것은 둘로 나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무한하고 무량한 큰 도는 눈앞에 


있다는 말도 맞지 않아요. 그만큼 둘이 아니고, 가까이 있다는 말을 목전(目前), 당처(當處:이곳, 이 자리)


라는 방편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누구나 내가 바로 깨달음, 법(法), 진리, 진실, 도(道), 부처, 마음, 열반, 해탈, 성품, 자성, 불성, 본성


입니다. 그러니 나를 떠나서 따로 있는 깨달음, 법(法), 진리, 진실, 도(道), 부처, 마음, 열반, 해탈, 성품, 


자성, 불성, 본성를 찾는다면, 그것은 소를 타고 있으면서 소를 찾는 꼴이고, 얼굴에 있는 눈으로 눈을 


찾는 꼴입니다. 



찾고 있는 대상을 놔두고, 대상을 찾고 있는 그놈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보십시오. 명백하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도(道)를 찾고 있다는 명백하게 확실한 사실이지요. 도를 찾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도를 찾고 있는 그 놈이 누구입니까? 무엇이 도를 찾고 있지요?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렇게 도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확실한 사실입니다. 



바로 도를 찾는 그놈이 도를 찾을 것입니다. 찾아야 할 객관 대상이 따로 있고, 찾는 놈이라는 주관이 따로 


있다면, 주관과 객관이 둘로 따로따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둘로 따로따로 나눠지는 그것은 도가 아닙니다. 


둘(二法, 둘로 나눠진 것)이 아닌 불이법(不二法, 둘로 나눠진 것이 아닌 것)만이 참된 법, 진리입니다. 


도를 찾는 놈이 있다는 사실이 곧 도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도를 찾는 당신이, 깨달음을 찾는 당신이 곧 도, 깨달음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도, 깨달음을 찾는 당신, '이것'이 찾는 도, 깨달음 '그것'입니다. 이렇게 작용하는 순간 그것은 명백하게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양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모양으로 찾으려 하면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중생의 습관은 모양만을 볼 줄 아는데 익숙하다보니, 그것을 모양으로만 찾으려고 해서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무언가를 본다는 사실이 눈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따로 눈을 찾아야지만 눈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